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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의 의심과 그 이후 (요20:24-29) - 신앙의 사람들

이동원 (서울북노회,성광교회,목사) 2022-01-28 (금) 07:56 2년전 684  

예수를 신실하게 믿는 많은 사람들이 나도 도마와 같았다는 고백 한 것을 들었을 것이다.

나도 그 의심 가득 찼던 그 면에서는 꼭 도마와 같았다고 말이다.. 나도 그러하였다.

그런데 진리에 대해서 절대 부정은 절대 긍정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진리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엡스키는 말하였다. 가장 강력한 무신론자는 이제 가장 강력한 유신론자에 가장 가까이 왔다고 말이다.

( 헤겔의 정반합 예)



신앙적 체험은 중요하다. 천재 수학자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파스칼은 자기의 수학적 지식으로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믿게 딘 것이다. 자기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찾아 믿은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하나님을 믿고 전한 것이었다.

최고의 수학자 천재 학자라고도 부르는 파스칼이 신앙을 각게 된 것이 어떤 그의 수학적 재능으로 푼 것이 아니라 어머니 같이 따랐던 누나의 죽음을 앞두고 밤새워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려주시면 고쳐주시기를 간구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 병으로 죽어가는 누나를 살려주시면 믿겠습니하며 간구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수학적 이론으로는 불가능한 결과이었 것이다. 그런데 그기도가 이루어져 치료되었다는 것 아닌가, 이러한 개인의 신앙적 경험적 체험에 하나님을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간증하고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고 팡세를 썼다는 것이다. 이러한 천재 철학자도 이론이 아니라 그의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다.

독립운동가 였고 선비였던 그리고 나중에  YMCA 총무의 직임을 감당하였던 이상재 선생의 간증도 이상적이다. 

누가 역사가 누가가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는 의사였기에 직업상으로도 가장 세심하게 합리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역사가이고 문학자이며 의사인 그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 사도행전을 성령복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령행전 ,, 그럼에도 성령복음 ,, 성령행전 ,, (* 개인 체험이 중요하다. 천재 철학자 파스칼 , 이상재 외)  


니체 ,, 시적 문장체,, 신은 죽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언제까지 사셨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사시다가 왜 죽으셨다는 것이다. 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신이 죽었다는 것은 누구도 이해하지도 받아드릴 수도 없을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신은 보이지 않으니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고 신이 죽으시다니 그것이 말이 되겠느냐, 누가 생각해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말이 되지 않는 내용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도발적인 선언을 통해서 무엇인가 경각심을 주기 위한 선언일 것이다.그것은 무엇이겠는가, 왜 누가 들어도 말이 안되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말이 안되는 이 도발적인 선언을 하였을까, 그것은 역설적인 그 무엇을 주장하기 위한 강력한 반어법적 선언일지도 모른다.

한참 생각해 보면 ,,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어떤 절규인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없다가 아니라,, 니체의 신은 죽었다고 외친 것도 사실은 역설적 표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는 신을 부르는 간절함의 역설적 표현인지도 모른다. 신은 죽었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은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무신론자들도 신이 죽었다는 말은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니체는 무엇을 말하는,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차라리 신은 죽었다 외침으로 뭐 신은 죽었다구,, 그렇다면 살아계셨다면 언제까지 살아계셨는데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고 역사하시다고 죽었다고 창조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죽으실 수도 있나 오히려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언젠가 종교개혁자라고 불리우는 그런데 차라리 종교개혁자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자로 쓰임 받은 사람으로 불러야 할 루터가 어느 날 집에 오니 그의 부인이 소복을 입고 대성통곡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 누가 죽었느냐 왜 우느냐 하니 예 하나님이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 뭐라구요 하나님이 죽어 하나님이 죽으실 수 있나 하나님이 죽다니 있을수 없는 일이야,, 아니 그러면 왜 당신은 마치 하나님이 죽으신 듯 그렇게 두려워 하느냐, 그래 루터가 다시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어설프게 교리를 왜곡하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죽었다 외침으로 각성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믿으면 왜 그대들이 믿음이 그러하냐고, 니체가 어떠한 뜻으로 말했든 결과적으로 그러한 각성을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서구 유럽의 교회가 쇠퇴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차라리 니체의 말과 같이 신은 죽었다 외침으로 경종을 울리며 다시 하나님을 찾고 더욱 새롭게 하는, 차지도 덥지도 않는,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곳에 어떤 강력한 언어의 폭탄을 터트리는 것과 같이 말이다.


