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교회 개혁을 꿈꾸며'(무안시찰 신년하례회 발제글)

윤동주 (경북노회,구야교회,목사) 2009-01-06 (화) 20:39 15년전 5459  

교회 개혁을 꿈꾸며...

 

글쓴이: 전남노회 무안시찰위원회 해제남부교회 윤동주 목사

 

들어가는 말

요즘 사람들의 입에 뜨거운 감자로 오른 것은 교회에 대한 것이다. 선술집에서도 소주 한잔에 안주로 오르는 것 중의 하나가 정치이야기와 경제 이야기 그리고 교회 이야기 이다. 왜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조차도 교회를 안줏감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이런 고민이 요즘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설교하며 가르치는 목사들의 고민일 것이다.

교회는 지금까지 성장이란 이미지의 교회를 만들어 왔다고 본다. 이제 이미지 변화를 가져와야 할 시기가 된 듯하다. 루터가 1517년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 반박문 즉 질문을 던지며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고 491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새로운 교회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고, 이미지 변신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런 고민을 무엇으로 해결해볼까? 루터는 성서로 돌아갈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성서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 교회의 현상이 무엇인데 그렇게 고민스러운가를 거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번 달(2008년 12월) 기독교 사상에서 특집으로 다룬 주제가 “한국교회여, 헛된 희망을 말하지 말라”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갖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성서적인 교회와 교인들의 모습인 것을 교회에서 어떻게 말하고 가르치기에 헛된 희망을 말하지 말라고 할까?

이번 글에서 요즘 교회들이 말하고 있고 가르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지적해보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미지 변신을 꽤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요즘 교회들

 

1) 신앙고백의 문제

기독교 사상 2008년 12월호에 한완상 교수는 “예수 이름으로 예수를 괴롭히는 교회”란 제목으로 교회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다. 그의 논지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한국교회는 1907년 장대현교회의 회개 운동을 시작으로 부흥과 성장을 해왔다. 그것은 아주 고무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근본적으로 회개해야 할 일들이 많다고 본다. 그것은 역사적 예수(실물예수) 없이 두세기를 보내 왔다는 것이다. 그 원인을 한교수는 사도신경의 신앙 고백에서 보고 있다. 사도신경 속에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부분이 나타나지 않다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에서 빌라도로 직행한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문제를 심각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은 주후 5세기 이후 오늘까지 계속 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안일한 불감증에 살고 있다는 것이 한교수의 지적이다. “예수는 축소되고 그리스도는 확장되는 것은 곧 역사는 외면당하나 신화는 존중된다는 뜻입니다.” 사도신경의 구체적인 부분을 살펴보면 이렇다. “동정녀 마이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의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복음서에서 증거 하는 예수의 실제적 사건들은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오는 역사적 예수는 말씀의 선포자, 증거자, 실천가였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제시하고 실천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교회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고백 보다는 교리적 숭배 대상인 그리스도로 예수를 변질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를 편중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크로산은 “그리스도는 예수 이상이지만, 그렇다고 그 이하도 아니다.”란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속에서 균형적인 신앙의 고백을 할 때 비로써 작은 예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교수는 “이러한 위기의 시점에서 예수따르미들은 실물 예수를 예수따르미의 삶의 중심에, 그리고 그들의 신앙고백 중심에 다시 정중히 모셔야 합니다.”하고 강조한다. 그의 예수 따르미의 실천 방향을 두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예수는 영적 존재로서 역사적인 사건들의 중심부에 계셨던 분으로 사랑에 찬 영의 눈으로 인간과 자연과 사물을 관찰하는 분이셨다. 그런 예수의 삶을 배워야 한다. 둘째, 우리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들을 올곧게 해결하기 위한 예수와 영적으로 끊임없이 역지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현실은 예수이름과 교회 현실이 따로 노는 것 같다. 심지어 예수 이름으로 예수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여기기서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킨 것과 같이 예수의 이름으로 새롭게 일어나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교회 안에서 역사적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를 순간순간 체험하며, 이 땅과 역사 속에 하나님나라 곧 사랑과 용서의 새 질서, 정의와 평화의 새 세상을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한 가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와 성과들을 이야기 한다면 저자가 속한 한국 기독교장로회는 상당히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으며 사회적으로 파장을 많이 일으키기도 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과거 유신체제와 군사정부 시절에 역사적 예수의 모습인 혁명가의 모습을 강조하기도 하였고, 가난하고 억눌린 자의 친구인 예수의 모습을 민중 신학의 중심에 두고 이 땅의 민중이 곧 그리스도임을 천명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아마도 논문 한편이 나오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2) 자본주의 교회

