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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이영재 목사(구약학 박사) 강좌 원고

관리자 2014-04-11 (금) 09:14 10년전 4672  
  이영재.hwp (75.0K), Down : 28, 2014-04-11 09:14:47
 
평화통일과 성서
 
이 영 재 (목사, 전주화평교회)
 
들어가는 말
 
분단된 조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꿈은 남북을 막론하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염원이다. 하지만 통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방법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로 다른 입장을 보일 수 있다. 민족주의자들은 배달민족의 한 겨레를 강조한다. 그 중에서도 국가주의의 성향을 띤 분들은 단군을 시조로 하는 배달민족이 하나로 뭉쳐서 통일하고 부강한 국가를 이루는 꿈을 꾼다. 민족주의자 중에서도 세계의 보편성을 지향하는 분들은 통일을 이루어 남북의 군사대결을 종식하고 비핵화 영구평화 중립지대로 만들어 세계평화에 기여하기를 염원한다. 정치가들은 국가의 번영을 위하여 통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지만 진보와 보수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운다. 어떤 분은 ‘통일대박’이란 슬로건을 내세워 대중을 선동하기도 한다. 기업가들은 북한의 인력과 자원을 활용하여 경제발전을 도모하자는 생각을 펼친다. 이처럼 제각기 생각이 다른 현상은 분단 이전의 해방정국 시절에 대립했던 좌익과 우익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통일의 과정과 통일 이후의 작업에도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아예 정치권력에 모든 것을 맡기 분파도 생겨났으니 남측의 정권이 지닌 통일의지와 정치적 역량에 기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아예 북측의 정권이 지닌 권력에 의지하여 통일을 도모하는 편이 더 빠르겠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생겨났다. 정권과는 별도로 제삼의 방식을 도모하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전략으로 비칠 뿐이다.
이처럼 다른 입장들은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교회도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통일에 대해서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 교회를 많이 세워서 분단 이전에 부흥했던 교회의 모습을 재건하려는 선교의 꿈을 펼친다. 그러나 이처럼 단순한 교회의 꿈조차도 간단하지 않다. 그 배경에는 정치경제적 갈등의 과제들이 산적하게 놓여 있다. 교회가 통일운동에 가담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대립하는 다른 입장들이 소통을 위해서 한 원탁에 앉을 수 있어야 한다. 통일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먼저 통일을 이루어야 마땅한 일이다. 입장의 통일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앙고백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서로 활발히 대화하면서 하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서로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갈등하는 세력 사이에 서로의 소통을 가로막는 요인들 중에 가장 위험한 것은 성서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끌어대고 인용하는 태도이다. 민족과 조국의 통일이라는 대업에 교회의 대중을 동원하여 참여시키려는 목적을 위해서 성서의 말씀을 뽑아서 인용하는 행위는 올바르지 못한 태도이다. 또 성서를 읽어 현실의 문제에 해답을 얻으려는 시도는 사회운동의 영역에서는 망상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는 자들도 있다. 성서에 대한 해석이 저마다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성서는 사회운동의 통일대오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의적인 판단은 기독교의 통일운동에 가장 무서운 해악을 끼친다. 왜냐하면 성서에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사상에 근거한 어떠한 교회운동도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을 위한 올바른 신앙적 관점과 방법론을 성서에서 찾아보고 부단히 서로의 견해를 교환하고 대화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점에 동의한다면 이제부터 성서에서 평화통일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살펴보는 작업을 시작해 보자.
 
성서해석학과 주석방법론 - 성서가 통일논의에 끼어들 여지가 있는가?
 
