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평화공동체-상단메뉴.gif

평화통일아카데미.gif

제5강 이기호 교수(한신대 교수, 평화와공공성센터장) 강좌 원고

관리자 2014-05-08 (목) 14:21 9년전 4203  
  이기호.pdf (842.1K), Down : 37, 2014-05-08 14:21:08
 
 
동아시아 평화공간 구상과 시민사회의 대응
이 기 호 (교수, 한신대학교)
1. 서론
2006년 10월9일 북한의 핵실험은 동아시아 평화에 새로운 도전을 안겨주었다. 평양의 조선중앙통신은 이틀 뒤인 10월11일‘비록 우리는 미국 때문에 핵시험을 하였지만 대화와 협상을 통한 조선반도의 비핵화실현에는 여전히 변함없다’는 외무성 담화를 발표하였다. 북은 핵보유가 핵억지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제를 보장받기 위한 자구책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동아시아는 핵 위기에 놓인 것이 사실이며 이 지역의 긴장고조와 대북제재를 위한 동맹체제의 강화를 불러일으켰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및 핵 확산에 대한 안전보장구상인 PSI(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에 한국정부가 참여할 것을 더욱 강하게 요구하였다. 2006년 말 한국정부는 PSI참가를 유보하였지만 한미동맹강화와 미국의 일방주의가 관철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북핵실험과 주변국의 대응은 ‘동아시아공동체’의 가능성과 방향 그리고 극복해야 할 어려움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북한 문제’는 남북간 문제이면서 동시에 북미간 문제이고 동아시아가 끌어안고 가야 할 지역문제이기도 하다. 북핵문제는 군사외교안보 분야의 문제로 부각되고 북한과 미국이 당사자인 것처럼 진행되고 있지만 북핵문제의 핵심에는 북한이 국제사회 특히 동아시아지역의 정상적인 구성원으로 자리매김 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 위기감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 문제를 다룰 때 ‘북한문제’는 비껴갈 수 없는, 오히려 동아시아 구상을 현실화하는 핵심적 고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북한문제’는 911사건 이후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명분을 부여하는 미국식 세계질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북한에게는 북핵문제가 이미 외교적 용도 곧 협상의 카드로 사용되고 있고 미국에게는 동아시아 안보질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입의 가드로 사용되고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에 관한 구상 및 구축과정에 ‘북한문제’와 ‘미국’을 동아시아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배제될 수 없는 현실적 과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본 글은 미국문제와 북한 문제를 다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 다만 이미 우리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북한문제’와 ‘미국문제’가 외면할 수 없는 현실문제로서 동아시아의 공동체 구축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이를 전제로 논의해가고자 할 따름이다. 오히려 북한과 미국이라는 국가의 차원이 동아시아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가를 염두에 둘 것이지만 동아시아공동체를 시민사회의 차원에서 모색해보는 것이 본래의 취지이다.
곧 본 글의 목적은 한중일 3국을 중심으로 한 시민단체들간의 교류와 협력을 ‘평화’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분석 평가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3국의 시민단체들이 연대하여 만들어가는 동아시아시민사회를 평화공간구상(PSI :Peace Space Initiative, 이하 PSI)이라는 개념으로 재구성해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인프라(infrastructure)와 패러다임(paradigm)을 제안해보는 것이다.