자본주의란 사유 재산과 자유 시장 경제에 바탕을 둔 경제활동 체제이며, 개인의 자유로운 이윤 동기가 비인격적 장치인 시장을 통해 확장된 협력을 이룬 결과 사회의 물질 생산량이 늘고 사회 구성원 전체의 복지가 향상된다고 믿는 정치 이념이기도 하다. 이런 자본주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① 사유재산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 ② 모든 재화에 가격이 성립되어 있다는 것, ③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하여 상품생산이 이루어진다는 것, ④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는 것, ⑤ 생산은 전체로서 볼 때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 체제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 시대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성장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이루어온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천당보다는 더 좋은 것이 현실에서 부자가 되는 것이요, 이 땅에서 축복받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한국 교회에 나타난 것은 지금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땅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오면서 특히 미국과 캐나다의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함께 들어온 것이 자본주의였던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전 세계에 자리 잡고 있던 시대 즉 인문주의가 활발해 지던 종교개혁시대와 같은 시대에 교회와 자본주의는 큰 충돌을 가져왔다. 그러나 차츰 교회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로 내려가 신 중심적인 교회를 인간의 자리로 내려 인간의 삶을 잘 영위하면서 신앙을 키우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중세시대나 종교 개혁시대에는 교회의 높은 도덕성을 요구 했던 시기 이다. 그래서 루터도 상업을 천시하고, 재물을 늘리는 것을 경계했으며, 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 하였다. 루터는 오직 인간이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했으며, 그러한 영적 거룩성을 일상생활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사랑과 희생의 높은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던 교회가 자본주의의 낮은 도덕성 즉 남을 한량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요, 굉장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나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을 나도 남에게 하지 않는 수준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수준도 요즘 교회 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 되었다.

도덕적으로 낮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성장지상주의가 교회에 광풍으로 불어왔다. 몇 년 전 저자도 총동원주일 컨퍼런스에 참여해 본 경험이 있다. 그곳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어리둥절함 이었다. 예수의 사랑과 삶의 모습을 그려내기 보다는 거대한 건물(작은 축구장 크기의 교회) 앞에 압도되게 만들었고, 화려한 무대와 사람의 눈과 귀를 현혹시킬 만큼 현란한 조명과 음향들이 조금 과장해서 나이트클럽을 방불케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았던 것은 영상과 모노드라마와 같은 것으로 현실의 영상 문화의 최첨단 있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교회에서는 수십억의 예산을 투자하고 그 투자된 것에 대해 효과를 얻기 위해서 부교역자와 평신도들에게 전도할 것을 강요하고 강요되어 찾아온 사람들을 교인으로 만들고 그 교인들의 주머니를 털어 투자된 것에 대한 이윤을 얻기 위한 노력이 치열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주 극단적인 비판임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저자가 느낀 점임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사족이 길었다. 그럼 다시 논지로 돌아와서 자본주의가 교회와 접하게 되면서 교회는 낮은 도덕성과 성장지상주의가 자리 잡게 되었고, 그렇게 됨으로 인해서 교회가 해야 할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어디가고 교회라는 조직 자체의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며, 좋은 종교 상품을 판매하는 요즘 흔히 말하는 다단계 조직이 되어 버리지 않았나 싶다. 예수의 복음이 좋은 상품이 되었다. 진리의 길이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는 길이 되어 버렸다. 숫자가 힘을 갖는 교회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교인수가 많은 교회가 힘이 있는 교회이고 그 교회에서 시무하는 목사가 능력 있는 목사가 되었다. 요즘은 통계가 아주 큰 힘을 갖는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에서도 통계가 사람들의 선거 방향을 좌지우지 하는데 큰 몫을 차지했다. 공정성과 신뢰성이 높다고 하는 말고 통계 오차가 0.몇%라고 말하면서 신뢰도가 높은 통계라고 하며 사람들의 여론을 조장하는 모양새가 아주 그럴듯했고 그것에 현혹된 많은 사람들은 판단의 기준을 자신의 마음에 두기보다 통계에 두고 투표하는 경향이 발생했다. 이 이야기 밑에서 정치적인 면에서 다루기로 한다.

