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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번영 메시지 89 - 희귀영상, 포로행진을 보고

이동원 (서울북노회,성광교회,목사) 2021-10-18 (월) 07:26 2년전 850  

1. 희귀영상, 포로행진 영상을 보고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군인들의 행진 말이다. 마치 전쟁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우연히 전적으로 우연히 어떤 전쟁포로 영상을 보았다.

한국전쟁: 1951년 부산 전쟁포로들의 군가 제창의 영상을,

 

건장하고 늠늠해 보이는 다시 보니 누추한 면도 있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군가를 부르는 행진이었다.

양양한 앞길을 바라 볼 때에 ~  생사도 다버리고 공명도 없다~

들어라 힘찬 우리의 맥박을 ~  '' 내일을 기약 못할 그 때의 군인들이 군가를 부르며 행진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 온순하고 선량해 보이는 젊은이들 이었다. 살기등등의 모습은 1도 없었다.

이 군인들은 아군인가 적군인가, 전쟁포로라면 부산 근방의 포로 수용소에서 실제 현장 장면을 찍은 것이라면 남한의 포로수용소에서 찍은 것이라면 북한에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알지 못하였다면 우리의 국군아저씨로 알았을 것이다. 자세히 본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며 보는 장면은 우리의 군인의 모습 그 행진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우리의 남한의 그 연령의 모습 그대로 보였다.

다시 한번 스크린해도 우리의 한국 남한 사람들과 너무나 똑 같았다. 누가 보아도 우리 한국인의 그 시대의 모습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보았다. 다시 한번은 가볍게 보니 전쟁의 포로로서 의식주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어떤 선입견 없이 그 장면만 본다면 우리의 그 시대의 아군의 즉 남한의 우리 군인들의 행진 모습이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을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들의 행진 모습의 우리들의 행진 모습 그대로였다고 보았다. 우리의 훈련소의 군대의 모습이 스쳐갔다.

 

전쟁에 참여하여 행진하는 그 당시의 젊은이들.

1951년이면 그리고 그 참여 당시 나이가 대략 20세라고 본다면 지금은 그 분들이 90세 전후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실제 포로인 포로들의 군가를 부르면 행진하였다.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로 전쟁에 참여했다는 말인가,

 

그 군가는 잠깐 들었지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버린다는 구절의 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황량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어쩌면 선량한 표정으로 열심히 행진하며 군가들을 연속적으로 부르고 있었다.

지금은 그 군가는 포로로 잡힌 포로들 , 그들이 반공으로 전향한 군인들인가, 누구를 위하여 이 한 목숨을 버리겠다는 것인가, 북한의 포로였다면 얼마 전까지 그들은 나라를 위하여 남한을 향해 대적하여 싸우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버리겠다는 것인가, 만약 전향했다면 이제 누구를 향해 전쟁을 하며 목숨을 바치겠다는 것인가, 이 장면을 보고 잠깐 생각하며 만감이 교차하였다.

 

남북한 동포들 남북한 청년들 무슨 위대한 이념의 구호로 군가를 부르며 동포 형제끼리 다시는 적대적으로 싸워서는 안될 것이다.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다. 다시,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다.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정치인들 그럴듯한 이념의 구호 정치적 구호로 남북이 적대적으로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하겠다. 허상의 이념과 구호로 노래하며, 고귀한 젊은 생명이 다시는 희생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 , 사진에 확실한 설명이 없으나 제목으로 보아 북한군으로서 남한의 포로가 된 병사인 것으로 설명하는 듯 한데, 다시 보아도 그 모습 표정 등등이 남한의 병사 같다. 만약 북한군이었다가 남한의 포로가 되었다면 어떻게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았다. 얼굴은 그렇다 해도 표정 몸짓 등등을 보면, 다시 보아도 아무리 보아도 적어도 남한에 포로된 북한군인은 아닌 것 같다. 남한의 군인같다. 실제는 어떠하든,)

 

2. 나의 젊은 이십 대 시절에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책을 보고 크게 감동받았다. 그 때가 군대 전역한지 얼마 안되어서 더욱 실감하였을지 모른다.

 

그 대략의 내용은 그 작가가 서부전선에 참여하였기에 그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책의 내용의 한 장면을 보고 너무나 실감하였고 사실적이었고 문학적이었다. 그 장면의 워딩은 정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선의 포화가 멎은 후 전선을 지나는 데 죽어가는 한 병사가 신음하여 물 물을 찾았다.

그 주인공은 그 장면을 보고 철모에 물을 담아 죽어가는 그 병사에게 주며 마음으로 절규하며 독백한다.

 

친구, 그대의 부모 형제들도 우리들의 부모 형제와 같이 아들의 안부를 생각하며 불안에 잠못자며 기다리고 있겠지, 당신의 부모 형제 자매 모두가 당신 걱정을 하며 말이다. 우리의 부모형제가 애타게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과 똑 같이 말이다. 똑 같은 감정을 가지고,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당신이 그 군복을 벗으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다. 걱정과 염려와 슬픔을 감정을 가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나는 사람을 쏜 것이 아니라 적이라는 개념을 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당신의 부모 형제의 우리의 부모 형제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안절부절하며 잠못자고 당신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제복을 벗으면 똑 같다는 것을 ,’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우리가 똑 같다는 것을, 똑같은 형제라는 것을 ,, (정확한 문장의 위딩은 아닌데 대략 그러한 내용이다.)