성서가 고대에 저술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문제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대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맹신이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명쾌하게 나올 수 있어야 성서로써 통일을 전망하는 일이 가능하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무오하신 말씀이므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서문자주의의 오류에서 벗어나려면 성서비평학과 성서해석학의 논의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성서연구에서 역사주의에 빠지는 것은 큰 오류라 하겠다. 성서가 기록되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비추어 본문을 이해하는 것은 올바르지만 성서연구의 목적을 역사의 재건에 두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방법이며 성서를 통해 역사를 재건하는 일은 사실상 가능하지도 않다.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본문을 읽은 다음에 그 본문을 읽은 결과를 현대의 상황에 적용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럴 때 성서문자주의의 오류를 비껴갈 수 있다.
오경은 히브리어성경에서 가장 먼저 결집된 경전이다. 오경이 결집된 시대는 포로이후기이다.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포로이후기의 시대 때에 일차로 결집된 오경은 헬레니스트 제국의 지배를 통하여 마카베오 독립의 시대에까지 계속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성서의 저자와 독자는 포로 이후기를 살았던 사람들로서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일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유대왕국이 멸망한 후에 국가가 멸망한 원인을 노예노동의 현장에서 되짚어 보면서 지배자의 과거를 철저히 회개하는 데서 촉발한 것이 오경이다. 더 나아가 디아스포라가 하나님나라를 새롭게 열어가기 위해서 미래를 향해 희망을 제사하는 책이 오경이다. 오경의 공동체는 성전이 파괴되고 없어진 상황에서 회당에 모여 말씀으로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이들은 말씀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말씀을 준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공동체로 정립하였다. 디아스포라는 제국의 도성 바깥에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고대노예제를 주동하던 도성이 요구하는 생산에 종사하고 노예노역을 감당하였던 생산의 담지자들이 디아스포라였다. 디아스포라 노예들의 공동체에서 오경이 작성되고 읽혀졌다.
그러므로 성서해석학은 어느 시대에 속한 사람이든 간에 노예제 체제에서 고통당하는 히브리인의 시각으로 성서를 읽을 것을 요구한다. 이 점을 창세기 10장은 분명하게 제시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후예는 모두 에벨의 후손이었고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은 셈이었다(창10:21). ‘히브리인’이i란 명사는 셈의 자손 <에벨>e란 이름과 철자가 같으며 ‘건너가다/지나가다’란 동사 <에베르>에서 파생하였다. 이것은 ‘물을 건너 온 사람들’이란 뜻이다. 양식을 구하러 물을 건너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히브리인이다. 토라는 기존체제에서 소외된 이 히브리인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자신의 백성으로 세워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현대의 사회체제에서 히브리인은 누구인가? 사회의 생산을 담당하면서도 주변부에 밀려나서 자신의 생산한 결과로부터 소외당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이다. 도시국가들이 경영하는 도성들 주변에 디아스포라 천민부락을 형성하고 살던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존의 억압체제를 버리고 탈출한 사람들이 히브리인들이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고 도시국가의 억압체제로부터 구원받아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교회는 이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레위인, 과부, 고아, 나그네, 가난한 사람들과 먼저 연대해야 한다. 신약성서는 이들을 ‘이웃’이란 용어로 한정한다. 성서적 가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가지로 크게 요약된다고 예수께서 정리해 주셨다. 그러므로 히브리어성서 토라는 공동체론 이며 곧 교회론 이라고 정의해도 무방하다. 교회가 히브리인의 현주소를 떠나면 성서가 더 이상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을 논의할 때에도 교회는 현 체제에서 억압을 당하고 있는 히브리인의 관점에서 통일을 바라보아야 한다.
 