동아시아 PSI 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갈등의 요인들을 화해의 차원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기본적인 역할로 인식하고 나아가 동아시아시민사회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으로서 그 역할을 확장해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아시아시민사회가 평화라고 하는 뚜렷한 지향점과 영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 동아시아 PSI 인 것이다. 동시에 화해와 협력의 차원에서 비핵화하라고 하는 구체적인 평화의 틀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만으로는 변화할 수 없다. 본 글에서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국가와 협력하는 방식이 아니라 국가의 성격 자체를 시민사회의 패러다임에서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동아시아시민사회가 비핵화하라는 군사안보영역에 까지 ‘평화’를 심기 위해서는 기존의 시민사회 대 국가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국가의 성격자체를 변화시킴으로써 새로운 동아시아시민사회를 창조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글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첫째, 북핵문제가 보여주었듯이, 동아시아지역에서 냉전구조는 해체된 것이 아니라 911테러이후 21세기 버전으로 재구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21세기형 냉전구조의 원리는 두 가지 구성요소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하나는 ‘적’을 규정해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군사력에 바탕을 둔 ‘동맹외교’를 통해 적과 대립하는 구도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불량국가’, ‘악의 축’ ‘폭정의 전초기지’등은 적이 사라진 20세기 냉전체제의 해체이후, 부시정권이 명명한 이른바 ‘민주주의’가 맞서 싸울 적으로 불러낸(호명된) 적이다. 따라서 동아시아 시민사회를 구축해갈 때, 21세기 냉전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을 담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동아시아공동체를 구축한다고 할 때, 국가와 시민사회의 불균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민주화’라는 운동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며 80년대 이후 민주화는 뚜렷한 대세로 자리 잡았다. 문제는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시민사회의 성장과 역동성은 어디에서 그 에너지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있다. 본 글에서는 평화를 지향하는 동아시아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실체로서 ‘동아시아시민사회’를 주요한 개념으로 다루고자 한다. 곧 일국 차원의 시민사회가 아니라 경계를 가로지르며 이루어지는 다양한 시민사회현장간의 교류와 협력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삶의 영역이다.
셋째,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제기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을 끝으로 동아시아국가들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한 근대국가를 구축하는 일에 경쟁적으로 매진해왔다. 경제성장과 군사안보를 골간으로 하는 근대국가는 민족주의를 주요한 동력으로 삼아 국가주의를 심화시켜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아시아 근대국가는 내부적으로는 시민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요구되고 있는 민주화와 외부로부터는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시장개방의 요구에 의해 총체적인 변화를 요구 받고 있다. 근대국가가 지향한 부국강병이라는 강한국가로부터 시민사회와의 협력과 다자간 협력에 의한 지역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국가 곧 유연한 국가(soft state)로의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제는 민주화라고 하는 시민사회의 동력이 국가와 시민사회를 어떻게 변화 혹은 성장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넷째, 동아시아공동체의 구성은 ‘북핵문제’가 상징적으로 보여준 군사안보 패러다임의 한계, 21세기형 냉전체제, 미국의 일방주의, 아시아에서 평화의 가능성 등과 깊이 관계된 21세기형 국제질서의 지형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민사회 패러다임이란 적이 필요 없는 민주화의 심화과정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는 화해의 차원을 넘어서 비핵화로 이어지는 곧 안보의 차원을 국가안보에서 인간안보로 진전시키는 문제이기도 하다.
다섯째, 동아시아 시민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주요한 과제와 전략은 과거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하지만 미래에 대한 공동의 기억을 자산으로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화해를 필요로 하는 많은 갈등 문제들이 과거로부터 달려오고 있지만 이를 해결하기에는 화해와 협력의 경험이 지극히 적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동아시아시민사회는 상상을 통해서 재현되고 실천되는 영역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상상력과 실천은 국가로부터 나오기보다는 시민사회의 교류와 협력 그리고 실천의 경험에서 나오는 시민들의 지혜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시민사회가 이러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줄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아닐 뿐더러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 자체가 수많은 난관을 내재하고 있음 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평화를 근본적으로 저해하고 있는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국가’의 존재양식(在り方)을 변화시키는 방식은 동아시아 공동체의 구상과 더불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문제의식이다.