여하튼 자본주의의 체제 아래서 교회는 더욱 하나님과 멀어져 갔고, 교회는 많아지고 성장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없는 그런 모양새의 현재 한국의 교회에 나타나고 있다.

 

3) 정치교회

2007년 11월 한국은 대선으로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그때 김지방이란 국민일보 인터넷뉴스팀에서 일하는 한 기독교인이 ‘정치교회’란 책을 내면서 교회에는 큰 파장을 가져왔었다. 그의 책을 읽으며 정치에 가까이 아니 정치와 손잡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참으로 마음이 아플 뿐이다. 그것도 한 평신도의 눈에 비쳐진 교회와 목사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면서 비판의 글을 쓰고 있는 책의 저자를 생각하니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대선이 끝이 나고 MB정부가 출범한지 1년이 되었다. 1년이 세월은 참으로 한숨만이 나오고 말았다. 그것은 세계 경제가 어려워서 한국 경제도 어려워진 탓도 있고, 한국의 정치 퇴보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그것도 참... 할 말이 나오지 않는다. 최근 모 방송국 100분 토론에 신해철이란 가수가 초대되어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어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신해철은 "정말 청소년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동방신기와 비의 노래가 아니라 국회다"라고 말한 뒤 "오히려 국회를 유해단체로 지정해서 청소년들이 뉴스에서 (국회를) 못 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토론이 끝나고 나와서 못 다한 이야기를 신문기자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해철은 “실제로 하고 싶었던 말을 10분에 1도 못했다”며 특히 이명박 정권을 전두환 정권과 비교했던 대목에 대해서는 “전두환이 아니라 나치랑 비교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또 삼천포로 빠져서 감정에 치우친 저자의 글들이 난무하는 것 같다. 정신 차리고 논지를 찾아 가보자

정치와 교회가 손을 잡고 함께한 것은 교회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가 죽고 그의 제자들과 바울은 여러 곳을 다니며 선교하다 순교하게 되었다. 그러던 교회는 다양한 지방에서 정통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이단과 싸워야 했다. 그렇지만 당시 교회는 다양한 의견들이 맘껏 개진 될 수 있는 천국이었다. 왜냐하면 포괄적으로 합의된 원리를 바탕으로 교회가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교회가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발전해 나가자 점차 다양성은 사라지고 통일성이 강조 되어 갔다. 이 같은 흐름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는 그리스도교를 철학과 정치체계로 전화시키려는 시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신앙의 지성화를 인해 신앙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어수단을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정치화는 교회사 속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이후 몇 세기가 되지 못해 세상의 권력과 짝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 인해서 교회의 권위와 권력은 지상의 권위와 권력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것이 중세의 교회 모습이었다. 그랬던 교회에 비판을 가하고 겸손하게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고 개혁을 벌인지 491년이 지났다. 그런 현 시점에 한국 교회는 MB정부와 결탁하여 안 그래도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목사들과 교회들 때문에 거기다 이단들의 득세 때문에 욕을 먹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한 단계 더 내려간 개독교로 전락되고 말았다.