1. 국가와 문명
 
창세기 1~11장은 토라(오경)의 서론이다. 성서는 서론부분인 창세기 1~11장에서 국가의 문제를 쟁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성서의 대주제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한다면 그 반대되는 개념은 ‘세상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국가의 기원을 가인이 세운 에녹성에서 찾으며 에녹성을 창건한 것은 ‘죄’라고 규정한다(창4:7).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후환이 두려워 하나님의 보호를 요청하였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호하는 표를 주셨으나 첫 아들 에녹을 낳고 난 후에 그 표를 믿지 못하여 성곽을 쌓았다. 자신의 힘으로 가족을 보호하려고 시도한 결과 가인은 성벽으로 사방이 가로막아 도시를 만들었다.
가인은 아들의 이름을 따서 그 성을 ‘에녹성’이라고 불렀다(창4:17). 이것이 인류 최초의 도시였다. 히브리어로 ‘도시/도성/성읍’은 히브리어로 <이르>i라고 부르는데 라틴어로는 civis이며 이것을 영어로 city라고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civilization이란 단어가 나왔는데 우리말로는 ‘문명(文明)’이라고 옮긴다. 문명의 발상지로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꼽는다. 성서는 창세기 4장에서 문명의 기원이 도시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청동기 중기 BC 3500년경에 수메르 문명권에서 에리두라는 도성에서 나타났는데 이것이 인류 최초의 도시다. 이 에리두 도성이 성서의 에녹성과 동일시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인류가 지어온 문명의 역사는 5,500년 정도의 기간에 걸쳐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서는 문명의 기원이 살인자 가인의 방어기재(defence mechanism)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한다.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창4:14). 인류의 무의식 속으로까지 가라앉은 의식의 결정체를 방어기재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여 주시는 ‘표’(오트, 창4:15)를 믿지 않은 불신앙의 결과로 생긴 의식의 침전물이다. 방어기재가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고 성곽을 높이 쌓아 올려 불통의 장벽을 만들었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문명이 도시로 인해서 발달하였다. 인류는 성 안에 사는 사람들과 성 밖에 사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성안의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하고 이로써 불신앙의 문명을 지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식생활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채식을 하도록 창조했다.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창1:29). 그러나 도시를 창건한 가인의 후예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육식을 시작하였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창4:20). 이것이 축산업의 기원이다. 아다는 도성 바깥에 축사를 짓고 울타리를 친 공간에 동물을 대량으로 사육하여 도성민에게 고기를 공급하였다. 도성민들이 육식을 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육체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진다고 생각했다.
도성문명에서 밤의 문화가 발달한다. 도성의 밤에 불이 휘황찬란하게 켜지면 낮에 있었던 일을 놓고 서로 토론하는 심포지움이 벌어진다. 제일부는 세미나로 열고 이어서 제이부는 향연이 벌어진다. 여기에 음악과 악기가 발달하였다(창4:21). 가인의 후예들이 악기를 개발하였다는 보도는 도성의 심포지움 문명을 지시한다. 예술과 문학과 학문이 도성문명에서 장려되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인간중심주의의 기술이 발달하였다(신11:10~11).
기술의 발달은 무기생산으로 귀결되었다. 여러 가지 농기구들과 가재도구들을 청동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청동기 시대는 철을 캐내고 제련하는 기술이 고안되자 철제 도구들을 생산하는 철기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창4:22{). 청동기와 철기 시대에 일어난 생산의 혁명은 무기생산 분야에 괄목할 만한 도약을 가져왔다. 철기시대가 도래하자 전쟁기술은 더욱 발달하였으며 전쟁의 확대와 더불어 노예제도는 더욱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도성의 주민들은 노예제를 확립하고 노예들을 광산이나 채석장, 들판이나 산판과 같은 집단노동의 현장에 투입하여 도성의 번영에 필요한 식량과 무기들을 생산하도록 강요하였다.
가인의 후예들이 도성을 권력의 온상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는 폭력과 전쟁이었다. 폭력을 휘둘러서 상처 난 영혼들은 존재의 불안에 시달리며 더욱 폭력을 휘두른다. 마침내 도성의 지배자들은 죽음의 저주에 갇히고 말았다(창4:23). 이러한 도성문명에서 길가메쉬와 같은 영웅들이 탄생하였으며 영웅숭배가 종교처럼 흥왕하여 권력자 네필림이 위세를 떨쳤다. 이들 영웅들은 영혼을 상실하여 육의 존재로 타락하자 하나님은 그들의 수명을 120세로 한정하였다(창6:3). 영웅들이 폭력을 자행하자 하나님의 창조계는 망가졌다(창6:10). 이로써 노아 시대의 대홍수 심판은 불가피해졌다.
영웅이 도성의 권력자가 되어 창조계를 파괴하는 동안 노아만은 의롭게 흠없이 살고 있었다(창6:9). 노아는 폭력을 모르는 비폭력의 사람이었다. 폭력으로 망가진 존재자들을 다 쓸어버리고 폭력을 모르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 남겨 두었다. 그러나 노아의 가족에게서 또 다시 타락하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줄이야! 노아는 포도주를 발명하여 술을 자꾸 마시다가 알콜중독에 걸렸다. 노아는 고독을 이기지 못하여 술에 의존하였던 것이다. 노아의 영성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성성하지 못하고 퇴영하였기 때문이었다. 노년의 노아는 흙의 사람으로 전락하고 있었다(창9:2). 급기야 알콜중독 증세가 나타나 벌거벗고 잠에 빠져버리곤 했다. 주사의 일종이었다.
둘째 아들 함이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흉보다가 저주를 받았다. 저주의 결과로 함에게서 세상의 군왕들이 출현하였는데 네필림에 필적할만한 영웅 니므롯이 태어났다. 함의 후예들이 이집트 문명을 비롯한 수메르와 가나안의 도시문명을 창설하였고 그 도시들이 연합하여 국가가 출현하였다(창10:10).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성서는 바벨이란 도시국가를 제시하고 있다. 영웅들의 지배가 강화될수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명이 번성하다. 마침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소통이 가로 막히고, 또한 피조물들 사이에서도 대화가 끊어지는 소통의 부재라는 재난을 당하고 말았다(창11:1~9).
도시<이르>들이 연합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는 체제를 창10:10은 국가<마믈라카>란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 용어는 ‘하나님의 나라’<야훼 말라크>의 이념에 역행하는 인류의 반역을 표현한 것이다. 왕들과 귀족들이 도성을 거점으로 지배권을 행사하는 체제가 곧 세상의 타락한 체제였다. 함의 후예들이 이러한 체제를 구축하고 애굽<미스라임>과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 전역에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선악과를 따먹고 죄 속에 갇힌 이래 인류가 지은 폭력의 문명은 세상의 국가들을 우후죽순처럼 내놓기 시작하였다.
 
