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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산실

관리자 2007-05-17 (목) 15:09 12년전 6755  


민중신학의 산실,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선교교육원

 



한눈에 보기겡도 유서 깊은 건축물인 선교교육원은 1921년 캐나다선교회가 세웠다. 선교사이면서 사업가인 H. 모리스가 일제강점기 때부터 소유하고 있던 토지에 역시 선교사이면서 의사인 맨스필드가 1921년 러시아풍의 건물을 세워 병원 진료실 겸 사택으로 사용하였다. 모리스는 경인철도 건설권과 광산 개발권을 최초로 따낸 서양인이다. 그러다가 1970년 두 나라 교회 사이에 선교협약을 맺으면서 캐나다선교회가 한국기독교장로회에 무상으로 기증하였다.
글. 류외향 / 사진 황석선

자생적이고 독창적으로 싹튼 민중신학

1970, 80년대 한국의 기독교는 민주화운동의 맨 앞줄에 있었다.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진영에서 기독교는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깨우침을 얻고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다. 그때의 기독교는 지금과 달랐다. 노동자, 농민이 역사와 구원의 주체였으며, 교회는 민중을 보호하고 그 뜻을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민중의 고난의 역사와 함께하는 것이 곧 구원의 길이며, 그것이 바로 살아 숨 쉬는 성서의 메시지였다. 예수 자신이 민중이었고, 그러한 구원의 길을 실천한 메시아였기 때문에 그때의 신학자들은 이미 박제되고 죽어버린 ‘말씀’의 신학을 거부하고 새롭게 ‘발견’하기 위해 연구하고 실천했다. 그리하여 1970년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 하에서 태어난 것이 민중신학이다.
민중신학은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가 시작된 1960년대에 싹텄으며, 1971년에 일어난 전태일 분신 사건을 시작으로 유신체제 하에서 연이어 터진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구체적으로 발화했다. 1970년대의 한국 현대사가 없었더라면 이와 같은 매우 독창적인 기독교 사상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 1백 년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신학적 성과로 꼽힐 만큼 민중신학은 한국 내의 특수한 상황에서 싹튼 자생적이고 독창적인 신학이며, 그로 인해 한국의 기독교로서 신앙 정체성을 확고하게 띠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와 전통에서 분리되고 단절된다는 것을 뜻했다. 또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간에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세력을 지지하고 따르는 것을 뜻했다. 그것은 서구의 교회가 오랜 세월 동안 기득권을 유지하고 부를 축적하고 세를 늘이기 위해 주입해왔던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었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지배이데올로기에 젖은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성서가 오랜 기독교 역사 속에서 망각되고 은폐되어 온 민중의 복음이라는 참뜻을 밝혀내었다.
이러한 민중신학은 신학자 안병무, 서남동 박사에 의해 태어날 수 있었다. 만일 그 시대에 그들이 없었더라면 민중신학은 태어나기 어려웠으리라고 여길 만큼 두 신학자의 존재는 특별하고 소중하다. 한국 신학계의 거목인 그들은 서구 신학의 진보적 정수를 사상과 방법이라는 양면에서 두루 체득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신학을 창조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안병무 박사는 1975년에 처음으로 ‘민중’을 신학 해석의 핵심으로 사용하였고, 같은 해에 서남동 박사는 <민중의 신학>이라는 글을 통해 영적 구원보다는 정치적 구원이 신학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독교 민중사와 한국 민중사를 신학 내부로 끌어들였다.  