 

이 작가는 실제 유럽의 서부전선 전투에 참여하겠기에 그 장면을 실제 경험하고 썼던 것이다. 나는 이십 대 때에 군대를 전역하고 이 소설을 읽고 실감하였다. 나도 군대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감정이 있었기에 더욱 공감하였는지 모른다.

 

그 작가의 글은 현실적으로 사실적으로 적나라하게 묘사한 명문이었다. 이십 대 때에 감동 받은 많은 문학작품을 읽은 중에 감동 받은 한 장면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민하였다면 이 문장을 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

 

다시 그 장면의 한 문장을 쓴다면

'당신과 내가 군복을 벗는다면 우리가 똑같은 형제라는 것을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적이라는 개념을 죽인 것이다'.

 

이 유트브의 희귀 영상을 우연히 보았는데 만감이 교차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희귀영상을 본다면 많을 것을 생각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3. 이제라도 남북관계가 평화적으로 되는 것이

인도주의적이고 남북이 경제적으로 모든 것을 합산하면 천문학적 이익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남북의 분단되고 그 수 많은 애환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실감하지 못한다면 평화번영의 정책을 열심히 헌신적으로 수립하고 실천하겠는가.


그러나 한반도의 역사적 상황을 알지못하고 실감하지 못한다면

누가 이러한 평화번영의 정책을 수립하고 헌신적으로 실천하겠는가.

 

이제라도 남북관계가 평화적으로 되는 것이 인도주의적이고 (인도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

남북이 경제적 막대한 아니 천문학적인 이익이고.( 한반도 남북의 경제 유익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평화 번영의 숭고한 행진에 동참하여야 할 것이다.(신앙인들과 모든 동포들)

    


=. 묵상 (meditation)

(2:4)

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4 He will judge between the nations and will settle disputes for many peoples. They will beat their swords into plowshares and their spears into pruning hooks. Nation will not take up sword against nation, nor will they train for war anymore.

 

(*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고

전 세계시민들에게 특별히 분단된 한반도 동포에게 경제적 유익이다. - 생산하는, 파괴가 아니라 생산하는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것을 선포하고 있다.


(마5:9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 * 우리의 신분을 새롭게 하려면, 요즈음 신분 상승 심지어 신분세탁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이라면 최고의 신분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더더욱 평화케 남북의 평화를 위하여 일히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 결과도 상상할 수 없는 유익으로 최상이기도 한데, 그것을 안하다면 그것을 거부한다면 ,, 역사적 평가 실제적 유익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신분을 포기할 것인가.,,)


 

* 에필로그 (epilogue)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없다의 글 내용을 다시 생각하며 이십대에 문학에 몰입한 것을 추억한다.

어떤 문학작품은 신학서적보다 더 도전을 주기도 한다.

나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엡스키를 신학자 또는 신학도라고도 볼 수 있다고 본다. 그것도 탁월한 신학자 말이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사과나무에서 사과는 왜 떨어지는가 에 대한 의문을 던지며 역사철학 역사신학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그의 작품은 깊은 인생이 추구하는 질문을 찾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도스토예스키의 죄와 벌은 신학도들이 어쩌면 반드시 거쳐가야 할 과정이라고도 생각하였다. 한 청년의 인류를 위한 극단적일 일이 과연 죄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도스토예스키는 시베리아 유형을 가는 중에 누군가가 던져준 성경 (신약성경)을 읽고 그것을 탐독하며 많은 질문을 하였고 그것을 소설을 통해서 표현한 듯 하다. 신학도 또는 철학도의 질문이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실상 누구도 단번에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괴태에 파우스트의 첫 문장은 모든 사람들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것을 찾아 헤매다가 한계에 부딪쳐 방황하는 모든 사람들이 던질 수 있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또한 그 소설을 보면 성경의 어느 부분을 본 느낌이 들 정도이다. 욥기서 말이다.

 

이러한 대표적 서구의 고전 명작을 작가 문호들은 성경의 영향을 많이 또는 절대적으로 받은 듯 할 정도이다.

 

또한 덧붙이자면 스땅달의 적과 흙에 마지막 부분에서 그 젊은 청년의 어떤 그 사회의 부조리 라고 할까 하는 것에 대한 논리적인 외침은 또는 절규를 읽으며 놀라 자빠질 뻔 하였다. 내가 그 나이에 품고 있는 내용과 너무나 똑같았다. 꼭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그러한 공감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러하니 톨스토이 도스토예스키 괴테 스당달 등의 이러한 문학가들을 문호라고 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어떤 여류소설가 또한 한 여류논객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 저러한 이유로 그렇게 더 이상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전혀 알려지려고 하는 의도가 없었던 것 같다. 이 두 사람은 그 사실적인 문학적 표현력의 여류 소설가와 설득력 있는 논객은 웬지 더 이상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긴 시간을 거쳐 알려지지 않는 많은 유명한 책등은 상술과도 많이 연결되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오랜 검증 후 평가가 있는 고전을 보라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인넷 스맛폰 외로 어느 정도는 정보를 얻는 기회가 책에 한정되었던 과거에 비해 어느 정도는 정보를 얻기 위해 그렇게 많은 책이 필요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는 더욱 그러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부분을 완전히 보완하기 위해서도 잘 번역된 성경책 한영 성경책은 필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안에 영원한 생명과 구원 복음 등의 내용은 또 다른 유익이지만 말이다. 아니 내세와 영원과 연결되어있는 결정적인 내용을 주는 책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 ing )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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