2. 폭력과 문명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그곳에서 서른한 명의 왕들을 척살하였다. 여리고 도성을 위시하여 아이 도성과 베델 도성 등 모든 도성을 무너뜨렸다(수12:24). 사사시대를 거치면서 우여곡절을 겪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은 왕정체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판관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강요하였다.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8:5). 사무엘은 왕국체제가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를 누누이 설명해 주었지만 백성의 요구는 완강하였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삼상8:20). 가나안 땅에 세운 하나님나라의 체제는 너무나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세상 왕국의 효율적인 왕정체제를 도입하려고 서둘렀다. 왕국체제에는 노예제의 도입이 반드시 뒤따라올 것이었다. 이것은 역사의 퇴영을 의미하였다. 다윗왕국은 이러한 쓰라린 역사반동의 결과로 성립하였기 때문에 그 멸망의 결과는 명약관화하게 예시된 것이었다. 왕국의 도시들은 필경 우상숭배의 도입을 동반하였고 필경 야훼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스라엘의 왕국은 남북조가 다같이 멸망하는 비운을 맞고 말았던 것이다(왕하24:14).
토라는 처음부터 인류의 문명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평을 가하고 있다. 그 비평이 노리는 목표점은 도시국가이다. 도시의 본질은 폭력의 문명임을 폭로하자는 것이다. 폭력의 본질은 ‘죄’다(하타트, 창4:7). 죄는 폭력의 형태로 역사에 나타난다(네필림, 창6:1~4). 바벨론은 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였다.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은 도시국가 유다왕국에서 포로로 끌려와서 노예노동에 종사하던 자들이 디아스포라였다. 도시의 권력자들이 부리는 폭행은 디아스포라의 무리들에게 가장 무서운 비인간화의 죄악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타국에서 노예의 신세로 전락하였지만 이들 유대인 노예 무리들은 왕년에 유대라는 국가체제에서 상류사회를 점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노예들을 부리면서 살았던 지배자의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왕년에 국가를 지배하던 권력자들이 왕국의 멸망과 더불어 노예로 전락하였다. 그들이 노예가 된 이후에 그 후예들 사이에서 도시와 국가의 폭력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일어났다. 회개의 결과 야훼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고백이 터져 나왔다. 야훼는 히브리인 노예들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이시다(출20:2). 야훼께서 바로 창조주이심을 깨닫고 고백하는 가운데(창1:1)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는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다(스9:8). 이 회개운동이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말씀의 공동체로 정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바빌로니아 제국이나 페르시아 제국이나 이집트 제국과 같은 세상의 나라들은 마침내 야훼 하나님께 심판을 당하여 사라질 운명에 놓여있다.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만이 번성할 것이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예정하신 뜻이다(창1:26). 토라의 영성은 역사의 추이를 꿰뚫어 보고 있다.
국가들은 자국이기주의에 빠진다. 국가의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 국민을 무한경쟁의 아레나에 내몬다. 성서는 세상의 국가들이 벌이는 경쟁이 지구를 멸망으로 이끄는 지름길임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다. 국가들이 재화를 더 많이 획득하려고 경쟁하며 서로에 대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작태는 중단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교회는 어느 나라에 놓여 있든지 간에 자신이 디아스포라로 살고 있음을 자각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곳에 살면서 그 국가의 지배자들과 시민을 향해서 경종을 울려야 한다. 국가의 번영만을 꾀하다가는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라고 성서의 메시지를 한껏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심판과 구원의 메새지를 날마다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행해야 하는 주된 사명이며 이것이야 말고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지고한 사랑의 행위이다. 교회가 통일운동을 추동하는 원리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3. 민족주의
 