민주화운동 주역들의 활동 근거지




서울 서대문에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선교교육원은 민중신학이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한 소중한 공간이다. 지하철 2호선 충청로역에서 내려 경기대학교 정문을 향해 올라가다 큰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된다. 표지판이 따로 없어 찾기가 쉽지는 않지만, 충정로 2가 동사무소를 이정표로 삼는다면 동사무소를 등지고 오른쪽으로 약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 건너편에 고풍스런 돌담으로 길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선교교육원을 만날 수 있다. 정문 벽에 어수선하게 붙어 있는 문패들을 보아서도 그곳이 선교교육원이 맞는지 아리송하긴 하지만, 고개를 들어 언덕바지에 있는, 담쟁이덩굴로 덮인 빨간 벽돌 건물을 본다면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그곳에서 권진관(55세,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를 만났다. 그는 1977년부터 1981년도까지 선교교육원에서 기숙하며 신학 공부를 했다. 당시 선교교육원은 민주화운동을 하다 제적당한 학생들과 해직 교수들의 주요한 활동 근거지였다. 권 교수 역시 서울대 사회복지학과를 다니던 중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을 살았고, 출소 후 선교교육원에 들어와 전공과는 무관한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안병무 박사가 선교교육원 1대 원장을 맡기 시작한 1976년부터 위촉생 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해 돌아갈 학교가 없는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독일에서 신학 공부를 한 안병무 박사는 독일 교회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얻고 있던 터라 독일 교회의 재정지원으로 그러한 프로그램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제가 있을 무렵에는 한 20명 있었는데, 한신대 제적생과 타 대학 제적생이 반반 정도였습니다. 다들 똑똑해서 교수들이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어요. 한 방에 다섯 명에서 열 명씩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학생들은 좋은 대우를 받으며 마음껏 활동할 수 있었지요.”

그곳에서 강의를 했던 교수들은 문동환, 문익환, 한완상, 박현채, 이문영, 강만길, 송건호 등 당시의 내로라하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민중신학, 민중사회학, 민중사학, 민중경제학 등을 가르쳤다. 또한 해직 교수뿐만 아니라 한신대의 전신인 한국신학대학에서 재직 중인 교수들도 강의를 했다. 그곳에서의 공부는 철저하게 반독재?민주화 투쟁을 위한 복무라는 사회?역사적 사명감을 바탕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수업과 세미나, 반정부 투쟁이 늘 병행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배를 피해 도피 생활을 했던 학생들도 많았다. 농민분과, 노동분과, 학생정치문화분과 세 개 분과를 만들고 지도교수를 두어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공부를 하며 실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나갔다.

선교교육원에서 학습되던 민중신학은 기독교장로회 내부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전체 한국 교회 내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무엇보다 학생·노동·농민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민중운동 진영으로 광범위하게 파급되었다. 그러면서도 선교교육원에서 생활하던 학생들이 권력기관으로부터 탈을 입지 않았던 것은 그곳이 성역이었기 때문이었다. 몇 차례의 내사가 있긴 했지만, 다른 조직체에 비한다면 탄압이 적었던 편이었다. 


선교교육원 내부가 예전과 비교해고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며 이 곳 저곳을 설명해 주는 권진관 교수.

권진관 교수처럼 전공과는 무관하게 선교교육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해서 목사가 되거나 신학자가 된 학생들도 많았다. 권 교수는 교육원 생활을 하던 중에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 다시 감옥살이를 하게 되어 2년 반 과정을 5년 만에 마쳤다. 이후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성공회대에서 신학 강의를 시작했다. 물론 당시에는 신학 공부가 목적도 아니었고 신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학생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민주화였기 때문이었다. 독일 교회의 충분한 재정 지원, 성역으로서의 자유 그리고 우수한 교수진들의 지식 세례 속에서 그들은 민주화를 위한 열망을 키우고 드러내는 데 매진할 수 있었다. 또한 또래의 운동권 학생들이 모여서 몇 년 동안 함께 생활하다 보니 그 자체만으로도 그곳은 해방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굉장히 낭만적이고 재미있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MT를 갔는데, 삼등열차 타고 덕유산으로 놀러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같이 밥해먹으면서 4박 5일 정도 신나게 놀았지요. 그러면서 깊은 동지애가 생기고, 지금도 가끔 만나면 다들 그때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 시절을 되새기며 이야기를 들려주던 권 교수는 음담패설이라는 대목에서 쑥스러운 듯 크게 웃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일화로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종강예배 때 안병무 박사가 설교를 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날 그는 연신 졸고 있었는데, 졸면서도 언뜻언뜻 들려오는 설교가 이상하게도 마음을 움직여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굉장히 감동적인 설교였다고 전했다. 타계한 지 10년이 된 안 박사는 당시 설교를 하면서도 자주 울었다고 한다. 쫓겨난 학생들에게 쫓겨난 교수들이 졸업장을 준다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릴 만큼 학생들을 몹시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러한 따스한 마음과 감동적인 설교가 권 교수를 비롯한 많은 학생들의 정신세계에 깃들어 신학자와 목회자의 길로 나아가게 했을 것이다.

