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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7일 (금) 일점일획_“이웃”에 대한 묵상(IBP)

이종덕 (익산노회,삼광교회,목사) 2023-03-16 (목) 21:46 1년전 331  
레아(רֵעַ): "이웃"에 대한 묵상 –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5-37)


- 송민원 목사


삼일절에 일장기를 아파트 베란다에 내건 어느 개신교 목사의 사건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일장기가 “화해와 평화의 상징”이기를 바랬습니다(중앙일보 2023.03.09). “일한 관계(한일 관계가 아니라)가 우호적이고 미래 지향적으로 나가야 할,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라는 점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합니다(뉴스앤조이, 2023.03.07). 이웃을 사랑하고, 화해와 용서의 정신으로 더불어 함께 나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면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라고 저 역시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웃”이라는 표현에 가장 가까운 나라 일본, 혹은 “대일본제국”은 포함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누구는 그 “이웃”에 포함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나요? 누가복음 10장에서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물었죠: “내 이웃은 누구니이까(눅 10:25, 개역개정).” “이웃”의 기준은 무엇이고, 어디까지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 가지 부연하자면, 누가복음의 “율법교사”는 노미코스(νομικός)”의 번역으로, 토라, 즉, 성경(당시는 구약을 지칭)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전문가를 말합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성서학자’ 정도 될 수 있겠습니다. 나름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 예수님께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아(רֵעַ)의 의미와 번역


구약성경에서 “이웃”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히브리어는 레아(רֵעַ)입니다. 어근 라아(רעה)는 ‘(누구를) 가까이 하다, (누구와) 어울리다, 섞이다, 사귀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잠 13:20, 28:7, 29:3). 참고로, 이사야 11장 7절의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개역개정)”의 동사는 티르에나(תִּרְעֶינָה)인데, ‘풀을 뜯다, 목축하다’라는 의미의 어근 라아(רעה)로 판단하여 해석한 것입니다. 이 단어를 동음이의어인 라아(רעה), 즉, ‘가까이 하다, 사귀다’로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암소와 곰이 함께 어울릴 것이다/서로 친구가 될 것이다’.


명사로는 주로 “이웃” 혹은 “친구”로 번역됩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이, 연인’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친구와 대화하듯 모세와 말씀하셨다는 표현에서 사용되며(출 33:11), 아가서의 남녀는 서로를 레이(רֵעִי)와 라으야티(רַעְיָתִי)로 부르는데, 개역개정은 이 단어를 각각 “내 사랑하는 자”와 “나의 사랑”으로 번역합니다. 그 뜻은 ‘내 옆에 있는 남자/여자’입니다. 이웃과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모두 포함될 수 있는 것은 이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가 ‘가까이 있는 사람, 함께 어울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으로나 심정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이웃이고 친구이며 연인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 복음서의 인용


율법(구약성경)의 핵심을 두 계명으로 압축하면서 예수님은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십니다(마 22:24-40). 율법의 정수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은 당시 예수님만의 독창적인 성경 이해인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동일한 이야기를 누가복음은 율법학자의 입을 통해 전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눅 10:25-28)


율법교사의 마지막 문장은 레위기 19장 18절 하반부를 인용한 것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여기서 “이웃”으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레아(רֵעַ)입니다. 네 옆에 있는 사람, 너와 가까이 있는 사람, 너와 친분과 교제가 있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다음에 이어지는 율법교사의 질문은 “이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바로 그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여행 중에 강도를 만나 폭행을 당해 죽어가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를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하여 지나갔지만”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 역시도 “여행하는 중”에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를 돌보아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되묻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여기서 저의 질문입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되나요?


이 율법교사의 질문은 자기를 중심으로 어디까지, 어느 범위까지 이웃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거리상으로 반경 몇 미터까지 ‘가까운 거리’로 규정될 수 있는가, 인척으로 따지면 몇 촌까지 이웃인가 정도의 대답이 기대되는 질문입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로 출발합니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죠. 이 사람의 관심은 자신의 영생, 자신의 생존입니다. 이 역시 자신을 중심으로 한 질문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는, ‘아 그럼, 내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일차적으로 떠오른다면 그 역시 자기를 중심으로 한 사고이자 신앙관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어디까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 어디까지 가줄 수 있어?”라고 되묻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 역시 그 지역 사람이 아닙니다. 그도 또한 여행객일 뿐입니다. “이웃”의 기준은 내 삶의 터전이 어디 있느냐가 아니라, “강도 만난 자”가 어디에 있느냐 이고, 내가 그를 “피하여 지나가지” 않고 그를 “불쌍히 여겨” 상처를 싸매 주고 숙소를 제공하고 돌보아 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에서 시작한 질문은 “가서 이웃이 되어주라”로 귀결됩니다.


누군가에게는 현재의 일본 정부 혹은 “대일본제국”이 “강도 만난 자”로 여겨지는 듯 합니다. 침략적이고 약탈적인 제국주의를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에서는, “강도 만난” 일본을 공격하고 협박하며 “우호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일한 관계”에 위협이 되는 “평화의 소녀상”은 없어져야 할 “강도” 같은 존재가 되나 봅니다. “강도 만난 자”를 누구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결정됩니다.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당신에게 강도 맞은 자는 누구입니까?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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