근대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열강이 아시아·아프리카 약소국에 대한 침탈을 자행하면서 약소국에서 민족주의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대한제국도 제국주의의 침탈을 겪었으며 해방 이후 북측에서는 반제국주의의 과제가 건국의 이념으로 설정되었다. 남측은 자본주의 진영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민족주의 보다는 더 보편적인 시장의 역학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북측과 마찬가지로 남측에서도 민족주의적 반제국주의 이념이 민주화운동의 진영 가운데에서 펼쳐졌다. 보다 나은 사회를 추구하는 민중민주운동의 진영에서 민족주의는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통일운동에 연대하는 한, 민족주의에 대해서 성서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공부할 수밖에 없다.
‘민족’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고이>이며 그 복수형은 <고임>이다. 이 단어는 창세기 10장에 처음 나오며 네 차례 반복된다(창10:5, 20, 31, 32). 이 용어는 성경에서 ‘족속/백성’ 따위로도 다양하게 번역된다. 혈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공동의 문화를 지닌 부락공동체를 <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도시문명이 발호하였을 때 이들 부락공동체가 해체를 거듭하였다. 부락은 도성의 권역으로 흡수되어 도성의 내용을 구성하는 주체가 되었다. 성서는 이들 민족에 대하여 경고의 메시지를 날리고 있다. 민족들이 한 도성의 지배에 종속되었을 때 그들은 도시국가의 신민을 구성하게 된다. 그 결과 각 민족의 고유한 문화는 도시국가가 제창하는 우상숭배의 이데올로기에 종사하고 말았다. ‘민족’이란 용어는 중립적 개념이지만(창10:32) 그들이 일단 국가권력의 주체로 등장하여서 도시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창출할 때 매우 무서운 폭력자가 된다고 성서는 경고하고 있다(창10:20).
야훼는 고대노예제 사회에서 고통당하는 노예들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이시다(출20:2). 도시의 지배자들이 노예제 체제를 바탕으로 번영을 누릴 때 그 도시의 이데올로기는 우상숭배의 종교로 표현된다. 우상종교는 도시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 각광을 받아 모든 도시들마다 자기네들이 섬기는 고유한 신을 내세우고 있었다(렘2:28). 민족들의 구성원들은 도시국가의 출현을 기점으로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졌는데 하나는 도시의 지배자들이 되어 우상숭배를 주도하였고 또 한 부류는 그 지배자들의 우상숭배에 희생되는 자들로 나누어졌다. 야훼 하나님은 우상숭배체제에 희생당하는 노예들을 그 도성의 지배체제로부터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야훼는 히브리인의 해방자이시며 야훼야말로 우주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민족이 우상이 될 때 민족주의나 인종주의로 왜곡될 위험성이 상존한다. 제국주의의 물결에 맞서기 위해서 민족주의를 절대적 가치로 내세우다가 자칫 ‘민족’이 우상이 되는 불행을 당할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는 민족주의에 대하여 성서적 가치판단을 뚜렷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성서는 모든 피억압 민족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해방하시는 은총 아래에서 서로 사랑하며 상호 돕는 공동체적 관계를 형성할 것을 명령한다. 고난 받는 민족들이 고난 받는 다른 제민족과 연대하여 도시문명과 국가문명이 강요하는 탐욕의 우상숭배를 떨치고 평등과 자유와 사랑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교회는 이 운동을 추동하여야 할 것이며 통일운동도 이 운동의 일환이다.
민족의 보편성을 더욱 신장하기 위해서 교회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메시지를 날마다 확인하고 선포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남녀나 노유나 인종의 구별이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창1:26~27).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을 볼 때마다 하나님을 떠올리게 된다는 뜻이다. 사람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을 대하듯 공경하고 받들 것을 성서는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고대사회에서 도성민은 도성 바깥에서 사는 민족을 야만인으로 천시하였으며 가축을 이끌고 이리저리 유리하는 유목민들도 또한 천한 민족으로 경멸하였다(창46:34). 도시문명이 낳은 헬레니즘 철학에서는 도성 밖에 사는 자연인을 야만인으로 규정하였으며 그들은 마땅히 노예들이 되어 봉사할 운명을 타고 났을 뿐 영혼이 없는 동물로 격하시켰다. 도성 바깥 들판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을 노예노동에 종사하는 천민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차별사상은 도성 안의 유한계급의 엘리트들이 지어낸 사상이었다. 성서는 이들의 사상을 우상종교의 악한 사상이라고 규정한다.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 공동체 안에서는 노예제가 영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성서는 규정한다. 전쟁노예이건 채무노예이건 간에 모든 노예는 제 칠년에 해방되어야 한다(출21:1~7). 매 칠 년마다 면제년을 선포하여 부채를 탕감해줌으로써 야훼의 백성이 채무노예로 전락하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신15:1~11). 성서의 평등법은 야훼 하나님과 맺은 계약이기 때문에 반드시 준행해야 하는 철칙이었다. 성서를 우리는 헬레니즘에 반대되는 헤브라이즘의 정수라고 정의할 수 있다.
유대왕국의 지배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다. 예루살렘 도시를 유지하고 유대왕국을 번영하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세상의 여느 국가들처럼 노예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빌로니아 제국이 쳐들어 왔을 때 예루살렘 당국자들은 크게 회개하고 언약법에 적힌 대로 히브리 노예들을 다 해방시켜주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침략군이 물러갔다. 그 후에 권력자들은 다시 노예들을 잡아들여서 노예제를 복구하였다. 이것이 야훼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가장 무서운 범죄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서 유대왕국이 멸망을 당했다고 예레미야는 절규하였다(렘34:8~11).
세계화 시대는 시장의 지구화를 통하여 인류의 보편성과 공동성을 창출하려고 한다. 민족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국가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시장의 보편화는 자본을 숭배하는 맘몬숭배의 질곡에 빠지기 십상이지만, 교회는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민족주의를 너머서 인류공영의 보편적 사랑을 권장하는 성서적 가치관을 홍보함으로써 시장의 맘몬적 속성의 한계를 넘어가야 한다. 교회는 도시들과 국가들의 권력 불균형에서 생기는 모든 인종차별과 성차별, 그리고 국가 안에 상존하는 빈부격차로 인해 생기는 신분의 차별을 영구히 철폐하도록 추동할 일이다.
한반도 배달민족의 통일은 이러한 성서적 가치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통일이 민족번영이라든가 국가부강의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politics)는 애초에 도시의 경영학으로 생겨났기에 도시국가의 체제를 고수한다는 입장 위에서 펼쳐진다. 정치의 목적은 자국의 국가를 부강한 국가로 만드는 데 갇힐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도 마땅히 하나의 정치적 이념으로 이데올로기로 변한다. 그러나 성서는 도시라는 폭력의 문명이 가인에게서 기원했으며 도시들의 연합체로서의 국가는 함의 후예인 니므롯에 의해서 건국되었음을 주지시키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국가체제를 무너뜨리는 미래의 대안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현실참여는 정치참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와 교회는 매우 다른 목적으로 성립되었다. 정치는 도시와 국가의 체제를 고수하고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일에 종사한다. politics는 polis를 운영하는 방법론이다. 그러나 교회는 폭력을 자행하는 현재의 도시와 국가의 체제를 부정하고 제삼의 대안사회를 추동하는 운동으로 자신을 사회 속에서 전개한다. 사랑의 공동체로 현실화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의 모든 피억압 민족들을 해방시켜서 사랑하는 주체로 세우려고 나선다. 폭력으로 지탱하고 있는 모든 국가체제를 무너뜨리는 성령의 능력이 교회의 공동체 운동으로 나타난다. 한반도에서도 교회는 통일운동을 통해 남측과 북측의 권력체제를 무너뜨리고 전혀 다른 제삼의 공동체를 세워 나아가도록 사회를 이끌어야한다. 교회는 대안사회의 전망을 공유하면서 참된 사랑의 공동체로서 자신을 민족의 현실 앞에 시현할 것이다.
 
