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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강 이시우 작가(DMZ사진작가) 강좌 원고

관리자 2014-06-19 (목) 22:55 9년전 4041  
정전협정의 틈, 유라시아로 향한 창
한강하구통일여행
사진가 이시우
 
현재의 비무장지대와 민통선 지역은 공교롭게도 한반도의 허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지역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특징적인 사상과 문명이 발생하고 발전한 곳이다. 한탄강의 ‘미륵사상’이 그렇고, 임진강의 ‘조선성리학’이 그러하며, 한강의 ‘실학’과 ‘개화사상’, 다소 과장되었지만 강화도의 ‘단군사상’이 그렇다. 한편 강화도와 한강하구 임진강은 한반도가 유라시아체계와 교섭하고 충돌하던 관문이기도 했다. 역사상 한반도는 4번의 계기를 겪으며 유라시아체계에 대응했다. 첫번째는 고인돌등으로 대표되는 선사문명 교류를 통해서이고, 두번째는 최초의 유라시아 제국이었던 몽골 침략기이며, 세번째는 병인, 신미양요를 거쳐 동양의 서구인 일본의 식민지가 된 시기이며, 네번째는 한국전쟁시기이다. 분단과 통일의 변증법도 유라시아지정학의 틀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근리 고인돌- 평화, 통일미학
시간과 공간이 사회적 창안이듯, 삶과 죽음도 사회적 창안이다. 그리고 문화란 그것의 공고한 구축이다. 우리의 통일방식이 전례가 없는 것이 될 가능성이 많은 만큼 그 원리를 우리식의 개념과 창안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뿌리 없는 낯선 문화가 낡은 문화를 흔들어 놓을 때 문화는 진보적이지만, 그것이 수면 위의 파동으로 그치고 말 때 문화는 다시 보수적이다. 사회의 변화는 문화로부터 시작되어서 정치와 경제의 격변을 거쳐 문화에서 완성된다. 고인돌은 민족문화유산의 거대한 창고에 최초로 등장한 가장 독창적인 재산이다. 통일미학의 목표이자 추동력인 민족미학의 보고에 고인돌을 재평가하여 올려놓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부터 질문을 던져 보는 게 좋다. 왜 나무나 흙이 아니고 큰돌인가? 삼국지 위지 공손도전 에는 '요동 양평 연리사에 큰 돌이 불쑥 솟았는데, 길이는 한길을 넘으며 아래에는 작은 돌 세 개가 다리로 되어 있다.'고 하고 이것은 그가 왕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상서로운 징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고인돌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1세기까지도 고인돌은 정치권력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그 정체를 땅에서 솟은 것으로 보아 신비화하고 있다. 그것은 고인돌이 땅속의 돌널무덤에서 땅위로 올라오게 된 과정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작은 돌을 모아 쌓은 돌무지 무덤문화와 큰돌을 이용한 고인돌문화 사이에는 새로운 능력을 가진 사회적 단계가 필요하다. 돌도끼는 발견한 결에 대해 인간이 직접적으로 작용해야 하지만 큰돌은 결에 대한 인식과 그 결을 이용할 수 있는 다른 결을 조합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큰돌을 얻을 수 있었으며, 돌을 얻는 과정만을 보면 직접 돌을 깨는 것보다 덜 위험하고 덜 힘이 들게 되었다. 이 부근리고인돌은 북방식으로 분류되는데 북방식과 남방식의 형식적 차이는 고임돌을 쓰느냐, 바둑판처럼 작은 돌을 네 귀퉁이에 받치느냐로 구분되지만 사실 더 본질적인 차이는 시신을 땅에 묻는가 땅위에 놓는 가이다. 땅에 묻고 안 묻고는 다시한번 결정적인 문화의 차이를 나타내는데 매장문화는 농경문화이고, 비매장문화는 기마문화이기 때문이다. 농경문화는 이전에 없던 공간개념을 만들어 냈다. 땅을 죽은자의 사후 세상으로 본 것이다. 이 공간 개념은 더 발전하여 죽은자가 거처할 최소한의 공간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돌널을 사방으로 막고 덮개돌을 덮는 방식이다. 물질적 신체가 없어진 죽은 자가 이 공간에 머물며 살아있는 자들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부근리고인돌의 측면에 서서 보면 뒤쪽은 덮개돌과 고임돌의 끝이 일치하는데 앞쪽은 고임돌에 비해 덮개돌이 튀어 나와 있다. 즉 덮개돌 아래에 여유공간이 형성된 것이다. 이 공간은 무엇일까? 북에서 발견된 고인돌과 비교해볼 때 이 공간은 문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죽은자를 산자와 같이 거처하게 할 뿐 아니라 산자가 그와 만나기 위한 통로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무덤안에 산자와 죽은자 간의 소통체계가 완벽하게 만들어지게 되고, 죽은자에 의한 통치가 가능해 진다. 새로운 공간개념의 창안은 결국 과거를 통해서도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으니 시간개념도 같이 창안된 것이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은 정치권력과 사회체제의 창조물이다. 시신에 대한 식인 풍습은 그의 영혼과 지위를 공동체가 나누어 먹음으로서 공유하거나 전이된다는 관념에 기초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물질적 한계에 부닥치고 공동체를 통합시키기 보다 심각한 분열로 몰아갔다. 사회의 존립에 식인 풍습의 유용성이 감소하게 되자 폐기되기에 이르고 시신과 영혼의 개념을 분리하게 되고, 무덤공간의 창조를 통해 시간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무덤의 공간은 사회를 지배하는 구심이 되었고, 여기서 창안된 시간개념은 역사를 지배하는 뿌리가 되었다.
문명은 사람관계의 기록이기 때문에 거꾸로 문명의 책장을 더듬다 보면 그 문명을 대할 때의 사람관계를 발견해 내는 행운을 잡을 때가 있다.
이렇게 해보자. 고인돌 정면에서 한 점에 시선을 고정하고 뒤로 서서히 물러나다 보면 고인돌이 눈에 가득 들어오는 한 지점에 서게 된다.
 
