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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번영 메시지 63 - 종교에서 보수와 진보란

이동원 (서울북노회,성광교회,목사) 2020-09-04 (금) 07:38 3년전 2018  

1. 종교에서 보수 진보를 나눈다는 것은 적절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종교는 보수와 진보 그 이상이어야 한다.

경전의 말씀에 충실히 따르는 것 뿐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편의상 보수 진보라고 부르고 있다. 한 때는 교회당에서 악기 사용하느냐 교회당에서 의자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적절하냐 하는 것이 과거의 진보 보수의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이념의 문제 한국의 경우에는 보수 진보를 분단된 남북에 대한 태도로 보수 진보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동족상쟁을 겪었지만 다시는 이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되고 평화 공존 협력의 방향으로 가는 것을 진보라고 하고 북한을 비방하고 아직도 적으로 보고 등등이 보수라고 보는 듯 하다.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은 지금으로 말하면 진보 심지어 극좌파라고 불러야 될지 모르겠다. 그의 언행을 보면 말이다.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알려진 일이기에 새삼 언급을 사양할 것이다. 주기철 목사님의 감옥에서의 이야기도 이미 언급한바 있다. 첨언 하자면 나는 손양원 목사님의 아들을 손목사님의 기념관에서 우연히 만나 잠시 환담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훌륭하게 알려진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떠했느냐고 물으며 잠시 환담을 한 적이 있다.

 

1. 종교개혁자라고 부르는 개혁자들 또는 루터는 보수인가 진보인가.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 성경에 근거하는 가장 근본주의적 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보수적이다 보니 아니 성경을 근거한 근본주의적 신앙 신학을 가졌기에 어쩌면 가장 개혁적 진보적이라 할 수도 있을 종교개혁을 한 것 아니 종교개혁의 도구가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본으로 영원한 기준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루터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의 국가적 상황에서 동족상쟁 이제 동족이 총부리를 맞대고 이것에서 성경적인 뜻은 다시 평화 공존 협력이 성경적이다. 누구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북한을 적대적하는 투사가 반공 투사가 애국이고 기독교적이라는 이념의 노예가 된 그것이 보수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재의 보수 진보의 구분인 듯하다.  이것은 실상은 전혀 맞지 않다. 그럼에도 실제로 남북 동족 상쟁을 겪었던 분들은 서로 감정적으로는 적대적일 수 밖에 없을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이론과 계명이 어떠하든 감정이 앞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한 뿐 아니라 북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전쟁을 겪었다면 그것은 생지옥 일 것이고 윤리 도덕 등등의 세상의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떠하였을 것이며 그것은 전쟁이라는 내용인 것이다. 전쟁이란 서로의 생명을 해하는 가장 극악한 행위를 하는 것인데 그 무엇이 정당화 되지 않겠는가,

 

우리의 대통령께서 평양의 광장에서 연설을 하였고 거기에 모인 북한의 군중들은 박수에 기립박수 까지 하였다. 그 때 그 장면을 경험한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전율 전율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남북은 평화의 시대가 왔다고 감격하고 감격하였던 것이다. 거기에 참관한 한 남한의 인사들은 이제 역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 썼다고 함께 눈물겹게 감격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결과적으로 그것도 아니었다. 우리 한국인 남한은 그 정도의 아니 그 이상의 포용력과 넓고 따뜻한 마음을 보여야 할 것이었다. 신앙인들은 더 뜨거운 동포애의 가슴으로 우리의 사랑과 포용력을 그들에게 보여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이제 이 참에 낡은 이념의 노예와 사대주의적사고와 식민지적사고까지 같이 한반도 동포의 마음에서 쓸어내야 할 것이다. 이념의 노예 사대주의적사고 식민주의적사고 안에 갇힘에서 완전 벗어나야 할 것이다. 온 국민이 이제 완전 자주적 정신적 광복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기독교 세력 또는 보수적 또는 기득층은 아직도 성경보다 과거의 동족상쟁의 적대적인사고 그리고 이념에 갇혀있고 사로 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람들을 한국에서 극보수 수구 또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모습은 적어도 기독교  신앙적으로 말한다면 성경적도 보수적도 근본주의적도 전혀 아닌 이념적 노예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 쉬어가기