2. 동아시아평화공간구상 (PSI: Peace Space Initiative)과 한중일 시민사회비교
동아시아 시민사회를 구축하는 가운데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한 평화’논의가 중요한 이유는 동아시아 평화가 아직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지난 반세기 동안 냉전체제 안에서 동면하고 있던 갈등요인들이 냉전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수면위로 부상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북핵문제를 필두로 종군위안부에 대한 인정 및 사과와 보상 문제, 일본정치인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논란, 북한의 납치문제, 중국과 대만의 양안갈등, 동북공정 및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역사해석의 문제, 독도 및 북방영토 등 국가 간 영토갈등, 미군기지 문제 등 국가를 넘어서는 동아시아 지역의 갈등 이슈들로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지역의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이 지역의 교류와 협력이 활성화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고 또한 각 국의 시민사회가 국가에 의해 압도당하지 않을 만큼 성장하는 것과 비례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각 국의 시민사회는 경제성장의 정도가 다르고 민주화의 정도에 따른 시민사회의 성장과 정치적 경험이 다를 뿐만 아니라 국가를 넘어서는 교류와 협력의 경험이 매우 짧다. 반면에 동아시아 지역은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의 전통이 강하여 앞서 언급한 이 지역의 갈등 이슈들을 시민사회가 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해결해가기 보다는 국가에게 위임하는 방식에 더 익숙해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각 국의 시민사회가 국내적으로도 성장해 있거나 적어도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국가 간 시민사회의 불균형과 이로 인한 협력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수도 있고 특별한 계기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 특히 국가를 넘어서는 시민사회간의 교류와 협력이 평화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 상호간의 대면(face to face) 접촉과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성장해가는 살아있는 역사적 공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동아시아 평화공간구상(PSI)’은 앞서 언급한 이 지역의 갈등이슈와 갈등 요인들을 시민사회 차원에서 다루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대량살상무기 및 핵 확산에 대한 안전보장구상(PSI)’처럼 정부 간 합의에 의해서 일거에 발효되는 협의체나 국제기구라는 명시적인 틀로 구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PSI 는 국경을 넘어서는 다양한 협력과 실천의 경험들을 통하여 축적되는 신뢰와 지혜를 바탕으로 조금씩 시행착오를 동반하면서 성장해가는 우정과 연대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동아시아PSI’ 를 어떻게 현실에서 운동의 에너지로 만들어내고 실천해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더욱이 아시아 시민사회는 지난 100년의 상처를 아우르고 닫혔던 국경과 사람들 마음의 문을 열어젖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더욱 그 출발점이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PSI’는 아직 성장하지 않은 시민사회 혹은 운동의 에너지를 소진한 시민사회 등 일국적 차원에 갇혀있는 시민사회에 대해 새로운 과제와 운동의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재활성화 혹은 재정치화를 가능케 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본다. 특히 얼굴이 보이는 시민사회간 교류와 협력, 그리고 실감할 수 있는 이웃, 체험할 수 있는 협력 손에 잡히는 변화 등은 ‘동아시아PSI’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 비록 작은 변화일지라도 시민들 스스로가 보람을 느끼고 감동할 수 있는 체감의 영역으로서 동아시아PSI는 시민들이 변화의 주체이고 동아시아인이라는 새로운 아이덴터티를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가권력이 독점해왔던 안보담론이 아니라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평화담론이 현실성을 획득해간다는 점에서 동아시아PSI는 시민사회의 재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공간구상(PSI)이란 일거에 만들어지는 회의체나 기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차이와 장애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그리고 구체적인 일감을 매개로 실천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모색해볼 수 있다. 다양한 주체들이 양자 간 혹은 다자간에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지고 공동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형성되어가는 다층적 네트워크로 구성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를 시각적으로 구성한 것이 다음의 그림1이다.
<formulas></formulas>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시민단체들간의 특정한 사안에 따라서 이루어진 교류와 협력의 공간 A를 ‘동아시아PSI’라고 한다면, 이 공간이 점차 확장되어 각 국의 시민사회간에 형성된 활성화된 시민사회공간 B를 동아시아시민사회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정부와 기타 영역이 포함된 전체공간 C를 동아시아공동체로 나타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동심원의 한 가운데 있는 ‘동아시아PSI’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곧 ‘평화’라는 지향점이 현실적으로 이니셔티브를 가질 때 비로소 동아시아시민사회 및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점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위의 그림에서는 한중일간의 시민사회조직(CSOs: Civil Society Organizations)의 크기가 비슷한 영역으로 그려졌지만 실제로 시민사회의 성장방식과 정도 그리고 시민사회의 역할과 영향력은 각 국 별로 상이하다. ‘동아시아PSI’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전제로 각 국의 시민사회의 특성을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비교해보면 시민단체의 구성원과 그 역할은 각기 다름을 알 수 있다.