그 지점에서 몸을 서서히 낮추면 고인돌을 우러러보게 되는 또 하나의 위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 위치는 거의 땅에 닿았을 때 발견되는데 고인돌을 실제 대하던 사람들의 자리를 우리는 그렇게 어림잡아 볼 수 있다. 물체를 바라볼 때 가장 알맞은 거리는 물체의 최대높이나 길이의 3배인데 이 거리는 물체의 양끝을 바라보는 화각이 20도가 된다. 관광객의 입장이 아니라 당시 이 무덤 관계자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고인돌을 정확히 감상할 수 있는 지점은 몸을 땅에 대고 우러러 봐야 하는 지점이다. 사진모임 사람들과 함께 가서 사진을 찍어 보시라 하고 나중에 보면 거의가 고인돌의 뒷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에는 이유가 있다. 뒷쪽의 지면이 밭을 만드느라고 사람 키만큼 내려가 있기 때문이다. 즉 시선을 땅에 가까운 지점에서 올려봐야 그 웅장한 자태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개의 고임돌이 60도 정도 기울어져 있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직각으로 고임돌을 세워 놓았을 때 보다 기울어져 있을 때 웅장한 느낌이 더해진다. 고임돌에 기울기를 준 것은 비단 이 고인돌 뿐 아니라, 다른 고인돌에서도 발견되는 양식이다. 기울기.
내가 고인돌에 빠져든 것은 바로 이 기울기 때문이었다. 모델이론이란 것이 있다. 연구하고자 하는 사물의 모델을 실제와 가장 유사하게 만들어가면서 사물의 법칙을 밝혀내는 방법론이다. 가설과 논리의 매마른 정의가 아니라 유비(유사한 것)를 통해 생동한 실제를 재현하는 것이다. 과학과 미학을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나는 이 방법에 호감을 갖는다. 고인돌도 모델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비슷한 돌을 뒤뜰에 날라다 쌓을 때까지도 고인돌 같이 단순한 건축물을 이렇게까지 해 볼 필요가 있나 하는 자문이 있었지만, 고인돌을 쌓아도 쌓아도 쓰러지는 것을 보고서야 나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기울어진 고인돌을 쌓는 것은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우연히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억지로 버팀돌을 대서 고인돌을 세워놓고 어떻게 기울어진 채로 고인돌이 서있는지 내가 아는 모든 과학으로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기울어진 지석이 땅과 직각삼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직각삼각형에 생각이 미치자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연상됐다. 그런데 기원전 1000년경, 고조선시대에 피타고라스정리 같은 것이 있었을까? 우리나라엔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고 중국에는 있었다. 천문학서인 주비산경(周 算經)과 진서(晉書)에 나오는 구고현(句股弦)의 정리가 그것이다. 고란 허벅지를 뜻하는데 무릎을 구부렸을 때 삼각형이 만들어지는 원리에서 추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구는 밑변이고 현은 삼각형의 빗변이다. 구와 고로 현을 구하는 방법(句股求弦之法)이다. 그러나 진서는 당태종때 만들어진 책이니 고조선보다는 시대가 한참 지난다.
(그림1 주비산경에 실린 피타고라스 정리의 증명. 이 현도(弦圖)는 아마 조군경趙君卿(기원후3세기) 注에서 비롯된 것 같다.-김용운,김용국[동양의과학과사상487쪽])
 
이에비해 주비산경은 기원전 1000년경 전국시대 이전인 주나라 때로 올라간다.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기원전 500년경이니 그보다 500년 정도 앞선다고 하겠다. 당시 고조선은 중국과 인접하여 있었고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가 서던 초기의 역사를 기록한 서경에는 훗날 기자조선의 주인공이 된 기자의 고사가 전한다. 기자는 청동기문명의 고대국가인 은나라의 엘리트로 주나라 무왕에 의해 고조선의 제후로 책봉되는데 무왕이 기자를 찾아가 우왕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국가경영의 9가지 근간인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대하여 설명 듣는 대목이 있다. 그중 4번째 항목이 천문역법에 관한 이야기이니 이미 이때 주비산경과 같은 천문역법에 관한 세련된 체계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역사에서 기자조선시기의 설정은 그 같은 문명의 도입과정을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주비산경의 기하학만으로는 기울어진 고인돌을 설명할 수 없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석사이에 채울 흙의 양과 인력의 동원수를 계산해내는 정도이다.
기하학이 아닌 역학의 개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수소문 끝에 건축공학자인 김인성씨의 도움을 받아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기울기가 아니라 기울어지게 하려는 힘이 문제였다. 이를 모멘트라 한다. 예를들면 손으로 막대기의 중간을 잡으면 균형을 잡기가 쉽다. 그런데 막대기의 끝을 잡으면 똑같은 힘을 주었어도 막대기는 한쪽으로 기울어지려 한다. 모든 힘은 모멘트와 함께 존재한다. 그런데 막대기의 중간을 잡았을 때는 모멘트가 0이 되기 때문에 힘만 작용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막대기의 끝을 잡으면 모멘트가 극대화되기 때문에 한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지석의 기울어지려는 힘을 상쇄시켜서 0이 되게 해야만 고인돌은 기울어진 채로 서 있을 수 있게 된다. 지석의 기울어지는 힘을 상쇄시켜주는 것은 상석의 기울기이다. 상석이 기울어져 있어야만 지석의 모멘트를 상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기울어진 고인돌이 서있을 수 있는 조건은 세가지이다.
상석이 무거울수록, 상석이 기울수록, 지석의 낮을수록.
다시 공식에 따라 고인돌을 쌓았다. 성공! 고인돌은 너무나 아름답게 기울어진 채 서있다.
고조선의 기록 어디에도 이런 고도의 역학공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고인돌을 이렇게 세울려면 직관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주비산경의 기하학만으로는 고인돌을 세울 수 없지만 이 고인돌역학에는 주비산경의 구고현의 정리가 응용된다. 즉 기울어진 물체의 힘 작용점은 2/3 지점이다. 이지점으로부터 바닥의 핀까지 빗변의 길이가 되고 기울어진 각도에 따라 핀에서 힘 작용점까지의 거리가 결정된다. 중력에 의해 힘은 직각으로 작용한다. 직각삼각형의 원리이다. 단 직각삼각형의 원리가 기하학이 아니라 역학에 적용된 것이다.
당시 고조선의 과학수준이 최소한 이 부분에서 만큼은 탁월했다는 증거이다.
나는 고인돌을 틈만나면 보고 또 보았다. 그러다가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왜 이렇게까지 힘들게 기울기에 집착했던 것일까? 하다보니 우연히... 아니다. 부근리에는 상석도 없이 서있는 하나의 지석(15번)이 있다. 지석의 높이나 기울어진 각도가 137호 고인돌과 비슷하다. 상석과 지석은 어디에 있을까? 나의 추정으로는 이 지석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실험용이었던 것이다. 고인돌이 오래되어 붕괴된 경우라면 이 정도 규모의 고인돌은 반드시 그 자리나 멀지 않은 곳에서 그 잔해가 발견되어야 한다. 아니면 누군가가 포크레인으로 번쩍 들고 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상석이 없이 지석이 기울어진 채로 서있을 순 없다. 즉 상석을 들어내는 순간 이 지석도 쓰러졌어야 한다. 고인돌은 세 개의 돌로 구성되지만(두개의 막음돌은 역학적 구조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기울어진 채 건축되는 순간 하나의 물체가 되기 때문에 어느 하나만 이상이 생겨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때문에 부근리식 고인돌은 지석을 기울여놓고 그 위에 상석을 올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며 수직으로 세운 지석 위에 상석을 올리고 한쪽을 밀거나 잡아당겨 기울어지게 하는 수 밖에 없다. 즉 따로따로 건축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137호 고인돌의 상석 남쪽모서리 부분에는 4개의 정교한 4각형 홈이 파여져 있다. 이 홈은 성혈과는 다르고 채석흔적으로 보기에도 부적합하다. 남쪽에서 기울이기 위해 무엇인가를 걸어서 잡아당긴 흔적으로 나는 보았다. 이와 더불어 북쪽의 지석 뒤쪽이 깨어져있다. 이는 직각으로 세워져 있다가 상석을 남쪽으로 기울이는 과정에서 힘의 과부하로 깨어진 흔적으로 추정된다.
 
