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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웃·농촌은 하나’ 수도자이자 혁명가의 삶

관리자 2007-04-27 (금) 10:45 16년전 6992  
한겨레 조연현 기자
≫ 해남등대원에서 이성용 원장이 아이들과 공을 차고 있다. 이제 원생들의 대부분은 부모의 사업 실패와 이혼 등으로 부모와 함께 살기 어려운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한국기독교 120년 숨은 영성가를 찾아 ⑧ ‘해남의 등대’ 이준묵 목사 /

≫ ‘해남의 등대’ 이준묵 목사
한반도의 땅 끝 전남 해남. 산골 소년 오영석은 공부를 잘했지만 집이 가난해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학교에 간 사이 지게를 지고 풀을 베던 소년은 어느 날 하나님 앞으로 편지를 썼다. ‘너무나 공부가 하고 싶다’는 하소연이었다. 소년은 ‘하나님 전상서’라고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 돈이 없어서 우표도 붙이지 못했다. 그 편지를 본 우체부는 편지를 한 목사에게 전했다. 그렇게 해서 목사의 집에서 공부를 한 소년은 훗날 한신대 총장이 되었다. 우체부가 하나님에게 온 편지를 배달할 만큼 해남에서 신망이 높았던 이는 해남읍교회 이준묵(1911~2000·사진) 목사였다.

1945년 해남읍교회 맡아

이 목사가 평생 의지할 데 없는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준 집 ‘해남 등대원’. 이성용(66) 원장이 뜰에서 아이들의 친구처럼 어울려 공놀이를 하고 있다. 이준묵 목사의 장남이다. 서울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서울의 기업에서 고위 간부를 +하던 그는 49살에 낙향해 아버지의 뜻을 잇고 있다. 그의 아버지 이준묵은 많은 등대원 아이들의 은인이었지만, 그에겐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분’이었다. 아버지에겐 언제나 등대원과 교회와 지역 사람들이 우선이었고, 자식은 뒷전이었다. ‘성녀’로까지 불리는 어머니 이수덕 또한 아버지와 다름없었다. 이 원장은 국민학교 4학년 때 몹시 아파서 학교도 갈 수 없던 날 아버지가 자전거 뒤에 태워 학교까지 실어다주는 장면이 눈만 감으면 지금도 영화 필름처럼 선명히 떠오른다. 그만큼 아버지의 눈길이 그리웠던 그의 ‘상처’속엔 6·25 등으로 부모를 잃은 등대원의 고아들을 친자식과 차별 없이 보듬고자 했던 아버지 이준묵의 ‘시대적 소명’과 ‘삶의 고뇌’가 배어 있다.

이준묵도 어려서부터 병과 가난의 아픈 시절을 보냈다. 간신히 중학과정을 마치고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던 이준묵은 목사로서 1945년 1월 해남읍교회에 발령났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초가집교회에 10여명의 할머니 신자들뿐이었다. 그는 처음에 크게 실망해 광주로 돌아가버렸다. 그러나 기도하던 중 그처럼 아무것도 갖춰진 게 없는 곳이기에 정작 자신의 헌신이 필요한 곳이라는 곳을 깨닫고 돌아왔다.


날품 팔아 고아들 돌봐

이준묵은 곧바로 해남기독교청년회(YMCA)와 삼애농민학원을 설립해 땅 끝 해남을 ‘희망의 땅’으로 만들어갔다. 그에게 ‘하나님과 이웃과 농촌’은 하나였다. 세 가지를 사랑하는 ‘삼애’는 바로 그의 삶이었다. 그는 ‘광주의 성자’ 강순명 목사의 독신전도단에서 함께 활동하던 친구 이현필이 고아들을 계속 돌보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1953년 등대원을 설립해 날품을 팔아 고아들을 대신 보살폈다. 그리고 선명회의 후원을 받아 낙후지역 개발을 이끌고, 삼애농민연수원 등에서 영농기술을 보급했다. 그는 해남유치원부터 시작해 해남고등공민학교, 호만고등기술학교, 해남수성경로대학, 천진어린이집, 해남장애인종합복지관 등을 설립하거나 운영했다.

그는 ‘목사’만이 아니었다. 종교를 넘어선 해남 지역 공동체의 등대였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해남까지 왔으면 대흥사는 꼭 들러봐야 한다”며 대흥사로 안내하곤 했다. 성용도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국민학교 때 대흥사에서 1주일간 참선을 하기도 했다.

이준묵은 그러면서도 신자가 서넛에 불과한 마을도 놓치지 않고 돌보았다. 그러는 사이 해남에서 하나의 교회는 무려 50여개의 교회로 불어났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어두운 새벽 뒷산에 올라가 수도승처럼 기도했던 이준묵은 날이 밝으면 수도자에서 농촌의 혁명가로 변했다. 한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많은 일을 한 이준묵의 말과 태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인사치레의 빈말을 하지 않았고, ‘예’와 ‘아니오’가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쌀쌀맞다거나 독선적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사람들은 이준묵이 자기 자식에게조차 예외가 없이 그렇게 대하는 것을 본 뒤에야 그의 본모습을 이해하곤 했다.

학교 설립·농촌 부흥 앞장

이준묵의 유일한 형으로 그를 자기 몸처럼 사랑했던 이문환은 호남비료공장과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공장인 아세아자동차를 설립한 당대 제일의 사업가였다. 그런데도 이준묵은 늘 자전거를 타고 먼 길을 다녔고, 남들이 버린 국민복을 기워서 입었다. 머리도 늘 집에서 스포츠머리로 깎고 살았다. 그는 늘 가난했지만 해남은 갈수록 활기를 띠었다. 덴마크엔 농촌부흥을 이끈 그룬투비가 있었고, 한국엔 이준묵이 있었다.

해남/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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