먼저 한국의 경우는 시민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주요한 활동가들의 배경이 대학과 종교집단에서 사회운동의 경험을 가진 이들로 충원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386세대로 불리우면서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노동자, 농민, 빈민, 교사, 대학생들의 조직운동을 기반으로 한 사회변혁운동으로 진행되었고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은 통일운동으로 확대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20년이 흐른 지금은 20대의 학생운동출신가들이 40대가 되어 정계와 문화예술계 등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다이나믹한 정치변동을 주도했던 한국의 사회운동은 2000년 4월 낙선운동을 기점으로 그 영향력이 크게 감소하면서 시민운동의 지속성과 운동의 에너지를 상실해가는 위기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민주화이후 정당정치가 점차로 자리를 잡으면서 준정당의 역할을 담당했던 시민단체의 자리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고 둘째, 여러 차례의 선거와 정권교체를 통하여 정부주도의 개혁과 남북교류협력이 강화되었고 셋째, 한국의 시민단체는 그 영향력이 컸던 만큼 활동가들이 풀타임직업으로서 시민운동을 전개해왔으나 제도권 영역이 활성화되면서 주요한 시민운동의 리더쉽이 정부와 의회 혹은 대학과 사업 등의 영역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넷째, 민주화이후 민주주의의 과제와 남북관계의 변화에 따른 운동의 방향과 비전을 생산하는 능력이 내부적으로 빈곤해지는 데서 발생한 지향점의 불확실성이 이 새로운 위기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과 달리 직업 활동가보다는 볼란티어가 중심이 된 시민운동이 많았고 국가를 대상으로 한 변혁운동보다는 주민들이 지역에서 관심영역별로 활동하는 NPO활동 국제연대를 통한 NGO활동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시민운동이 국가에 대한 변화를 기대하지 않고 ‘시민활동’으로 국한되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시민운동이 국가로부터 멀어지는 결정적인 계기는 1960년대 시작된 안보투쟁의 실패와 좌절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게다가 자민당 중심의 거대여당에 의한 국가권력의 독점은 일반인들이 국가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일찌감치 제거하는 효과를 만들었다. 동시에 비록 상징적인 체제이기는 하나 천황제의 존재 역시, 국가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어렵게 하는 심리적 요인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결과 일본사회에서는 ‘진보’, ‘평화운동’등이 어느새 사어(死語)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최근 일본의 시민운동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경향성은 ‘워커즈 코렉티브’및 시민입법운동 등에서 보여지듯이 지역 활동을 통해 일본사회에서 새로운 공공재를 구성하려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노력들이 새로운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생협운동을 매개로 성장한 지역정당(local party)활동과 레인보우앤그린즈(虹と緑)등의 움직임은 중앙을 상대로 하는 정치활동이 아니라 지역에서 정치적 참호를 구축하는 것이며 동시에 변방에서 중앙을 포위해가는 장기적인 시도라고 이해될 수도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정치활동에 관심을 가지는 시민활동가들은 한국의 386세대와 같이 60년대 안보투쟁의 시기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시민운동은 정치의 벽 혹은 국가의 벽을 넘어서고 있지 못하다. 동시에 한국의 시민운동과 마찬가지로 일본시민운동 역시 점차 운동의 에너지를 찾기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격차사회가 심화되고 인구의 유동성이 높아지면서 지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시민’이 크게 줄고 있거나 고령화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협력보다는 경쟁을 주요한 가치로 삼는 신자유주의가 가속화시킨 노동시장의 유연성 곧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사회적 불안감 또한 많은 이들의 참여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보다 적극적인 참여의 동기와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들이 점차로 와해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일본시민운동이 60년대 운동의 좌절로 단절되고 운동의 에너지가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혁신자치체 운동의 경험이 지역사회운동이 활성화되는 배경을 이루고 있다. 게다가 1995년 고오베대지진 이후 주목받은 NPO활약과 볼런티어활동의 활성화 그리고 98년의 NPO법과 2000년개호보험제도의 개선 등으로 시민활동은 제도적 지원을 받게 되었고 2003년 미국의 이라크파병이후 평화문제에 대한 관심의 환기가 이루어지는 등 운동의 에너지가 충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꾸준히 존재해왔다. 그러나 일본의 시민운동은 운동단체들간에 역동적인 협력이나 횡적인 연대를 이루어내는 것이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 시민운동이 각론에는 강하지만 총론에는 취약한 성격을 드러내며 사회 변혁적 전망을 구상하는 일에 주저하는 경향을 보인다.