다시 하나의 지석(15번)으로 돌아와 보자. 이 지석이 상석없이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땅의 묻힌 부분에 돌을 쌓아 바쳤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고인돌을 세울 때 썼던 방식이다. 흙이 유실되고 돌이 치워지면 이 돌은 쓰러진다. 그러나 기울기의 역학을 이용하면 땅에 깊이 묻거나 돌을 쌓아 받치지 않아도, 어떤 힘의 보조도 필요 없이 설 수 있게 된다. 인근에 있는 대산리1호나 점골 24호 등 대부분의 고인돌이 쓰러진 이유는 돌과 지반의 유실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기울기 역학대신 돌과 흙 같은 보조적 힘에 의존했다가 그것들이 유실되면서 쓰러졌을 가능성이다. 때문에 하나의 지석(15번)은 사적 137호 고인돌의 축성을 위한 실험용이라는 생각이다.
 
대부분의 관광객이 고인돌 앞에 서있는 시간은 5분도 안되지만 나는 고인돌을 보면 볼수록 낯설었다. 뒤늦게 깨닫게 된 사실은 이 고인돌이 건축과 공간학의 측면에서 봤을 때 어떤 계보하고도 연결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동양의 건축은 물론이고, 서양건축사에 큰 획을 그었던 기둥과 아치, 판테온식 돔형지붕, 고딕성당의 천정등은 그 획기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정형과 조화를 추구하는데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근대소설에서 사회의 부조화를 폭로할 때도 건축만큼은 조화를 추구했다. 그리고 이것은 시대의 음악이자 초상으로서 건축의 고유한 장르특성으로 까지 인식되었다. 그러나 부근리고인돌은 기울기를 통해 부조화와 비정형의 미학을 추구하고 있다. 죽은자의 입장에서 이 공간은 기울어진 방과도 같다. 어떤민족의 건축에서도 일부러 기울어진 방을 창조하진 않았다. 더군다나 죽은자로서 최고의 권력이 행사되는 무덤공간을 이렇게 일부러 기울인 경우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다. 때문에 부근리고인돌은 그냥 쉽게 지나치든지, 볼수록 난해해져 탈현대적인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부조화속에 감춰진 조화, 비정형의 정형 이것이 부근리고인돌에 고도의 과학적 능력을 투여한 사람들의 미학적 이상임에 분명하다.
한편 껴묻거리로 출토된 청동칼, 청동거울, 청동방울등은 실용적 목적이 아닌 주술의례적 목적의 무속용구로 제사의 기능까지도 죽은 자에게 부여됐음을 알 수 있다. 죽은자의 통치가 고인돌이라는 거점에서 상징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화되어 있는 것이다. 권력의 상속과 계승을 위한 치밀한 장치가 고인돌 무덤의 건축적 의미이다. 단군신화의 천부인 세 개는 무속의 기본 도구인 명두(청동거울), 칼, 방울이란 점으로 미루어 고조선의 사상적 기반은 무속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속에서의 인격신은 주로 당시의 인간생활에 큰 영향을 준 신들이다. 단군이 그렇고 김유신, 최영, 임경업등이 그렇다. 무속신은 살았을 때 성공했든 실패했든 그 나름대로 못 푼 한이 있기 때문에 한을 품은 존재라고 본다. '한'이야 말로 무덤을 통해 공간과 시간을 지배하는 사상이다. 무속의 신들이 풀지 못한 '한' 때문에 된 것이란 '한풀이'설과, 반대로 그들의 영웅적인 활동력을 숭배하기 위한 것이라는 '영웅숭배'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영웅숭배의 숭고미가 지극한 이상적 '상태'에 대한 미감이라면, 한풀이의 비극미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감이다. 비극도 숭고한 이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인데, 숭고가 완성을 향해 실천되는 과정에서 유린될 때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의 미감은 장구한 시간개념을 전제로 숭고미와 비극미를 통합한다. 때문에 죽었어도 살아 있고, 미래를 보기 위해 과거를 보고, 하늘족이 곰족과 결합할 수 있고, 온갖 잡종문화의 교차속에서도 접화군생 接化群生 할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고조선의 이러한 사상미학은 사회제도로 어떻게 구체화되었을까? 거사국연맹체인 고조선은 거사국과 중앙국가의 관계를 잘 나타내 주는 조세와 법률체계에서 이런 정신을 구체화했다.
 
