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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0일 (금) 일점일획_“죄”에 대한 묵상(1)(IBP)

이종덕 (익산노회,삼광교회,목사) 2023-03-09 (목) 22:11 1년전 353  
"죄"에 대한 묵상(1)

우진성목사(과천영광교회)

I. 

기독교가 제공하는 이야기 세계 안에서, 인간은 "죄"라 불리는 근본 문제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이다. 기독교 신앙은 복음을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공하여 왔다. 널리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교리 안에서, "죄로 인하여 타락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죄 용서를 받고 구원 받는다"는 한 문장이 기독교의 복음의 요약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와 "죄 용서"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여기서 "죄"에 대한 이해가 살짝 잘못되면, 복음과 구원을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지평에서 풀어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나라"나 "공동체"와 같은 기독교 중심 가치들이 기독교의 복음과 구원의 이야기 속에 자리 잡을 여지가 협소해 진다. 한마디로, 예수 믿고 얻는 "나의 개인적 구원", 그 이상의 이야기를 복음에 담아 내기 어렵다는 말이다. 현실적으로 교회에서 가르쳐지는 복음은 "죄 용서를 통해 얻은 개인적 구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경우가 많지 않은가?

과연 성경이 말하는 "죄"는 무엇이고 "용서"는 무엇인가? "죄와 용서"는 이렇듯 개인주의적 담론일 뿐인가? 아니면 공동체적 지평 속에서 이해해야 하는가? 


II. 

이런 물음을 가지고 "죄와 용서"에 관한 성경의 언어를 살펴보자. 

"죄"하면 바로 떠오르는 대표적인 헬라어 단어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의미는 무척이나 넓다. 성경 밖 헬라어에서는 하마르티아는 "신에 대한 인간의 잘못"을 뜻하였는데, 그 잘못은 신에 대한 사소한 실수부터 심각한 도전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이었다. 어쨌든 이 단어의 기본 의미에는 "신에게 범한 인간의 잘못"이라는 면이 있고, 그런 점이 기독교의 "죄" 이해와 맥이 통했다. 앞서 언급하였듯, 기독교는 "죄"를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살거나,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삶을 사는 인간의 상태에 대한 언어로 사용하여 왔다. "죄"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 온 것이다. 

성경 안에서 사용된 하마르티아의 용례에 이런 흔적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장면은 레위기 4장에서 찾을 수 있는데, 4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잘못을 저질러, 나 주가 하지 말라고 명한 것을 하나라도 어겼으면 . . . (2)

이스라엘 온 회중이, 실수로, 함께 책임을 져야 할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은 비록 깨닫지 못하였을지라도 죄가 된다. 나 주가 하지 말라고 명한 모든 것을 하나라도 어겨서 벌을 받게 되면, 그들이 지은 죄를 그들 스스로가 깨닫는 대로, 곧바로 총회는 소 떼 가운데서 수송아지 한 마리를 골라 속죄제물로 바쳐야 한다.(13-14)


레위기 4장은 "죄"(하마르티아)를 이렇게 "하나님에게 범한 잘못"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하마르티아는 하나님께서 정한 "바름"(혹은 "올바름")의 기준을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레위기 4장에 사용된 하마르티아는 하마르티아의 고전적 의미와 일맥상통해 보인다. 

그런데 과연 레위기 4장(과 구약의 다른 장면들) 속에서 사용된 하마르티아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문제일까? 2절이 말하는 "나 주가 하지 말라고 명한 것"이나 13절이 말하는 "함께 책임을 져야할 잘못"과 "나 주가 하지 말라고 명한 모든 것 가운데 하나"는, 개인이 하나님께 범한 잘못이 아니라,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잘못을 말하는 것 아닌가? 