철거 위기를 맞았던 유서 깊은 근대 건축물



2004년 12월 31일, 선교교육원은 서울시 등록문화재 목록에 올랐다. 한눈에 보기에도 유서 깊은 건축물인 선교교육원은 1921년 캐나다선교회가 세웠다. 선교사이면서 사업가인 H. 모리스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소유하고 있던 토지에 역시 선교사이면서 의사인 맨스필드가 1921년 러시아풍의 건물을 세워 병원 진료실 겸 사택으로 사용하였다. 모리스는 경인철도 건설권과 광산 개발권을 최초로 따낸 서양인과 동일인물이다. 그러다가 1970년 두 나라 교회 사이에 선교협약을 맺으면서 캐나다선교회가 한국기독교장로회에 무상으로 기증하였다.

그러나 문화재 등록 절차가 완료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기독교장로회총회 측에서 빌딩을 짓기 위해 선교교육원을 철거하려고 하자 하태영(현 서울 녹번동 삼일교회 담임목사), 김원배(현 목포 유달제일교회 담임목사) 등의 젊은 목회자와 시민단체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하지만 워낙 오래된 건물이다 보니, 설립자와 설립시기와 관련한 정확한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기독교장로회총회에서 일본인 소유의 적산가옥이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을 펼치면서 철거가 기정사실화되는 듯했다. 그러다 캐나다선교회가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인가신청서와 캐나다 선교사들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를 통해 위와 같은 사실이 밝혀졌고, 그럼으로써 비로소 등록문화재로 인정되어 철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현재 선교교육원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 평화인권연대 등 많은 시민단체가 입주해 시민운동의 새로운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기독교장로회총회가 수유리에 있는 아카데미하우스를 매입해 이주하면서 선교교육원도 옮겨갔으며, 이름도 ‘총회교육원’으로 바뀌었다.
벽과 칸막이 등이 생기면서 내부는 바뀌었지만, 외형은 그대로이다. 그 옛날에는 캐나다선교사들의 후원으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하던 한국 목회자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선각자들을 길러내던 곳으로, 저 암울했던 군부독재 시절에는 기독교의 양심이자 중심이었고 메카였던 곳으로, 또 지금은 시민운동의 새로운 근거지로 쓰이며 민중신학이 그랬듯 언제나 민중과 더불어 낮은 곳을 향해 온 그 뜻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에서 민중신학의 정신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군부독재는 종식되었으나, 민중의 삶은 여전히 난처하고 딱하다.

“지금 한국 기독교가 매우 부패했고 민중신학을 폐기했습니다만, 민중신학은 세계적인 신학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한국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도 절실하며, 사회의 지탄을 받는 부패한 기독교를 구해낼 수 있는 것 역시 민중신학뿐입니다.”

그러면서 민중신학자들의 노력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권 교수는 강조했다. 함께 공부했던 동지들과 후배들을 만나 그 방법을 모색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인도의 달리트 신학자들과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전했다. ‘달리트(dalit)’는 카스트 제도 밖에 있는 불가촉천민을 뜻하는 말로 ‘달리트 신학’이란 곧 인도의 민중해방신학을 일컫는다. 달리트 신학자들 한국이 민중운동과 민주화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만남을 매우 반기고 있다고 한다.
여전히 유효한 민중신학의 생명력에서 언제나 민중과 더불어 살았던 갈릴리 예수의 구원의 손길을 느끼며, 한국의 자생적인 신학이 전 세계 민중들의 해방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희망한다.

선교사이며 의사인 맨스필드가 1921년 러시아풍의 건물을 세워 병원 진료실겸 사택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1977년 농민지도자교육장면


1978년 위촉생 졸업장면 / 사진제공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

 

이 기사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희망세상> 2007년 5월호 내용의 기사를 올린 것입니다. 글과 사진의 권한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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