김지방의 책 ‘정치교회’에 보면 한국 개신교가 실질적으로 성장한 것은 1970년대 부터였다. 이때 교회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예수의 말씀을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었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가르쳤다. 그래서 70년대 80년대 치열했던 민주화 투쟁을 외면하거나 수수방관했다. 게다가 이들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맡겨야 한다는 훌륭한 핑계를 대고 있었다. 그런 보수주의 교회들 속에서도 KNCC 계열의 교회들은 민주화 투쟁에 큰 역하을 감당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당시 많은 교회와 교인들에겐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금기였다. 그러다 1987년 이후 보수 교회는 조금씩 현실 정치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중적 정치 참여 운도이라 할 수 있는 공명선거감시단 활동이 1987년 대선에서 시작되었고, 한기총이 설립된 것도 1989년이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과거에 내세웠던 정교 분리의 원칙을 폐기 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다. 그러자면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반성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보수 교단들은 정치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1990녀대 중반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이 결성되고 급기야는 2007년 뉴라이트란 조직이 결성되며 한국의 정치 현장에 목사들이 전방에 서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한국의 정치교회로의 모습을 갖는 하나의 모습이 국가조찬기도회이다. 국가조찬기도회란, 개신교계가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 내지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도 하고 아침식사도 하는 모임인데, 대통령과 대법원장, 국회의장 등 주요 인사들이 관례적으로 참석한다. 1965년 박정희 정권 당시 ‘대통령조찬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바꿔 말 그대로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이 되었다. 제1회 대통령조찬기도회 때 CCC 총제인 김준곤 목사는 “박 대통령이 이룩하려는 나라가 속히 임하길 빈다”고 기도하고, 2회 때는 “우리나라의 군사 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군사 구테타를 찬양했다.

또한 한국의 교회들은 권력을 향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의 표출이 2007년 대선 때 큰 교회 목사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치적 발언을 하며 장로 대통령 세우기를 하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 주일 예배 설교에서 노골적으로 MB 지지를 거듭 호소했고, 노무현정부와 북한의 공산주의를 맹비난하였다. 그런 김목사에게 한 기자가 “이렇게 정부를 맹비난하고도 불이익이 두렵지 않습니까?”하고 물었다. 대답은 “공산화되면 어차피 교회는 망가지는데 죽을 각오로 막아내야죠. 조용히 제 몸만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러한 김홍도 목사는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범죄들을 저지르고 국가법으로 유죄 선고를 받기도 했던 사람이다. 그 외에도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는 정치적 행보의 줄타기를 해왔으며,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는 신중하게 대선에 임했다. 그러나 MB가 태통령이 되고 나서는 가장 앞장서서 MB를 지지하며 기도로 후원한다고 말한 사람이 조용기 목사이다.

너무나도 할 말이 많은 정치 관련된 교회 이야기는 여기서 줄이는 것이 좋을 듯싶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문제만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 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 않은가! 이제는 성서적인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 앞에서 비판한 내용들에 대한 대안들을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찾아 제시해 보고자 한다.

 

4) 대안을 찾아서.

신앙고백은 그리스도교 용어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 또는 교회의 믿음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 고백은 사람 마다, 공동체 마다 다른 신앙의 고백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 아니 전세계 그리스도교(가톨릭포함)는 사도신경이란 신조를 암송하고 있다. 사도신경은 사도신조(使徒信條)라고도 하는데, 이 명칭은 예수의 12제자(사도)가 각기 1구절씩 만들었다는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전승은 신약성서나 초대 교부(敎父) 및 고대 교회 총회의가 그에 관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하여 부정되고 있다. 4세기경 서방교회에 보급되어 미사 전례(典禮) 절차에 삽입되었는데, 루터와 칼뱅은 그것을 미사 전례에서 떼어내어 《교리문답서》에 넣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이것을 존중하게 되었는데, 현재 사용되고 있는 내용은 2세기 후반 성립된 '로마신조'를 바탕으로 하여, 5~6세기경에 갈리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이단적(異端的)인 주장이 대두하여, 이 신조를 기준으로 이단·정통 여부를 가렸으므로 상징(symbolum)이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삼위(三位) 즉 하느님·그리스도·성령에 대한 구체적 신앙고백으로 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수난·부활·심판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고백이다.