중국의 시민사회를 논할 때, 꽤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 자율적이고 때로는 국가권력과 대립할 수 있는 사회운동이 존재하는가라는 반문을 하곤 한다. 1989년의 천안문 사건이 상징적으로 보여준 중국정부의 시민사회에 대한 통제가 강력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감지하는 천안문사건은 이미 끝난 과거완료가 아니라 현재진행 되고 있는 민주화의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천안문사건의 경험을 계기로 중국본토 혹은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에 관계하는 사람들과 그룹들이 꾸준히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시민사회 특징은 공식 통계가 없기 때문에 사실 확인을 하기는 어려우나 중국시민활동가들을 인터뷰해본 경험에 의하면 국제사회의 변화 및 시사정보에 쉽게 노출될 수 있거나 법체계 혹은 중국의 정치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는 지식인들 이 그 중심 리더쉽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한국사회에서처럼 대학교수 등 학자출신이 참여하는 경우보다는 언론인, 변호사, 중고등학교 교사 등 삶의 현장과 쉽게 접촉하면서 지내는 지식인들이 전업(轉業) 혹은 볼란티어 등의 형태로 참여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중국의 청화대학교 NGC센터에서 집계한 공식•비공식 NGO는 200만개나 되는 NGO가 중국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이른 바 관변단체에 속하는 GONGO(Government organized NGO)가 다수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사회가 빠른 속도로 개방이 되고 있고 젊은 세대의 유학 경험이 늘어가면서 중국의 시민사회 역시 점차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시민운동은 한국처럼 국가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한 사회운동이 활성화되어 있다거나 일본처럼 지역의 공공재 창출과 관련된 NPO활동이나 국제협력에 중심을 둔 NGO활동이 활성화 되어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면에 중국의 시민운동은 인간안보와 관련된 운동이 다수를 점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환경운동, 에이즈방지운동, 국내이주노동자들의 인권운동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시민운동은 중국정부 및 지방정부와의 관계 속에서 적당한 파트너쉽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갈등관계에 놓이기도 하며 그럴 경우 시민운동은 국제연대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환경단체들의 경우 평시에는 정부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환경단체의 활동은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도 개발과 환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기 때문에 환경을 일정한 수준에서 규제하고 감독해야 할 정부의 필요성과 맞아 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남성의 노강(怒江)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댐건설을 반대하고 지역주민들이 연대하도록 돕거나 외국의 단체를 개입시키는 환경단체의 활동에 대하여 지방정부는 이를 견제하거나 규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의 과정을 통하여 지역의 움직임도 조금씩 변화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환경문제가 지역공동체의 생존권, 생활권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점차로 인식하면서 생기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한중일 시민사회의 특성비교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민주화의 정도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화의 동력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를 성찰하고 사회문제에 자기 자신을 던져 넣으며 성찰할 수 있는 시민, 행동하는 시민을 육성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변화의 전망을 얼마나 설득력 있는 담론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민주화이후 민주주의’는 대부분의 과제를 국가에 위임해버림으로써 시민사회가 탈정치화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못지않게 콘텐츠와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심화시킬 것인가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민주화과정에서는 종종 국가가 민주화의 대상이 되지만 민주화이후 국가는 개혁의 대상이기 보다는 개혁의 주체로 변환되는 경향이 있다. 곧 민주주의의 위험성은 국가자체의 성격을 변화시키지 않은 채 국가에게 개혁을 위임하는(お任せる)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3.화해에서 비핵지대형성으로: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대응