[맹자]의 곡자편에는,
'백규가 맹자에게 물었다."저는 전세를 20분의 1만 받고자 하는데 어떻습니까?"
맹자가 말했다."그대의 방법은 맥족의 방법이요, 1만가구가 사는 나라에서 단 한사람만이 질그릇을 만든다면 되겠는가?"
백규가 말했다." 안됩니다. 사람들이 쓸 그릇이 부족합니다."
맹자가 말했다. "무릇 맥국에서는 오곡이 나지 않고 기장만 난다. 그러므로 20분의1의 조세로도 넉넉하다."
 
여기서 맥국은 예족, 고구려족과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거사국이다. 당시 고조선의 조세제도가 20분의1 밖에 받지 않는 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각 거사국들의 경제 생활을 최대한 자립적으로 꾸리게 하고 최소한의 조세만을 징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은 느슨한 형태의 원시적 연방국가였던 셈이다. 또한 법률의 측면에서 보면,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소도안으로 피신하면 죄가 면제되었다. 물론 소도 안에서 다시 노예의 신세로 전락하는 구조가 되었으나 법 적용에 있어서 융통성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바빌론신화의 길가메시도 신과 인간의 결합으로 탄생했다는 점에서 단군신화와 유사성이 있다. 길가메시는 신과의 영웅적 투쟁과 모험을 통해 숭고한 이상을 추구한다. 그러나 죽음은커녕 졸음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노래한다. 길가메시 서사시 역시 숭고와 비극을 통합한다. 그러나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신의 세계가 전제되어 있다. 조화를 전제로 한 부조화인 것이다. 그러나 단군신화에선 창조신이 없다. 고조선의 무속신은 신적 조화를 전제하지 않는다. 때문에 부조화의 조화라는 한의 미학이 나온다.
이러한 한의 미학으로부터 다시 과학과 철학이 나온다. 고조선 시대부터 형성된 '한'의 미학 사상은 숭고한 이상을 갖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현실적 공간에서 이를 유린하는 상황을 만났을 때 슬픔과 함께 희망을 동시에 갖는 사상이다. 탈춤에서의 풍자와 해학, 판소리의 시김새가 그렇고, 이북의 '유훈통치'와 '가는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와 같은 구호가 그렇다. '한'속에는 그 한을 움직이는 '신명'이 있어서 그것이 일정한 절정에 이르러 한의 비극적 상황을 깨고 나오게 되니 이것이 곧 '신명풀이'요 '한풀이'다.
통일의 미학이란 고인돌로부터 시작된 한의 미학을 전국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니, 그것은 곧 통일신명 풀이다.
부근리 고인돌은 어느새 세계문화유산이 되어 있었다.
최첨단 세계화의 구호가 명멸하는 시대에 고대의 고인돌이 세계성을 획득한 역설 앞에 우리는 서있다. 관계의 풍향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수천년 세월을 견뎌온 존재의 힘. 그러나 그 존재의 힘도 알고 보면 고조선이 도달한 관계의 높이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다. 다양성을 조화시킬 수 있었던 힘이 바로 고조선의 힘이었다. 고인돌은 단군이 폐쇄적인 민족신화의 틀을 벗어나 유라시아를 계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광성보-병인,신미양요
우선 조선이 어떻게 유라시아체계에 대응했는지를 살펴보자. 1885년 영국의 거문도점령은 공식적인 ‘점령’을 선포했다는 점에서 앞선 양대양요보다 훨씬 노골적인 침략이었고, 영국과 러시아제국간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연장선에서 2차 격돌을 예고하며 세계대전으로 발전될 소지마저 가지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조선의 군사적 대응은 전무했다. 거문도는 대한해협의 문호로서 조일양국의 해상통로는 물론 러시아의 태평양진출의 요충지로서 손색이 없는 곳이었으며, 영국으로서는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공격지로서 더 없이 중요한 곳이었다. 따라서 거문도는 당시 유라시아 양대 제국 해군력의 지정학적 충돌점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조선은 이에 대한 판단이 전무했다. 조선의 유라시아지정학의 지식이 미치는 범위는 강화도와 한강하구 서울로 이어지는 한강축선 이었던 것이다.
프랑스혁명은 국내에선 민주주의를 선사했지만 다른 나라에 대해선 제국주의전쟁을 선사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의 지정전략은 지금의 베트남인 코친차이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코친차이나가 중요했던 것은 유럽에서 아시아와 태평양으로 통하는 가장 짧은 노선인 말라카해협 때문이었다.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나폴레옹 3세는 적극적인 식민지개척정책을 펼침으로서 집권 전반10 년간 국내적 번영을 구가했다. 아프리카에서 세네갈을 병합하고 이태리-오스트리아전쟁을 통해 니스와 사보이를 취했으며 청나라, 모로코, 시리아, 알제리, 인도차이나 및 북미에 진출하였다. 또한 수에즈운하건설에도 많은 자본을 투입했으며 미국의 남북전쟁에도 개입하였고 멕시코 원정도 단행했다. 극동에 대한 프랑스의 정책적 초점은 코친차이나 즉, 지금의 비엩남 중부로 모아졌다. 프랑스는 극동으로 진출하기 위해 해군거점이 필요했고 이 거점을 획득하려는 생각은 귀조에 의해 표명되었으며 이 거점은 상업기지로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1848년 11월 9일의 훈령에서 귀조는 ‘해군기지는 청나라가 아니라 청제국 인근에 설치되어야 할 것’ 이라고 하면서 파울로콘도르섬을 생각했다. 그러나 싱가포르가 바로 옆에 있어 영국과의 충돌을 우려하게 됐고 이를 피해 다낭에 착목했다. 그는 다시 필리핀 남쪽의 바실란 섬에 주목했다. 이 섬은 청나라와 미주를 연결하는 해로에 위치하였으며 광동에서 계절풍을 피해 유럽으로 가는 항로에 위치하고 있어 적절하다고 보았으나 이번에는 스페인이 항의를 제출했다. 결국 귀조는 상업적인 동시에 군사적인 극동진출의 거점을 안남 즉 비엩남으로 굳힌 것으로 보인다.
1862년 원정군을 파견하여 그해 6월 비엩남 남부지역을 할양받았다. 이 시기에 나폴레옹 3세가 “조선에 하나의 거점을 점령할 수 없음을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 사실은 본질적으로 프랑스가 조선에 한 거점을 확보하려고 생각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1860년대 후반기에 들어오면서 멕시코원정에도 실패하고 나폴레옹 3세 자신이 병약해져 갔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점증하는 독일연합세력에 대처하기 위해 그의 주된 관심은 유럽에 집중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너럴 셔먼호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프랑스측에 대해 대조선공동원정을 제의했을 때도 프랑스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미양요는 미국이 남북전쟁을 끝낸 뒤 얼마 안 되어 일어난 조선과 미국간의 1차 전쟁이었다. 병인양요를 승리로, 신미양요를 패배로 구분하는 상식에 더해져 남북전쟁은 미국군대를 세계 최강의 군대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간혹 통용되나 남북전쟁이후 미국의 군사력은 오히려 더욱 후퇴했으며 다른 열강에 비하면 대체로 후진상태를 면치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군이 처한 사회적 고립상태를 거꾸로 군의 기본을 세우는 계기로 활용하였다. 정치적 암흑기이면서 군사적 황금기였던 시기에 미군사에서 가장 기록할 만한 전쟁의 하나가 신미양요였다. 병인양요 후 조선은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필사즉생의 각오로 싸웠지만 병인양요에서 작용한 ‘전쟁터의 안개’는 조선의 편이 아니었다. 초지진 야영지에 대한 이렴의 기습작전은 양헌수의 그것과 비견되나 미해병대는 기습에 대비한 작전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상륙기세를 막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1860년대는 미국이 대외로 진출하기 위한 준비기이면서 경제적 제국주의의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시기이다. 군국주의를 거부하던 산업평화주의 사조는 그것이 제국주의의 모습을 갖추어 가면서 군사력을 적극 필요로 하게 되었다. 특히 1861년부터 1869년까지 국무장관 자리에 있었던 윌리암 시워드(Wiliam H, Seward)는 역대국무장관 중에 가장 제국주의적 색채가 강한 팽창주의자였다. 그는 남북전쟁이 끝난 후 북미대륙에서의 강력한 신제국을 건설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였다. 조선은 미국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조선인에게는 러시아인이나 프랑스인이나 영국인이나 모두 동일한 양이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양이들은 하나같이 천주교도로 생각했고 천주교도는 조상을 모르는 야만인으로 그들과의 접촉은 오로지 조선의 미풍양속을 해칠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조선은 1866년 대동강에서 소각시킨 제너럴셔먼호도 미국배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며, 1880년 5월 슈펠트Shufeldt 제독의 요청으로 콘도近藤영사가 동래부사를 방문했을 때도 부사 심동신은 콘도의 설명으로 미리견美利堅과 미국이 같은 나라임을 알았다. 조선인의 이같은 태도는 ‘서프라이즈Suprise'호 사건과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에 대해 각각 다르게 나타났다. 서프라이즈호처럼 난파선과 그 선원에 대하여는 인도주의적 후대를 아끼지 않은 반면 제너럴셔먼호처럼 의도적 침략이라고 생각됐을 때는 자위수단을 강구한 것이다.
 