이렇게 신앙고백의 중심에 사도신경이 자리 잡아 내려온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사도신경이 우리의 신앙에 작은 울타리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외부 이단의 공격을 막기 위한 울타리, 내부 결속을 위한 울타리. 그런데 그 울타리가 이제는 너무나도 좁은 것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로마시대의 작은 지엽적인 상황 속에서 발생한 사도신경의 고백이 현재 종교 다원주의 시대와 인터넷과 멀티미디어의 발달로 신앙의 형태들이 하나의 상징(위에 상징이란 호칭이 붙기도 했다는데)으로만 남아 버린 것은 아닌가?

이제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에 새로운 신앙고백이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각 공동체마다 나름의 신앙고백문을 발표하고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신앙고백문이 나올 때 사도신경에 위배된다는 형식으로 서로 정죄하며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는 논쟁과 시비가 발생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주적인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그 우주적인 그리스도를 교회의 교조 속에 묶어두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자는 시무하는 교회에서 신앙 고백을 사도신경으로 하지 않고 올해 처음 참여했던 기장 농목대회에서 농어민 신앙고백이 있었는데 너무나 나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와 그것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자본주의 교회의 문제는 현실을 벗어나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말로 극단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잘못된 부분이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다면 그 자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 자리할 수 있도록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질에 대해서 누가복음 16장 13절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하고 말씀하신 내용을 볼 수 있으며, 마태복음 19장 21절 “만일 네가 완전해지고자 한다면 가서 네 재산을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재물, 요즘말로 하면 자본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본이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어떻게 하느냐 하는 말을 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교인들의 공동생활을 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현실에 이루어지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니 그 또한 문제이다.

그렇지만 세상 모든 것이 자본주의로 흐른다고 해서 교회까지 그 흐름을 따라서 산다면 교회가 세상에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모양으로 산다면 예수의 삶을 왜 배우고 따르겠다고 고백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논리로 교회를 판단하는 이런 교회성장지상주의의 모습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자본주의 경제논리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 요즘 경제가 어렵다고 기업은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다. 하다못해 MB역시 모든 정치를 경제논리로 끌어가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은가? 세상의 자본주의 경제논리는 이득을 얻지 못하면 죽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은 그렇지 않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 자리해야 할 그곳에 세상 자본주의 경제논리가 자리 잡고 앉아서 교회 성장을 부추기고 있으며, 교회 성장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부교역자나 교회 직원들에 대해서는 과감히 내치는 일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교회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 교회와 기업의 차이는 무엇인가? 더하여 교회성장이 되지 않으면 안 좋은 교회란 인식을 갖고 있는 이런 모습은 한 교회의 목사로서 비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말씀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면서 예수의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잘못 가고 있는 것이야 하며 말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만든 것은 세상의 그 누구도 아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다. 대안을 제시하려 했는데 이거 다시 비판의 소리만 나오고 있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제 우리는 교회의 중심자리에 자본주의 경제논리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 자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건물을 키우기 위해서 빚을 수십억씩 지면서 덩치 큰 교회를 만들기 보다는 가난한 자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고, 실족하고 심령이 죽은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을 위해서 우리의 자본을 예수의 사랑의 법으로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나가는 것이 자본주의 교회를 극복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정치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중세의 교회가 무너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정치적으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것 그것이 물질을 얻는 것 보다 더 매력적이고, 정치적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물질은 저절로 따라오니 큰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사단이 예수를 광야에서 시험할 때 가장 높은 산에 올라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그 유혹에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는 말씀을 하신다. 그것은 신명기 6장 13절의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애굽의 높은 정치 경제적 우위성을 의지 하지 말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 22:21)하는 말씀과,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행 5:29)의 베드로와 사도들의 말처럼,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롬13:1)의 바울의 말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속해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 너머의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 앞에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나가는 말

이상 우리는 교회의 세 가지 관점에서 교회를 비추어 보았다. 우리 삶에서 민감하게 다가오는 것들이다. 신앙 고백의 문제가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를 바라보는 나의 눈이 어디에 있는지 중요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역시 예수를 보고 고백하는 나의 모습이 어떠냐에 따라 나머지 두 개의 문제는 어느 정도 정화 혹은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의 삶에서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 예수 그리스도 즉 역사적 예수와 신성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아우르는 신앙의 고백과 삶의 모습이 있을 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될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찾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마음일 것이다.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