동아시아 지역에서 시민 단체 간 교류가 정부 및 기업보다 훨씬 뒤늦게 시작된 것은 이 지역을 관통하고 있는 냉전구조와 국가주의 그리고 민족주의가 시민들의 교류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깝게 지냈다고 하는 한일간의 교류 역시 1998년이 되어서야 대중문화개방이 이루어졌으니 이는 남한사람들이 북한에 금강산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시기와 같은 해이다. 대체로 한중일간에 시민 단체 간 교류와 활성화된 것도 이즈음에 이르러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냉전구조와 국가주의, 민족주의의 장벽 등이 다소 낮아진 측면도 있으나 분명한 사실은 민주화 혹은 시민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생긴 시민사회의 활력이 에너지로 등장하고 있음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 이르러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다양한 협력의 틀이 활동가뿐만 아니라 예술가, 지식인, 정치인들 사이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단 대면접촉을 통한 교류가 증가하면 그만큼 협력의 기회가 늘어나고 서로에 대한 지식과 이해도 늘어나게 마련이어서 궁극적으로 평화정착의 길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PSI가 순탄하게 구축되기는 쉽지 않다. 역사문제에서 비롯된 갈등의 요인들에 대하여 서로 화해하는 일에서부터 실질적인 평화를 이루어내기 위해 비핵화 지대를 구성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잠재하고 있는 민족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변형된 냉전체제를 극복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론에서 언급한 ‘북한문제’와 ‘미국문제’ 역시 비핵화와 관련하여 동아시아PSI와 시민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논의가 필요한 영역이다.
이런 까닭에 이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평화담론과 평화공간구상은 현재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역사문제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핵화 및 무장 갈등 예방과 관련된 평화운동이다. 전자의 경우는 크게 보아 ‘아시아연대회의’, ‘역사인식과 동아시아평화포럼’을 들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GPPAC(Global Partnership for Preventing Armed Conflict)을 들 수 있다.
역사문제를 돌이켜보면 일본군의 위안부 문제로 촉발되었는데 그 뒤 이 운동은 역사교과서를 바로잡는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종군위안부활동을 했던 할머니들이 용기를 내어 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시 민주화운동을 통해 이루어진 과거사청산이라고 하는 역사바로잡기 운동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는 점과 이를 평화운동과 연결시켜 지속적인 평화운동으로 발전시킨 점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1987년 한국 민주화가 진행되던 다음해1988년 한국 교회여성연합회 주최로 열린 국제관광기생세미나에서 윤정옥교수 위안부 문제가 처음으로 제기되었고 그 후 1990년 11월 16일, 37개여성단체와 개인들이 모여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the Korean Council for the Women Drafted for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를 구성하였다. 이 단체는 1992년 아시아연대회의(Asian Solidarity Conference for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를 결성하여 ‘위안부’와 관련한 진상규명 및 법적 보상을 요구해왔다. 아시아연대회의에는 한중일 뿐만 아니라 대만, 홍콩, 필리핀 등 종군위안부와 관련되었던 국가의 피해자와 여성단체들이 결합하였다.
아시아연대회의는 2000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NGO들이 연대하여 최초로 일본군에 의한 성노예 전쟁범죄를 재판하는 국제시민법정(International Tribunal on War Crimes on Sexual Slavery by the Japanese Military)을 야스쿠니 신사 바로 옆에 있는 구단회관(九段에서 개최하였다. 본 대회를 통하여 일본정부가 사과하거나 보상을 하는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본 대회는 아시아 역사문제를 아시아시민들(특히 여성들)이 공동으로 성찰하고 아시아 최초의 국제시민법정을 열어 국가중심의 국제기구가 아닌 시민들에 의한 도덕적 판결을 내렸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남한과 북한이 함께 참여한 이 대회는 그 뒤 역사문제와 관련한 다양한 운동을 전개하는 밑거름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대회가 끝난 다음해 2001년, 일본에서는 후소샤라는 출판사가 만든 ‘새로운 역사교과서’과 문부성 검정에 통과되자 한국에서는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이 벌어졌고 그 뒤 이 운동은 일본과 중국에서도 함께 하여 국제연대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노력은 단순한 규탄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협력의 틀로 발전되어 2001년 한국에서는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가 결성되었다.