4. 대안사회를 위한 통일운동 - 국가를 넘어서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두드러지게 사용되는 용어는 ‘코스모스’란 단어다. 한글개역은 이것을 ‘세상’이라고 일관되게 번역했다. 헬레니즘에서 <코스모스>는 도시를 하나의 소우주에 비유하여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의미하는 용어였다. 헬레니즘 시대를 살았던 도시문명의 예찬론자들은 도시생활에서 질서를 창조하고 조화로운 삶을 구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코스모스는 도시문명에서 발달한 가치관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요한은 이 코스모스란 헬레니스트 용어를 사용하여 당대의 도시문명과 로마제국을 질타하고 있다. 요한신학의 문명비판의 배후에는 오경에 비평하는 도시문명이 깔려 있다.
참 빛이 세상에 와서 비추었으나 죄로 물든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고 빛보다도 어둠을 더 사랑했다(요1:9~10; 3:19; 8:12; 9:5; 11:9: 12:46). 예수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 양이다(요1:29). 하나님은 죄 많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요3:16~17; 10:36; 11:27; 12:47; 요일2:2; 4:9, 14). 그러므로 예수는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요4:42).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달하신다(요8:26). 말씀은 하나님의 주신 떡이다. 말씀이신 예수의 살을 먹는 자는 죽음에 갇힌 세상에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요6:33, 51). 그러나 예수가 세상을 보고 악하다고 증언하므로 세상은 예수를 미워했다(요7:7; 15:18~19; 17:14; 요일3:1, 13). 세상은 아래에서 났지만 예수는 위에서 났기 때문에 예수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요8:23; 13:1; 14:17, 19; 16:28; 17:5~6, 11, 13, 24).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하며(요3:3)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요일2:15~17; 4:3~6) 세상에 대하여 한 알의 밀알로 죽어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요12:25). 예수로 인해서 세상의 왕이 쫓겨나며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요12:31; 16:8, 11; 요일4:19). 예수는 이미 세상을 이기셨으므로(요16:33; 요일5:4~6) 하나님의 백성에게 세상과는 다른 참된 평화를 주신다(요4:27). 예수는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서 늘 기도하시며(요17:9), 믿는 사람들을 세상 속으로 파송하신다(요17:18, 21, 23). 참된 왕이신 예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18:36~37).
이상의 문장에서 ‘세상’이란 용어를 도시나 국가로 바꾸어 읽으면 그 의미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성서는 가르친다. 가인의 에녹도성 이후 도시문명은 노아시대의 대홍수 심판으로 종식되었으나 심판 이후에 다시 일어난 함의 니므롯 도시국가들이 지금까지 세상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이들 국가들의 폭력으로 인하여 망가졌다고.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도시국가들을 모조리 없애버리실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늘에서 하나님 자신이 만드신 새로운 도시를 이 땅에 내려주신다. 그 도시에는 생명수가 도심의 중앙통을 강물처럼 흐르며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들이 길가의 가로수들로 푸르게 자랄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 하나님의 도성이 아름답게 완성된다. 이와 같이 창세기로부터 요한신학을 거쳐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도시들과 그 도시들의 연합체로 성립한 국가들이 심판을 받을 것임을 성서는 일관되게 예언하고 있다. 국가들이 폭력으로 무장하여 전쟁을 일삼아왔기 때문이다.
교회는 국가무장론의 필연성을 현실로 인정하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통일운동도 남측과 북측이 다같이 무기를 내려놓고 군대를 해산하며 대형화된 국가체제를 작은 공동체들로 잘게 나누어 지방자치의 민주체제로 다시 세우는 전망을 제시할 때 교회의 사회참여운동의 내용이 될 수 있다. 교회는 부강한 통일국가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를 비무장 영구평화지대로 선포하고 세계에서 가장 먼저 대안사회를 향하여 국가체제를 해체하는 전망을 통일운동진영에 제시해야 할 것이다.
 