1. 최근에 소위 보수 아니 극보수라고 칭함을 받아야 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인사들이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를 들먹인다는 것이다. 이 말을 우습다고 어이없다고 지나가는 소가 웃겠다고 표현하면 적절할지 모르지만, 실소를 금치 못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들이 본 훼퍼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말이다. 본 훼퍼는 우리의 이십대 때에 수 십번은 모르지만 십 수번은 들었는 듯 싶다. 어떠한 사람이고 어떠한 사상인가 하고 그의 책 나를 따르라는 책을 읽기도 하였다. 그의 유명세에 비해서 그의 신학 학문적 업적과 성경의 이해를 위해 어떠한 공헌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유명인사이고 소위 진보쪽이라고 할까 하는 곳에서 너도 나도 자주 인용한 듯한 인사이기도 한 것이었다.

이제와서 전혀 그 젊은 시절에는 알지도 관심도 없었던 사람들이 소위 극보수의 사람들이 무엇에 이용하려고 하는지 그 이름을 인용한다는 것이다. 마치 그를 신봉이라도 한다고 하는 듯이 말이다. 누가 그것을 사주 한 듯 하다. 그 당시 진보라고 하는  곳에 서 귀동냥으로 들었던 말을 지적 유식 자랑하는 아는 체 하듯이 사용하는 그 모습이 가련하다.

이십대 젊은 시절도 아니고 육칠 십 중년 이후의 시대에 그를 인용하는 것이 코미디 같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그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말이다. 더구나 이제 와서 말이다. 이제 진보 보수를 넘어 정립할 나이가 한참 지나서 이 십 대의 어떤 모습을 이제 와서 리바이벌 하는 것이 우습다는 것이다.

1. 이제 와서 앙콜 로드쇼인가, 흘러간 옛 노래 다시 부르기 인가. 하기야 요즈음 우리의 대중가요를 활성화하고 세계에수출도 한다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제 서구의 그 유행 신학이 낡은 신학이 되어버렸는데 수출용도 아니고 수입하여 말이다. 완전 흘러가 외국의 옛 노래인데 말이다. 그것도 모르고 아는체하는 극보수의 행태가 한편의 코메디가 아닌지 할 것이다.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할 서구의 신학자를 들먹이며 자신의 유식을 나타내는 모습이 안쓰러운 코미디라 할 것이다. 그 모습은 웃픈 코미디가 따로 없다 할 것이다. 남의 그 이름을 무슨 죤 웨퍼라고도 하면서 말이다. 

진정 보수라면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 신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선동하는 사대주의적 사고가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고 성경의 말씀은 전하는 것이 보수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자기 지식을 과장하고 선동을 위한 인용이라고 하여도 웃겨도 너무 웃기는 것이다.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일부 사람들의 환호에 원맨쑈를 하는 곳인지 아는가, 없는 실력에 외국인 신학자의 이름을 들먹이며 유식을 가장하며 뒷늦게 뒷북치는 듯한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고 슬픈 코미디로 우리를 우프게 하는 것이다.

 

이제 진즉 그 단계를 진즉 넘고 즉 이념의 열심에서 해방을 받아

이제 예수님께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전하고 실행해야 할 때 난데 없이 과거의 외국의 신학자의 유행어를 이제야  복고풍으로 불러 누구를 선동하자는 것인지 말이다. 그 수준이 훤히 보이는 것이다. 종교인은 이념 철학 유행 등등의 세상 풍류 흐름 이상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연구하고 배우고 전해야 할 때가 아닌가 말이다. 목회자 신앙의 영적 지도자들이 이래도 되는가, 이래도 되는가 말이다. 목회자의 이름으로 이래도 되는가 말이다. 완전 코미디다 코미디. 그것도 웃픈 코미디, 우리의 성도님들이 그러한 사설을 듣고 무엇을 배우겠는가, 이것이 어떤 자칭 보수의 현주소인가, 이 우픈 코미디를 듣고 어찌하라는 것인가,)