연무당-일제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실패에 의해 근대민족국가를 개혁할 주체를 마련하지 못하면서 이를 계기로 조선에 다시 들어온 청일간의 전쟁으로부터 1904년 러일전쟁까지 10년간은 유라시아대륙의 제국열강 뿐 아니라 미국까지 참여함으로서 조선반도가 세계적 차원의 지정학적 각축장이 된 시기이다. 청이 안정되길 바랐던 영국은 청이 일본에 패하자 일본에게 접근하고 영국을 경계하던 러시아가 동맹관계에 있던 프랑스와 그 사이의 독일과 함께 각축전에 끼어들고 미국이 중립을 지키는 듯하면서 일본을 편드는 형편이었다. 이들 열강의 지정전략적 각축전은 결국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으로 표면화되고 러일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10년간의 지정학 싸움은 일본의 패권으로 귀착되면서 민족 대 외세의 구도로 결론난다. 근대의 상징인 철도를 예로들어 유라시아 지정학질서가 어떻게 관철되었는지 보자
이때의 경의선은 6대 열강의 지정학적 쟁투를 일제의 단일패권으로 매듭짓는 역할을 했다.
1884 갑신정변 실패 후 청의 종주권강화정책과 이에 반발한 조선 내 친러세력의 대두,1885년 영국의 거문도점령과 1886년 영국의 거문도 철수와 함께 일기 시작한 러시아의 시베리아철도 건설계획에 대해 명치정부의 사상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7년 '조선은 일본의 울타리이다'라는 신문사설을 통해 조선을, 일본을 서구열강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방어선으로 삼을 것과 시모노세키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산양철도山陽鐵道의 신속한 완성을 촉구한다. 이러한 요구는 청일전쟁 때까지 계속된다. 또한 유키치는 1894년 청일전쟁 후 일본군 주둔을 기회로 경인, 경부선철도를 일본자본으로 건설할 것을 제안한다. 이와함께 그는 청일전쟁의 기원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으로 옹호한다.
일본인과 일본 앞에는 支那人 支那國은 없고, 단지 세계문명의 진보를 목적으로, 그 목적에 반대 방해하는 것을 타도하려는 것으로, 사람과 사람, 국가와 국가의 일이 아니고 일종의 종교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사무엘 헌팅턴이 '냉전'대신 사용한 '문명'충돌의 개념이 초기 제국주의침략 정책의 개념에서 빌려 온 것 이란 암시를 받는다.
그러나 경인선 부설권은 일본이 아닌 미국에게 넘어간다. 이는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세력이 크게 약화된 정세와 연관된다. 그러나 미국은 1894년 청일전쟁부터 친일정책을 펴고 있었기에 모스에 의한 경인선 부설권 획득은 일제의 우회전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모스가 본국으로부터의 자금조달에 실패하자 이를 재빨리 간파한 일제가 조선정부를 무시한 채 불법적으로 모스와 경인철도양도계약을 체결하고 1898년 180만원에 경인선을 인도한다. 1896년 3월 미국인 모스가 경인선부설권을 획득한데 자극되어 프랑스는 1896년 7월 러시아공사 웨베르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 피브릴로회사의 대표 그릴르에게 경의선부설권을 획득하게 하였으나 그릴르의 재력부족으로 부설권을 상실하게 된다. 1899년 6월 23일의 일이다. 이에 고종은 당시 국내에서 일고 있던 애국계몽운동에 힘입어 반환된 경의선 부설권을 1899년7월8일 박기종이 주도하는 대한철도회사에 특허하였다. 그러나 재력이 없던 박기종이 실패하자 정부는 외세를 배격하기 위해 경의선, 경원선을 궁내부 직영으로 하게 된다. 1900년 9월 정부는 내장원內藏院에 서북 철도국을 두고 수구파였던 조병식을 총재로 임명하고 서울-개성간 선로 측량에 착수하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과 러시아는 경의선 부설에 계속 관여한다. 그러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보름후인 1904.2.21 일본은 서울-신의주간의 군용철도부설을 위한 임시군용철도감부를 설치하고 3월4일에는 이 감부소속 철도대대를 상륙시켜 불법으로 경의선 부설에 착수한다. 그러자 3월12일 정부는 군사상 필요하다는 일본의 강요에 못이겨 50년간 임대조약을 맺고 일본에게 경의선 부설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철도부설권을 빼앗은 일본은 군인과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공사를 급속도로 진행.실제 답사도 하지 않고 5만분의 1지형도로 위치를 설정하고 측량. 하루평균 733m를 건설 733일만에 완공한다. 큰 터널은 파지 않고 우회했으며, 교량도 부실하여 공사비가 적게 든 반면 졸속공사가 된 것은 자명하였다. 특히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철도용 부지를 무료로 강점하고 공병대를 투입하여 급조된 경의선은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필요했다.
1911년11월 압록강 철교의 개통으로 한국-만주간이 철도로 연결되고 각 열차의 운행을 만주 안동까지 연장하고 서울남대문과 만주의 장춘간을 주 3회씩 직통열차가 운행됨으로써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국제철도의 일환이 형성되게 된다. 유라시아 철도로의 비약에 드리워진 일제의 패권으로 경의선은 민족이 유라시아로 웅비할 가능성을 빼앗기는 대신 유라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지정학 쟁투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첫 번째 유라시아 의제의 출현-민족자결주의
본격적으로 유라시아체계가 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베르사이유체제로부터이다. 미국의 참전을 이루어냄으로서 1차대전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윌슨(Woodrow Wilson)대통령은 1918년 1월8일 행한 국회연설에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중앙세력들이 받아들여야할 14개조항(14 Points)을 발표했다. 그가 요구한 것은 외교협약의 공개성, 항해의 자유, 무역에 있어서의 장애제거, 군비축소, 소수민족의 해방등 일반원칙을 언급한 한편, 러시아, 프랑스, 벨기에등 나라들로부터의 독일군철수에 관한 문제도 언급했으며 또 전쟁이 끝난후에 국제연합(League of Nations)의 설립도 요구했는데, 특히 전후의 평화유지를 위한 국제연합에 관한 문제와 소수민족의 해방에 관한 문제는 유라시아 지정학 질서를 재편할 최초의 의제로 떠올랐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억압하고 있던 발칸반도의 여러민족들의 해방과 자주독립, 독일에게 흡수되어 있던 폴란드의 독립등을 주장함으로써 세계 각처의 소수민족들의 해방을 부추겨 준 것이었다. 그리고 나라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민족들도 흥분시켰는데 그의 연설 5항이 때문이었다.
 