5. 전쟁과 평화: 거룩한 전쟁
 
국가들과 그 국가의 기업들 간에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어서 군비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다. 군수산업이 발전하여 무기생산량이 과잉되고 무기개발이 첨단화되었다. 한편 생산한 무기를 소비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여 약소국 약소민족들 사이에 전쟁을 조장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한반도에서도 무기산업의 메카니즘에 의한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성서의 메시지를 크게 선포해야 할 것이다.
성서는 야훼의 거룩한 전쟁(聖戰)을 선포한다. 이에 대한 일반인의 오해가 있다. 야훼 하나님은 전쟁을 유발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폭력의 하나님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교회는 성서에 나타난 ‘야훼의 거룩한 전쟁’ 사상을 올바르게 주석하여 그 오해를 잠식시켜야 한다. 야훼의 거룩한 전쟁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헤렘~r,xe>에 있다. 헤렘은 야훼께 바친 물건으로서 전쟁에서 개인이 사취해서는 안 되는 전리품이다. 여리고 도성을 함락시켰을 때 아간이 금덩어리와 은덩어리와 시날산 외투를 사취하여 숨겼다가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자 마침내 들통이 나서 죽임을 당했다(수7:21). 판관 기드온도 전리품을 사취하는 죄를 범했으며, 다윗도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후 전리품을 사취하는 죄를 범했다.
세속적인 전쟁은 전리품을 취득하고 포로를 노예로 끌어오며 남의 영토를 빼앗아 소유하려는 목적으로 발발한다. 전쟁에서 얻은 소득을 가지고 용병으로 고용한 군사들에게 보상으로 삯을 주어야 한다. 아브라함 시대에 그돌라오멜 연합군이 소돔 도성 연합군과 전쟁을 벌였을 때에도 전쟁의 목적은 재화의 취득에 있었다. 조공을 바치지 않으려고 하자 종주국이 쳐들어 온 것이다. 롯과 그 가족은 소돔 도성의 온 성민들과 더불어 포로로 잡혀서 끌려갔다(창14:12). 아브라함이 추격하여 모든 빼앗긴 것들과 롯과 그 가족을 되찾아 왔으나 정작 아브라함 자신은 전리품을 하나도 사취하지 않고 소돔 왕에게 돌려주었다(창14:23). 아무 전리품도 취득하지 못하게 하면 재물에 뜻을 둔 세속적인 전쟁은 의미가 없고 용병의 고용도 불가능하니 전쟁이 성립하지도 않는다.
야훼의 거룩한 전쟁은 세상의 전쟁과 구별된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여 평화를 이루려는 목적으로 싸우는 사상과 믿음의 전쟁이다. 야훼의 거룩한 전쟁은 무기가 아니라 오로지 ‘소리’<콜>로 싸우는 전쟁이다. 즉 말씀으로써 원수의 도성을 무너뜨리는 구별된 전쟁이다. 야훼 하나님은 말씀의 전쟁에서 늘 승리를 거두시는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전쟁에 임한다는 신학은 오경에 가득 보도된다. 오경의 전쟁이야기들은 모두 야훼의 거룩한 전쟁이다. 신명기법의 전쟁법은 징병에서부터 세상의 징병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한다(신20:5~8). 새 집을 건축한 자와 포도원을 수확을 앞두고 있는 자와 이제 약혼한 자, 그리고 겁이 나는 자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규정한다.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가 야훼의 전쟁에 합당하다. 기드온의 정병은 모두 소심하고 폭력에 무능한 자들이었다. 신명기의 전쟁법과 기드온의 정병 이야기도 역시 야훼의 전쟁이 보통의 전쟁이 아니라 말씀으로 치루는 전쟁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성서는 낭만주의적인 평화를 말하지 않는다. 세속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에 의해서 계속 부정당하는 추이 속에 세계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고 성서는 외친다. 교회는 이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폭력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의지하여 승리를 거두는 방법을 선택한다. 야훼의 거룩한 전쟁은 말씀의 전쟁임을 오경은 분명하게 제시한다.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한 교회의 선교도 오로지 말씀으로만 나아가야 야훼의 거룩한 전쟁이 오늘날에도 현시될 것이다. 거룩한 전쟁을 치룰 때 북측과 남측의 죄성을 극복하고 교회는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국가권력이 추동하는 어떠한 정치적 프로그램에도 궁극적인 기대를 걸어는 안 된다.
 