이 연대는 한국, 일본, 중국의 시민사회가 2002년 3월 ‘한중일 공동 역사부교재’ 개발 사업을 시작한 뒤, 약 4년 동안 한중일 3국을 오가면서 11번에 걸친 국제회의와 40여회에 걸친 국내회의를 비롯한 수많은 논쟁과 토론을 진행했다. 그 결과 2005년 5월 『미래를 여는 역사 – 한중일이 함께 만든 동북아 3국의 근현대사』를 발간하였다. 비록 이 교과서가 2차 세계대전 이후를 상세하게 다룰 만큼 역사인식을 완전히 공유한 것은 아니지만 아시아에서 첨예하게 부딪히고 있는 역사적 이슈를 3국이 모여서 합의를 하고 향후 지속적인 노력을 할 수 있는 협력의 틀을 만들었다는 점과 대중적인 역사교과서를 각 국의 언어로 출판할 수 있었다는 점은 소중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한중일이 최초로 역사문제를 공유한 동아시아 공동의 역사교재라는 점과 그 내용에서 평화와 인권이라는 분명한 지향점을 가지고 집필했으며 미래지향적 역사인식을 공유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뿐만 아니라 한중일 공동의 이 작업은 지식인들만이 참여한 것이 아니라 역사문제와 관련된 활동가들이 동참하였고 후소샤교과서 불채택운동이라는 지역운동과 연결됨으로써 국가 간 협력을 넘어서 local to local의 협력으로 이어지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무력갈등예방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쉽(Global Partnership for the Prevention of Armed Conflict)은 2003년 이라크 전쟁이후 국제연합의 코피아난 사무총장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전 세계 15개 지역에서 동시에 진행된 GPPAC프로세스는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동북아와 동남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GPPAC프로세스는 ‘대응에서 예방으로(From Reaction to Prevention)’를 구호로 내세웠으며 분쟁예방과 관련하여 국가이외에 지역과 국제기구 및 NGO를 주요한 행위자로 부각시키고 이들 간의 파트너쉽을 구성하려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동북아GPPAC에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6자회담의 당사국들에서 미국이 빠지고 대신에 몽고와 대만이 참여해왔다. 동북아GPPAC은 국가를 넘어서는 협력의 주체로 국가대표로 평화단체의 참여를 유도하기 보다는 도시를 대표하는 형식으로 각 국의 포칼 포인트를 구성하였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나고야, 교토, 동경이 참여하였고 중국에서는 상해와 북경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국가 간 구성보다는 국가를 넘어서는 지역(region)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 로칼(local)을 선택함으로써 로칼간 협력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러시아의 대표가 모스코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블라디보스톡에서 참여하는 것이 훨씬 더 다양한 협력의 틀을 시민사회차원에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동북아GPPAC은 국제연합에서의 보고를 앞두고 2004년과 2005년에 두 차례의 지역협의회를 개최하여 지역의 아젠다를 정한 바 있다. 당시 논의되었던 주요 아젠다는 ① 한반도 평화구축을 위한 방안 (북. 미간의 갈등) ② 영토 갈등 (중. 일. 대만: 센카쿠/다오위 섬 문제와 러.일: 북방 4개 섬) ③ 이라크 파병 문제 (한. 일), ④ 일본 헌법 9조 개정 문제, ⑤ 중국과 대만간의 갈등, ⑥ 동북아 지역 국가 간의 역사관 문제 (교과서 왜곡), ⑦ 지역 경제와 인간안보의 개념 확대, ⑧ 평화문화 형성을 위한 평화교육 등으로 결정되었다.
이와 함께 종합적으로 제기된 문제들로는 첫째,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지역에 계속적으로 존재하는 냉전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시민사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둘째, 일본의 新 군사주의에 대한 평화세력의 지역적 대응은 무엇인가? 셋째, 폭력의 문화를 평화의 문화로 전환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들이 수반되어야 하는가? 등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하여 각기 의제 설명을 나누었다.