모든 식민지에 관해서 자유롭고, 마음이 열리고,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조정을 해야하며, 이과정에 있어서 연관된 민족의 주권과 요구가 완벽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이 조항은 결국 호치민과 주은래와 김규식을 파리 성라자르역 주변으로 모여들게 했고, 열정적으로 외교활동을 하게 했다. 여운형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게 했던 계기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주중미대사 크레인(Charles Crane)의 연설을 듣고서였다. 여운형은 연설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 취지는 이제 프랑스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는 각국 모두에 중대한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며 그 영향이 미치는 바가 매우 심대하다. 특히 각국의 국제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미국윌슨대통령이 14개조의 주의를 제창하였는데 그중에서는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약소민족으로서는 해방을 도모하기에 절호의 기회이므로 중국도 대표를 파견하여 피압박상황을 잘 알려서 여러나라로부터의 해방에 노력해야한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규식의 외교활동은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고, 미국대표단이 한국의 입장에 동정하기도 했으나 당시의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일본이 패전국이 아닌 엄연한 승전국이었고 만일 파리강화회의가 일본의 국익을 훼손한다면 윌슨이 주창해 온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명확히 했기 때문이다. 윌슨은 국제연맹을 통해서 국제평화를 이룩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조선의 편을 들어주기엔 한계가 있었다. 이는 중국과 베트남등도 대동소이했다. 결국 이들 독립운동가들은 큰 실망과 심지어 배신감을 안고 파리를 떠나야 했다. 더불어 윌슨이 아시아를 통해 유라시아대륙의 지정학 질서를 재편하려고 했던 시도도 결국 좌절되었다.
 
두번째 유라시아 의제의 출현-민족과 식민지문제에 대한 테제
1920년 여름 레닌이 코민테른 대회에 제출한 유명한 “민족과 식민지문제에 대한 테제”는 향후 2차대전까지 소비에트를 유라시아지정질서의 주도자로 만든 의제였다. 순박한 애국자였던 호지민을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로 변모시킨 결정적 계기도 이 문서였다.
 
나는 감정에 복받쳤다. 눈앞이 환해지는 듯한 느낌이었으며 가슴에는 열의와 자신감이 가득찼다! 너무 기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방안에 혼자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수많은 군중에게 연설하듯이 큰 소리를 질렀다. 열사들이여. 동포들이여!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해방에 이르는 길이다.
 