 

1. 동족상쟁을 비극을 실제로 겪은 분들은 어떤 사상이나 심지어 신앙과 이론적으로 보다 전쟁의 비극을 경험을 하였기에 어떤 이론보다 경험을 근거로 판단할 수 밖에 없는 한계에 있을 것이다.  평화 공존 번영이 아무리 이론적으로 옳다해도 동족상쟁을 겪었다면 감정적으로 받아드릴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을 겪지 않는 세대가 동포를 적대적으로 보는 소위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극보수 수구라는 이념과 사고를 가진 것은 이해할 수도 없고 적어도 성경적 기독교적 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대적 전쟁을 경험한 세대에게는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내용은 적대적 사고와 어떤 이념에 갇혀 있는 것이지 성경적 신앙적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 말씀은 어떤 경우에 현실을 간과한 듯한 너무 이상론을 말하는 것 같지만 계명은 계명이고 진리는 진리인 것이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보수라 할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시대가 변하여도 그 계명과 진리를 따르는 것이 보수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바뀌었거나 보수와 진보는 혼돈스럽다 할 것이다. 지금은 보수는 보수라는 이름대신에 과거에 사실에 갇혀있는 수구라는 말이 조금 더 맞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또는 요즈음 사용하는 무슨  말이 맞을지언정 적어도 보수라는 말은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이다.

 

1. 남북은 평화 공존 협력 번영으로 가는 것이 성경적 신앙적이다. 그것이 기독교적이다. 사실은 그것이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전쟁을 겪었고 그 비극을 보았지만 다시 무슨 리턴메치를 해야되 한다면 그것은 수구 *통이라는 말이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사실은 입으로만 용맹무쌍 호랑이 잡는 소리하지 막상 어려운 상황이 되면 가장 먼저 삼십 육계 할 수도 있고 남북은 공멸이다. 상대가 있는 것이다. 갑자기 통일이 될 수도 없지만 된다하여도 판도라 상자 여는 것이 될 것이다. 신앙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평화 공존 협력이 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진에 번영이 있고 동포와 후손을 위해서 할 최상의 행진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진하는 것과 같다. 그 행진에 어려움이 있다면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주셨다. 그 행진에 상황이 너무나 어려웠기에 초자연적이 기적들이 많았다.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 행진에 어려움이 있다면 오늘도 초자연적이 기적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한반도 평화 번영의 행진의 과정이 어렵더라도 이 위대한 행진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1. 그런데 보수 아닌 극보수 또는 수구 또는 이념에 갇혀있는 듯한 어떤 집회에 국기와 만국기가 아니라 외국기 심지어 일장기도 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식민지 사대적 사고의 결과라 할 것이다. 그리고 외세의 어떤 정보기관이나 어떤 세력이 그 나라를 위하여 한국에 침투라면 그러하지만 로비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가, 자금을 대는 곳 중에 하나가이아닌가 할 정도이다. 한국의 지정학적으로 미국이나 일본이 최전방 방패막이로 사용하기 좋은 것이다. 지정학적 이유 때문이다. 한국이 저기 호주 옆이나 캐나나 옆에 위치해 있다면 전혀 다를 것이다.