GPPAC프로세스를 ‘동북아PSI’ 로 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협력의 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민주화의 정도와 시민단체의 활성화 및 시민사회의 성장의 차이에서 오는 여러 어려움들은 고스란히 극복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첫째는 평화에 관련하여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고 둘째는 시민단체가 정부로부터 독립적이 자율적인 활동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셋째는 시민 단체 간 협력이 가능할 만큼의 자원을 확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끝으로 위에서 언급한 역사문제에서처럼 ‘국제시민법정’ 혹은 ‘미래를 여는 역사교과서’ 등과 같이 공동으로 할 수 있는 구체적 협력의 과제를 만들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지난 4년간의 경험에서 발견될 수 있다. 예컨대 2005년 2월 동경에서 열린 동북아지역협의회에서 양안문제가 제기되자 중국 측 참가자들은 대만과의 문제는 국내문제이므로 GPPAC의 의제가 될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여러 차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로서 북한의 참여를 끌어내는 것에는 실패하였다. 2006년 3월의 GPPAC회의를 북한의 금강산에서 개최했음에도 불구하고 북측은 참가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동북아 GPPAC프로세스는 피스보트의 리더쉽과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은 바 크지만 일본국내는 물론 다른 국가의 참가단체들이 그러한 피스보트의 인적자원과 재정능력 그리고 국제연대의 경험 등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데서 발생하는 불균형한 결합 역시 GPPAC활동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PPAC의 활동은 첫째, 시민사회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포괄적이며 다자간 협력의 틀로 시작되었다는 점, 둘째 동아사이 지역에 온존하고 있는 냉전구조에 주목하고 있으며 북한 문제를 주요한 아젠다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 셋째, 로칼과 리죤을 국가를 넘어서는 구체적인 공간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국제연합과 같은 국제기구와 NGO들간의 파트너쉽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협력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GPPAC에 참여하고 있는 단체들이 자국에서는 아직 소수라는 점과 평화운동이 국가중심의 외교안보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동북아지역에서 평화운동 혹은 동아시아PSI 는 이제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역사문제와 평화문제 이외에도 동아시아PSI 와 관련된 가능성 있는 시민사회의 협력의 틀은 여러 형태로 활성화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환경과 관련된 이슈인데 GPPAC동북아회의가 처음 열렸던 2005년 2월의 동경회의가 열린 다음 주에 교토에서는 APGN(Asia Pacific Green Network)이라는 회의가 평화와 정치참여 그리고 에코로지 주제로 하여 열린 바 있다. APGN은 초록정당 혹은 초록정치를 지향하는 운동단체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아시아지역에서 다자간 협력을 초록이라는 상징적 색깔로 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시아 태평양으로 범위가 넓어 다양한 국가들이 모여 행동의 구심점을 만들어가기에는 어려움을 많이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4. 동아시아평화공간창출과 시민사회 구상
‘동아시아 PSI’는 역사이해를 통한 화해에서 비핵화를 통한 평화정착에 이르는 시민단체들간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평화공간(Peace Space)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PSI’의 개념은 단순히 평화를 위해 협력하는 단체 간의 협력 네트워크를 지칭하는 靜的인 개념이 아니라 동아시아 시민사회(B)와 공동체(C)에 ‘평화’라는 磁場을 형성할 수 있는 구상(Initiative)이 작동하는 動的인 개념이다.
그런데 ‘동아시아 PSI’ 는 외부로부터 새로운 기회와 도전을 동시에 맞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00년 6.15 남북정상간의 만남과 2002년 9월17일 북일 정상회담 그리고 2003년 8월 6자회담의 개시 및 2006년 9.19공동성명발표 2007년 2.13합의에 이르는 북핵문제가 새로운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반면에 2001년의 9.11테러와 2003년 11월 KEDO프로젝트의 사실상 종료 및 북한의 NPT탈퇴에 의한 제네바합의파기, 2006년 10월9일 북한의 핵실험은 기회와 더불어 평행선을 달리는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난 7년간 기회와 위기를 왕복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핵심은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 문제’를 동아시아가 어떻게 안착시키는가에 의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