조선과 몽골 중국의 독립운동가들도 호치민과 비슷한 감정상태를 경험했다. 다른 점에 있었다면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레닌의 테제를 만들어낸 숨은 이론가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동휘와 함께하고 있던 박진순과 인도의 공산주의자인 로이가 이 테제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고 결국 로이보다는 박진순의 노선이 채택되어 레닌에 의해 정식화된 것이다. 이동휘는 레닌과 만나 조선독립운동의 지원을 약속받았고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금화 200만루블을 받게 된다. 이 돈은 임시정부에서 사용되었고,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에도 흘러 들어갔으므로 아시아민족해방운동세력에게 큰 돈줄이 되었던 셈이다. 또한 코민테른을 통해 국제적인 지원체계도 완벽히 구비된다. 즉 레닌의 의제는 과학적테제를 주었고, 자금을 주었으며, 국제지원조직을 주었다. 말뿐이었던 윌슨의 의제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것이었고 결국 2차대전이 끝나는 시점까지도 이 의제의 영향력은 유라시아의 질서를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경우, 임시정부요원들의 거의 대다수가 1920년대에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할 정도였던 것에서 레닌의제의 영향력은 단적으로 드러난다.
 
세 번째 유라시아 의제의 출현-유엔
2차대전의 승전연합국이었던 영국,미국,소련이 전후체제를 논의하는 얄타회담에서 미국무부가 제출한 유엔헌장 초안은 국제연맹의 실패를 만회하고, 다시 미국의 이상주의를 실현하려는 의도로 그로티우스의 집단안보론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게 되었고, 그 결과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강대국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모아졌다. 강대국중심의 안전보장이사회가 가장 외형상의 특징으로 드러났다. 스탈린은 미국의 의도를 끝없이 의심하면서 조심스럽게 유엔헌장 초안의 수정을 제의했지만 결국 합의를 이루었고 유엔이 창설되었다. 오히려 스탈린은 서방측의 오해를 지나치게 의식하여 과거 20여년간 유라시아질서의 주도권의 상징이었던 코민테른마저 해체하였다. 이제 유엔이 유라시아지정질서의 핵심의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오끼나와 상륙과 군정교범의 완성, 제주 4.3항쟁의 유혈진압에의 관여한국전쟁의 개입등으로 상징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유엔창설의 정신에서 많이 빗나간 것이었고, 이제 유엔헌장의 초안자로서의 미국은 유엔질서의 주조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한국전쟁은 국제연맹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었던 국제연합을 부활시킨 제일의 공신이었으며 소련이 안보리에 복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며 안보리를 실질적으로 마비시킨 40년동안 미국은 안보리를 대신하여 유엔총회의 기능을 새롭게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유엔창설정신이었던 강대국의 거부권대신 총회에 지지표를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의 패권이 중요해졌다. 1950년 11월 애치슨의 ‘평화를 위한 단결’ 결의를 통한 유엔안보리체제의 전복은 한국전쟁을 통해 유엔질서의 패권적인 변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반공, 반자이데올로기의 비논리성과 비합리성 선동성의 구조들은 바로 남북이 각각 겪은 3개월의 돌이킬 수 없는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개인이나 사회차원의 이러한 맹목성은 전쟁법이나 유엔헌장의 이성적 기준이 무시된 전쟁 자체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다. 내전으로 시작되어 국제전이 될 것이라는 예감은 이미 전쟁 전 해방 5년의 공간에서 충분히 형성되어 있었고, 유엔안보리에서 결의된 바 없는 참전결의, 유엔사창설결의, 북진결의가 미국에 의해 만들어지면서 칸트의 추측을 뒤집고 국제연합이 충분히 이성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중 유엔사창설결의만 예를들면, 유엔사는 유엔안보리에서 그 창설이 결의된 바가 없었다. 유엔안보리가 결의한 것은 미국이 중심이 되는 연합군사령부였다. 그러나 이 또한 유엔헌장상 그 결의의 효력이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유엔헌장에는 유엔 차원의 모든 군사행동의 지휘는 유엔군사참모위원회를 통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은 2차대전 이후 장악하기 시작한 세계적 패권을 한국전쟁을 통해 투사하며, 한반도의 운명을 강제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운명도 강제 받는 계기가 된다. 한국전쟁에서의 체험은 비엩남 전쟁을 통해서 많은 부분 복제되었고, 다시 최근의 이라크전쟁에서 재현되었다.
네 번째 유라시아의제의 출현-민족
1968년 1월, 비엩남의 구정공세와 한국의 김신조부대 청와대기습사건, 푸에블로호나포사건등으로 미국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1968년은 한반도 비무장지대 역사상, 분단체제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한해로 기록된다. 67년 동해에서 전후 최대의 충돌이었던 당포함침몰 사건이 발생하더니 남북의 긴장은 살얼음판을 걷듯 험악해졌다. 1968년 김신조부대의 청와대기습사건까지만 해도 그것은 남북사이의 냉전이 빗어낸 사건에서 결코 그 성격이 초과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 뒤 일어난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은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사건이었다. 한해 전인 1967년 이스라엘의 미국정보간첩선 리버티호에 대한 공격에 이어 미국 NSA의 정보자산이 거덜나는 사건이었지만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해 침묵했듯이 북에 대해서도 결국은 침묵하고 사과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미국이 이스라엘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미국을 통제한다는 가설과 북은 소련의 위성국이 아닌 독립국으로서 언제든 미국에 자위권을 발동할 태세가 갖춰져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확인 시켰다. 푸에블로호에 실렸던 암호해독기는 미국으로서는 빼앗겨서는 안 될 자산이었지만 결국 북의 손에 들어가게 됐고, 그것은 다시 소련으로 보내져 분석되었으며, 미국이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암호체계를 모두 바꾸었지만 소련스파이가 바뀌는 암호체계를 빼돌림으로서 소련은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주요 교신내용을 거의 완벽히 도청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 승리의 배후에는 푸에블로호 사건이 있었던 셈이다.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고 북과 대치하고 있는 이상, 또한 북이 미국에 맞서 항상 대항할 자세를 굽히지 않는 이상 한반도의 사건은 유라시아적 사건이 된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베트남전에서의 미국의 패배는 제 3세계민족해방운동의 빛이 되었고 유엔은 미국무성의 하부기관 같은 이미지에서 제3세계국가의 결집과 단결을 표현하는 장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1975년 베트남에서 미국이 패전하는 기간동안 세계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몰려오고 있었다. 미국에도, 소련에도 궁극적으로 의존하지 않은 채 자립을 실현한 새로운 주체로서 ‘민족’이 등장한 것이다. 75년 유엔총회에서의 유엔사해체결의는 그 절정이었다. 수많은 민족 해방운동의 성공과 독립국가의 수립과 이들의 유엔진출로 유엔회원국의 지형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즉 미국의 패권이 더 이상 유엔총회를 통해 실현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미국은 스스로 창조한 유엔총회의 틀이 자신들에게 불리해지자 유엔안보리를 부활시키려고 뒷걸음쳤다. 1975년 유엔사해체결의는 이제 더 이상 미국이 유엔을 통한 유라시아지정질서의 주조자가 아님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1990년 걸프전쟁에서 이르러서야 비로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2003년 이라크전에서도 미국은 유엔안보리결의를 포기함으로써 유엔에 대한 피로의 누적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었다. 유엔사해체결의는 세계적 패권을 구축한 미국에 대항하는 반패권연대의 성취를 뚜렷이 보여주었으나 그 이후 공고한 틀로 유지되진 못했다. 그러는 사이 한반도에서는 연이은 땅굴소동과 긴급조치등 분단독재가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전 세계의 반공전선이 무너지고 도미노현상이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감은 한반도 남측에서의 성공적인 반공공세로 극복할 수 있었고 미국은 다시 회생하게 된다.
 
