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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표 목사님을 추억하며...

조영식 (경북노회,나아교회,목사) 2007-04-09 (월) 16:23 16년전 6914  



이중표 목사님을 추억하며

조영식 목사


저는 20대 나이에 개인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많은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목회하시는 아버지의 목회에 누가 되어 서울에 올라와 고모님의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도망가는 저에게 한신교회를 나가라고 권유를 했습니다. 그래서 출석한 곳이 한신교회입니다.

당시에 저는 너무나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많은 빚을 지고 법적인 문제도 걸려 있었고 앞날이 불투명하고 소망이 보이지 않던 시기라 더욱 은혜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중표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저에게 꿀보다도 더 달고 많은 위로과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목사님을 통하여 은혜를 받던 중 1992년도에 한신 신대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신대원에 입학하고 나서는 교회학교 총무로 교사로 섬기며 봉사를 하였습니다.

당시에 목사님은 별세설교를 많이 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죽어야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순교자들의 예화를 드실 때는 꼭 눈물을 흘리시면서 마치 순교를 사모하는 듯이 말씀을 전하셨는데,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말씀을 듣는 교인들의 눈에도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장의 “내가 빚진 자”라는 설교는 당시 빚을 지고 있던 저에게 많은 감동이 되었었고, 로마서 6장 11절의 ‘산 자’에 관한 설교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더욱이 사업에 실패하여 빚을 진 저로서는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하여 나를 더욱 낮추셔서 하나님의 종으로 쓰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자 매사가 나를 낮추고 별세시키려는 훈련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이중표 목사님의 별세와 저의 상황과는 잘 맞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더욱 은혜를 받게 되었고 삶과 사역에서 별세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한신대 신대원에서의 생활은 늘 감사한 생활이었습니다. 저는 실력이 없는데 신학교에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감사한 생활이었습니다. 동기생들도 좋았고 참 꿈같이 재미있는 기숙사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사생회장도 하고 기숙사의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때 동기생이나 신학생들은 이중표 목사님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습니다. 그 비판이 참 강하였는데, 한신교회에 나간다고 하면 ‘중표리우스’(이중표목사님을 추종한고 놀리는 말)라고 놀리기도 하였습니다. 왜 비판적이었는 저는 이해는 하였습니다. 한신의 신학과 학풍이 민중신학이었고 교회 성장과는 거리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중표 목사님의 성경해석과 설교가 알레고리적이라고 비판했고, 목사님의 목회방식과 태도가 권위적이라고 비판을 했습니다. 어떤 신학생은 교회를 옮기라고 진심으로 저를 생각해서 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을 통하여 은혜를 받던 저는 다른 교회에 옳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도에 신대원을 졸업하고 한신교회에서는 정식으로 전임전도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행정실에서 일을 하였는데, 주로 요람을 만들고 교회의 굳은 일들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바쁘고 힘든 시기였습니다. 처음에는 김태환 목사님과 일하다가 그분이 사임하시면서 나중에 신우인 목사님이 미국에서 오시게 되었고 행정 책임을 맡으셨습니다. 행정실에는 신우인 목사님, 저와 최미정집사님이 함께 일했는데, 최미정집사님은 주로 목사님의 설교 원고를 타이핑하는 일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목사님은 저에게 중요한 업무를 하나 맡기셨습니다. 사무실도 2층에 별실을 만들어 주시고 그곳에서 목사님의 설교 원고를 책으로 만들 수 있도록 정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은 저에게 좋은 기회라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의 설교 원고를 정리하면서 목사님의 설교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저를 사랑했고 신뢰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중요한 일들을 저에게 맡겨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1996년도에 목사님은 저에게 목사님 방 옆으로 와서 비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업무는 목사님의 스케줄을 관리하고 목사님의 방송설교를 편집하며 목사님의 설교에 들어갈 예화를 찾아주고 목사님이 집회가실 때라든지 강연이 있으면 수행하는 일었습니다.

그때 목회자들이 말하기를 목사님 옆에 있으면 죽는다. 멀리 떨어져 있어야 산다는 말이었습니다. 목사님에게 맞추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정을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았고 비서일은 더구나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님의 총애를 받는다는 기쁨이 있었고 어려울 때 목사님을 통하여 은혜를 받았었기에 은혜를 갚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당시 신학생들과 점심식사를 즐겨 하시면서 별세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식사할 때는 밥공기에 반찬의 양념을 묻히지 말라고 하시고, 깨끗하게 남기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식사하시면 저는 꼭 신발정리를 했습니다. 옷을 벗으면 걸어드리고 식사를 다하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옷을 입혀드리고 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일들을 하면서 한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목사님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목사님을 배워야 한다는 말은 목사님이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저를 따로 불러서 한신교회에서는 사역하는 곳이 아니다. 목회하는 곳도 아니다. 나를 배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의 인격을 배우고, 목사님의 별세를 배우고, 목사님의 목회를 배워야 한다는 말씀이셨는데, 저는 목사님이 저를 사랑하셔서 한 수 가르쳐 주시는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늘 옆에서 목사님을 배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강석 목사님이 부교역자는 ‘도제’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에 저도 공감을 합니다. 저도 마치 도제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스승을 만나 그 밑에 들어가서 도를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면 스승은 밥을 지어라고 하고, 물통에 물을 채워놓으라고 하고. 빨래를 하라고 하고 마당을 쓸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일을 제자는 하는 것입니다. 몇 년이고 그 일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는 스승을 배우는 것입니다. 말로 글로 배우는 것도 있지만 함께 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제가 한신교회를 사임할 때 이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중표 목사님을 존경했고 목회를 배우려고 했고 옆에서 모시면서 배웠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의 비서를 하면서 중요하게 여긴 것이 함께 운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로 고수부지를 속보로 걷는 시간이 많았고 어떤 때는 등산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개척하기 전에 기도하셨다는 기도바위에 올라가서 저에게 안수기도를 해주시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어쩌다가 목사님을 만나면 저는 늘 건강에 대한 안부를 묻습니다. 그만큼 저의 역할이 목사님의 건강을 지켜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힘든 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위장에 구멍이 생겨 혈변을 몇 일 동안 보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때 병원에 가니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일로 빈혈이 생겼었는데, 등산하면서 목사님은 젊은 사람이 나를 못 따라 온다고 핀잔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제가 한신교회를 사임하려고 결심을 하자 많은 눈물이 났습니다. 근 6년 동안을 은혜 받던 교회이기도 하였고 목사님께 많은 사랑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님의 급하신 성격, 별세를 이루려는 눈물겨운 노력과 의지... 어떤 때는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호랑이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다 주시는 큰 나무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섬세하고 치밀하기도 하시고...

한 번은 목사님이 저에게 저는 나를 어떻게 보느냐고 물으실 때 뭐라고 적당한 답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신비롭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했더니 웃으시면서 아부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에도 목사님이 대구에 내려오시면 집회에 참석하여 인사를 드렸는데 숙소에서 저에게 조 목사는 착하고 사람이 참 괜찮다고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이제 존경하는 목사님, 사랑하는 목사님을 다시 뵐 수 없으니 아쉽기만 합니다. 평소에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한신교회를 사임하고 나서는  멀다는 핑계로 한신목회개발원에도 한번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좀 더 잘 모실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아쉬운 마음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많이 듭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천국에서 그렇게 좋아하시던 주님과 영생복락하소서! 저는 아직 별세는 못했지만 별세하도록 노력하는 종이 되겠습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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