사도 바울 그는 유대교 율법이나 많은 학문으로 예수님을 배운 것이 아니라 그의 성령으로 너무나 강력하게 만나고 예수 믿고 그 생명을 다하도록 예수의 사도로 사명을 다하였다. 그 많은 지식이나 학문으로가 아니라 그의 성령으로 그의 말씀으로 찾아온 예수님을 만남의 교통하는 놀라운  체험으로 그리고 보이는 놀라운 응답으로 여전히 살기등등하여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기 위해 가는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단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이상의 교통과 놀라운 역사들이 있었다. 행전 9장을 자세히보면 누가 읽어도 무엇을 꾸며서 지어서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나 생생한 사실적 기록인 것을 알 수 있다.

혹 누가 무엇때문이 이러한 이야기를 꾸며만들 이유가 있겠는가, 사도 바울이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거짓을 근거해서 자기 생명다하여 사도직을 할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인류 역사상에 거짓을 고의적으로 꾸며 만들어 그 거짓을 위해 자기 생명을 다하여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역사상, 세상에 그러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 그가 유대교 신앙과 열심 그리고 많은 학문을 공부하였다. 그러한 그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육신으로 오시고 대속의 죽으심 부활을 믿지를 않았기에 구약의 신앙을 가지고 예수를 핍박, 예수를 믿는 교회를 핍박하다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선언하고 자기 생명을 다하여 예수님을 그 메시야 그 그리스도로 전하였는가, 행9:  그리고 그 이후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 부활이후 그 누구도 예수님을 육신으로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바울에게 나타나 역사하신 하나님은 예수님은 이렇게 역사하셨다. 이것은 믿는 많은 사람들이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 세례 요한마저도 예수님이 구약에 오시기로 예언된 그 분인가 잠시 순간적인 의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심은 진리를 진리의 말씀을 더욱 드러낼 것이라는 것이다. 마11:)


우리가 잘 아는 좀 더 유명한 사람들의 체험적 예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다음의 몇 분들의 예를 보자.

어거스틴 - 그의 지식으로가 아니라 성경을 펴 보라는 주님의 좀 더 강력한 음성을 듣고 변화와 확신 믿음을 갖게 되었다.

루터 - 법대 대신에 신학을 공부하게 된 극적 사건이 있었다.


루터 부인 소복 입고 통곡한 이유  


파스칼의 지식과 체험

(* 파스칼 역시 그의 수학적 지식으로 주님의  살아계심과 그 역사를 찾은 것이 아니라 그의 경험적 체험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역사를 알게 된 것이다.)

이상재 

(* 그가 예수를 믿고도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에 확신이 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간구를 어떻게 역사하셨는가에 대해서 그의 체험을 말하고 있다.)

예수부활 증거는 오히려 철저한 무신론 자였다가 예수를 믿은 기자가 썼다.( 예수사건, 리스토로벨. 예일대 법대 출신의 노련한 기자가 추적하여 예수의 신성,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내용이다. / 기독교학자나 목회자가 쓴 것이 아니라 철저한 무신론자가 신앙을 갖게 되어 사람을 만나고 사건을 추적하여 쓴 책이다.)

그러고 보니 부활장은 교회 핍박자였던 사도 바울이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육신 예수님을 본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의 성령으로 만나고 체험 동행하였기에 부활장을 쓴 것이다. 바울은 부활 후 사십 여일 동안에도 예수님을 본적도 만난적도 없었다. 그러나 행9: 을 보다.)

어느 유명 목사님이 신학교를 들어가 보니, 저마다의 많은 체험들에 자기의 신앙 간증 체험은 명함도 못 내놓겠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 한편 세례 요한마저도 잠시 순간적 의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11:)

(- ing )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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