한국은 동북아에서 미국의 패권 그리고 중국 러시아 등에 대한 방패 막이 최전방으로 일본은 구상하고 있는 듯 하다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할 것이다. 한국만 자기 편에 둔다면 어떤 경우에도 한국이 방패막이가 된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역사적 교훈이다. 역사적으로 러일 청일 전쟁의 전투장이 어디이었는가. 그들의 땅이었는가, 남북의 동족상쟁에서 일본의 경제적 이익을 신이 준 기회라며 얻었다는 것이다. 이차대전의 패전에서 즉 자기들이 먼저 미국을 공격하고 미일 전쟁의 폐허에서 한반도의 동족상쟁은 그들의 경제 재건 부흥의 기회가 아니었는가, 우리의 민족적 상쟁을 통해 그들은 큰 경제적 이익을 얻은 것이다. 한반도와 일본의 그러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에서 좀 세계사적 안목을 가진 사람은 예외이겠지만 즉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미 평화 협력관계가 마지막 임기말이라 북미평화 관계를 마무리 짓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쉽고  카터 전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평화의 더 큰 역할을 할 뻔하였는데 역시 정권이 바뀌므로 우리의 한반도 입장에서는 역시 너무나 아쉽다 할 것이다.

 

1. 세계 평화의 이익보다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들이 부시 정권 시대에는 한국을 하나의 동북아 패권의 이용물로 한미의 이익이 아니라 미국의 이용물로 삼으려는 일부 배후 세력 로비 세력이 있다 할 것이다.

일본도 한반도가 남북이 적대적으로 되어 있는 것이 자신들에게 좋다는 근시안적 이유,, 남북이 협력 하면 자신들이 손해라고 보는 근시안적이고  협소한 사고 ,, 동북아 평화 번영의 생각보다 말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한국의 한반도의 남북이 적대적 ,, 그리고 그러한 정책을 위해 로비와 재정 지원을 할 수 있다는 또는 지금도 하고 있다는 어떤 기사도 읽은 듯 하다.

 

이러한 사대주의적 이념에 갇혀 있는 듯한 사고에서 신앙인들은 벗어나야 할 것이다.

 

신앙인들은 소위 보수나 진보나 할 것 없이

남북의 평화 공존 협력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평화 공존 번영의 정책은 한국의 경제 문제 완전 해결 아니 한반도의 경제 문제 완전 해결로 동포의 생존 인권 공존 거의 모든 문제를 또는 많은 문제를 경제 문제를 해결하다는 것이다.

 

( 보수와 진보에 덧 붙이자면, 차별 금지법 반대가 보수적 찬성이 진보적이라고 보는 기사를 본 듯한데  찬성을 선동하는 일부 세력의 편 가르기일지 모르나 이 주제에 대한 견해와 진보 보수는 아무 상관이 없다. 자신들이 믿는 경전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판단하면 되는 것이다.

성경적 신앙적으로 보면 그 일부의 내용 때문에 보수나 진보 할 것 없이 신앙인들은 반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진보와 보수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실 예수님의 계명 배려 상식 등이 있는데 무슨 그러한 법을 만들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기독교적 성경적 신앙적으로는 그 내용상 반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것이 성경을 보는 누구나 일 것이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성경적으로는 그 법에 찬성 할 수 없다는 것은 명확관화 하다 할 것이다. 교역자는 말할 것도 평신도들 누구도 그러한 결론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성경을 읽고 듣는 평신도 그 누구도 그 내용의 일부분에 찬성할 수 없다 할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신앙인들은 진보 보수 개혁이라는 기준으로 평가하는 기준이 꼭 적절하다고 할 수 없고 그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야 한다. 한반도의 분단에서 동포가 분단되어 아직도 적대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신앙적인 관점에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어떠해야 하는 것을 숙고하여야 할 것이다. 군중들에게 휩쓸리어 정치적 선동이나 구호에 휩쓸리어 국기는 그렇다 하여도 만국기도 아니고 외세 의존적이고 사대주의적인 외국의 국기나 같이 들고 다니는 것도 생각해 보고 말이다. 또한 제목은 당연하지만 내용에 문제가 있는 무슨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 공존 협력

그것이 성경적이고 신앙적이고

보수 진보할 것 없이 지향해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고

남북 한반도가 경제적 어려움에서 풍부한 복지로 가는 경제이고 인권이고 유익한 길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남북에 한반도에 온 세상에 전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  성광교회 이동원 목사 드림>

 

=.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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