성경의 다른 하마르티아 용례들이 이 질문에 대답한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을 하마르티아라고 할 때, 그런 잘못을 인간 "서로에 대한 잘못"과 떼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죄"에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과 인간 서로에 대한 잘못이 겹쳐져 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과 "인간에 대한 잘못" 모두에 하마르티아가 사용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잘못과 인간 서로가 범하는 잘못이 교집합으로 겹쳐 있다는 말이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을 이렇게 비판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이방 사람에게 말씀을 전해서 구원을 얻게 하려는 일까지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죄의 분량을 채웁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이르렀습니다.(16)


유대인들이 바울 사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이방인들까지 바울 사도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를 바울 사도는 "죄"ἁμαρτία라고 표현하였다. 이 "죄"는 하나님에 대해 잘못한 일인가? 아니면 인간에게 잘못한 일인가? 명확하게 나눌 수 없고, 그 둘이 겹쳐져 하마르티아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창세기 마지막 장에 전해지는 야곱의 당부 속에서 사람에 대한 잘못과 하나님에 대한 잘못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려 할 수도 있겠다.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17)


이 구절에서 "허물"은 아디키아ἀδικία에 대한 번역이고, "죄"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에 대한 표현이다. 아디키아는 형제 간에 범한 잘못을 표현한 것이고, 하마르티아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을 표현한 것일까? 그래서 하마르티아가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잘못에 대해 사용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아디키아와 하마르티아가 사용된 것은 형들이 요셉에게 잘못한 일을 말하는 것이며 반복법으로 같은 뜻의 단어가 두 번 반복된 것으로 보는게 좋겠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죄를 하나님에게 잘못한 것 혹은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이해하면서 종교적인 개념으로 협소하게 이해하는데, 그런 이해는 하마르티아의 의미를 축소해 버리는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마르티아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과 인간 상호간의 잘못 모두를 담고 있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인간 상호간의 잘못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이요, 하나님에 대한 잘못이 인간 상호간의 잘못으로, 동전의 양면 같은 둘의 관계를 하마르티아가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아래 성구 역시 하마르티아가 그렇게 사용되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요한일서 3장 

4   죄를 짓는 사람마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5   여러분이 아는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6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마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그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알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 . . 8   죄를 짓는 사람은 악마에게 속해 있습니다 . . . 9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 . . 10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가 여기에서 환히 드러납니다. 곧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과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 아닙니다 . . . 11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 . 23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은 서로 사랑과 죄의 관계를 보여준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하나님에 대한 "죄"와 서로 사랑하지 않는 "죄"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죄를 덮을 수 있다. 


III. 

하마르티아와 관련하여 한 가지 별도로 집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초대교회의 선포(케리그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다"는 고백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초대교회의 예수 이해에서, 예수가 하신 중심적인 일을 "죄 용서"로 보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래는 케리그마에 "죄 용서"가 표현된 예이다. 


이것은 죄를 사하여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마태복음 26:28)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행전 2:38)


이 예수를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하기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사도행전 10:43)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 바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죄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사도행전 13:38)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17)


히브리서 10:11   모든 제사장은 날마다 제단에 서서 직무를 수행하면서 똑같은 제사를 거듭 드리지만, 그러한 제사가 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의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리신 뒤에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로 인하여 "우리 죄가 용서 받았다"고 할 때 "죄"에는 하마르티아가 사용되었고, "용서"에는 동사형 아피에미ἀφίημι나, 명사형 아페시스ἄφεσις가 전형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아피에미/아페시스의 기본 뜻은 "죄로 인하여 받을 형벌을 면제해 주다"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덕분에 "죄의 결과"를 우리가 받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죄 용서"라는 아주 단순한 표현에 예수의 삶, 죽음, 부활이 응축되어 담기게 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 죄의 용서와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은 유대 문화 속에서는 제사 전통의 "대속" 사상이,  헬라 문화 속에서는 "고귀한 죽음"noble death 사상이 논리적 매개 역학을 했기 때문이다. 

기억해야 할 점은, 예수를 통한 죄 용서를 말할 때 사용된 하마르티아 역시 앞에서 말한 하마르티아의 풍성한 의미를 그대로 가지고 있되, 밀도 높게 압축되어 표현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케리그마는 그 속성상 압축되어 표현되다 보니, 이웃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방식과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로만 귀결되는 어떤 "죄"가 따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하마르티아는 사람에 대한 관계에서 표현되기 마련이다. "죄 용서"를 받았다는 것은, 그런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는 second chance를 부여 받았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 용서"는, 죽어서 천국가는 티켓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랑의 관계를 거듭 거듭 시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격려이자 능력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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