연미정
유라시아 의제의 모색 - 유엔사
1990년 소련붕괴와 걸프전이후 세계는 냉전이 아닌 유라시아지정전쟁의 시대로 돌입한다. 냉전은 지정학의 용암위에 떠있는 바위덩어리에 불과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2001년 9.11이후 세계에서 미국의 패권가도에는 브레이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이것이 미국에게 최대의 위기였다. 2003년 이후 불거진 2차 북핵문제는 미국의 패권적 지위에 다시한번 위협을 가했다. 새로운 의제로서의 핵은 6자회담이란 틀을 만들어냈다. 이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등장한 다자틀이다. 미국은 유럽에서와 달리 아시아에서는 항상 쌍무관계만을 유지해 왔었다. 6자회담의 의제는 평화협정체결이며, 평화협정체결의 핵심의제는 유엔사해체이다. 유엔사가 유라시아 지정질서의 변화를 가져올 의제중 하나가 될 수 있음을 6자틀은 이미 예고하고 있다.
 
(1) 남북정상회담
1990년대는 미소대립구도가 해체되고 미국의 단일패권이 세계에 적용되는 준비기였다. 2000년대 대테러전략으로 전환되기까지 90년대 10년 동안의 미국은 유라시아지정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대테러전략의 잘못된 적용으로 평가받는 이라크 전쟁에서 보여지듯 부시정부의 대테러전략은 지정전략의 수사학일 뿐이다. 클린턴에 의해 준비된 대테러전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90년대 내내 전쟁의 위기가 감돌던 한반도가 미국 지정전략의 틈을 깨고 반전을 일으킨 사건은 6.15선언이다. 전략의 틀에서 봤을 때 6.15이후 미국의 유라시아 지정전략에서 한반도 정책은 일관성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6.15선언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해방전후 분단체제 형성기의 오류인 이념과 체제의 날선 경쟁 대신 유라시아지정전략에 대응할 민족자주의 원칙과 남북민간교류의 구체적인 장을 열어 놓은데 있다. 역사적으로 유라시아지정전략의 대응에서 터득한 경험인 유라시아차원의 전망을 갖춘 지도력과 민중역량의 결집이 실현될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중의 하나인 경의선을 다시 주목해보자.
박용길 장로가 조문 차 방북 했을 때 김주석의 유훈중 하나가 경의선복원이란 사실이 처음 공개되었다. 남쪽에서는 평화학의 대부로 불리는 요한갈퉁 교수가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의 추구'라는 차원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제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의선은 통일의 차원과 평화의 차원에서 모두 의미를 가진다. 통일은 민족의 차원이고 평화는 국제정치차원의 문제인데 경의선은 민족통일과 세계평화를 모두 가져다 줄 것이다. 역사를 단순화 시켜보면 100년이 지난 뒤 한반도의 역사는 우연처럼 반복된다.
1994년 6월 핵문제로 미국이 북과 전쟁을 일으키기 일보직전까지 갔다가 김주석을 방문하던 카터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통화로 전쟁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약 10년 뒤 경의선 복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1994년부터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시작으로 유라시아대륙의 지정학싸움에 다시 끼어든다. 옐친정부의 한 관료는 이념의 시대에서 지정학의 시대로 변했음을 선언했다. 2001년 9.11사건은 '테러'라는 신개념을 통해 미국의 단일패권이 확립된 사건이다. 10년간의 지정전략은 이제 반테러를 앞세운 패권권략으로 바뀌었고 한반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한미일, 북중러등 지정전략의 구도가 경의선복원을 전후하여 미국대 민족의 구도로 변해가고 있다. 경의선이 복원되고 남북의 합작이 강화되어 민족의 자주성이 커진다면 경의선 복원은 민족주체를 세운 결정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처럼 지금의 경의선이 100년 전의 경의선과 다른 것은 외세가 아니라 민족이 주인으로 될 가능성을 앞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통일운동의 모태는 민족운동인데 100년 동안의 민족적 과제가 달성될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100년전 경의선은 오욕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경의선은 민족에겐 통일을 가져다 주고, 유라시아 대륙엔 평화를 가져다 준 통일과 평화의 상징이 될 것이다. 과거 시베리아철도는 제국주의 침략을 위한 철도였으나 지금의 시베리아 철도는 미국의 일방적 침략정책에 대한 유라시아의 평화적 연대를 상징한다. 남북정상회담이후 민족적 단합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미국의 전쟁구도에 말려들게 되면 우리는 근대민족국가형성의 기회를 또 한번 잃고 굴욕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유엔군사령부
그런 점에서 1960년대와 70년대를 통해 형성되고 1975년 유엔사 해체 결의를 통해 표출된 반패권연대의 복원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그 소재는 역시 유엔사문제이다. 전시작전통제권환수 뒤 미국이 연합사에 위임되어 있던 유엔사의 작전통제권을 환수하고 유엔사를 실질적으로 강화하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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