6. 계약법에 나타난 샬롬 : 손해배상법
 
시내산에서 주신 하나님의 법 중에 소위 ‘계약법’이란 법이 출애굽기 20:22~23:33에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법이 규정되어 있다. 갑이 을에게 손해를 끼쳐서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 관계를 정상으로 회복하기 위해서 을이 입은 손해를 갑이 갚아주어야 한다는 배상법이 출21:28~22:15[히14]에 나온다. 이 법문에는 특이하게도 동사 <샬람>의 피엘형이 무려 14개 구절에 연달아 18회 나 언급된다. 이 동사는 한글개역에서 ‘보상·배상하다/갚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히브리어-영어 사전은 repay, reward, make amend라고 정의한다. 피해자는 보상을 받음으로써 가해자와 화해할 수 있다.
나귀가 구덩이에 빠졌을 경우 그 구덩이를 판 땅의 소유자가 나귀 값을 보상해 주어야 한다(출21:34). 소가 다른 소를 받아 죽였으면 그 소의 임자가 죽은 소의 값을 갚아 주어야 한다(출21:36). 소나 양을 훔쳤으면 소는 다섯 배, 양은 네 배로 갚아 주어야 한다(출22:1[히21:37]). 도둑은 몸으로라도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출22:3~4[히2~3]). 남의 농작물을 망치면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출22:5~6[히4~5]). 맡긴 물건이 분실되거나 훼손되었을 경우, 또 세를 낸 물건이 망가지거나 세를 낸 짐승이 다치거나 죽었을 경우에도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출22:9~15[히8~14]). 배상함으로써 양자 사이에 관계는 정상으로 회복한다. 이것이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성원들이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배상법은 화해신학을 겨냥한다. 동사 <샬람>에서 화목제물이라는 명사 <쉘렘> 내지는 <쉴라밈>이 나왔다. 하나님의 나라는 화목제물로 인하여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가 회복된 상태를 말한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이지러진 관계가 올바르게 회복될 때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는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셨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습니다’(롬3:25). 여기서 ‘화목제물’에 대한 단어로서 바울은 그리스어 <힐라스테리오스>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 명사는 성막의 지성소에 안치된 언약궤의 뚜껑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카포렛>의 번역어이다(출25:17~22). 바울은 예수를 통해서 모든 죄를 대속 받고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신학을 표현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을 우리가 지불해야할 배상금으로 피해자 하나님에게 갚아주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깨어진 관계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다 올바르게 회복된다.
남측과 북측으로 갈라져서 대립하는 한반도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룸으로써 화목한 관계로 회복할 수 있다. 어떠한 정치적 프로그램으로도 남북의 참된 화해를 이끌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통일이 된다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참된 관계로 회복되지 않으면 결국은 죄로 물든 가인의 도시와 같은 국가로 남과 북이 다 전락하고 말 것이다. 교회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로 올바로 서야하며 교회가 진실한 믿음으로 자신을 한 알의 밀알로 던져서 십자가에 죽어야만 남북이 서로에게 입힌 상처가 아물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올바로 서기 위해서는 남측에 만연한 자본주의의 죄악, 곧 금권숭배 물질만능주의 우상을 훼파하고 오로지 한 분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신앙으로 회복해야 한다. 순결한 교회만이 하나님의 미래를 열 수가 있다.
 
7. 에스겔의 통일 환상
 
에스겔 37장에 통일의 환상이 나온다. 이것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철저히 멸망을 당한 후에 포로지에서 에스겔에게 주어진 것이다. 해골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에 하나님의 생기<루악흐>가 불어와 그 뼈들 속에 들어갔다. 그러자 죽은 뼈들이 살아난다. 이로써 죄인들은 여호와께서 참된 하나님이신 줄을 알게 되었다(겔37:6). 생기가 마른 뼈들에 불어오자 새 이스라엘이 창조되었다(겔36:26~27; 37:12).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과 마찬가지로(렘32:33), 에스겔의 환상에서도 새 언약의 백성이 새 시대에 새롭게 정립한다. 오래 갈라져 서로 싸우던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통일을 이룩하여 하나가 된다. 유다 막대기와 이스라엘 막대기가 하나가 되어 한 분 하나님을 임금으로 모시고 더 이상 두 민족 두 나라로 나뉘지 않고 한 민족 한 나라가 되어 한 분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다(겔37:22).
참된 통일은 세상 권력체로서의 남왕국과 북왕국이 모두 철저히 파괴된 사건을 전제하고 있다. 왕국체제가 철저히 파괴되고 멸망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로 통일될 수 있다. 통일되는 그 나라는 유일신 하나님을 모시고 모든 우상숭배가 사라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전히 새로운 공동체로 성립한다. 에스겔 환상은 세상국가의 폭력을 바탕으로 시도하는 모든 통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으며 반드시 실패할 것임을 보여준다. 군대의 힘을 믿고 군비경쟁을 일삼으며 실력을 바탕으로 압박함으로써 통일을 이루려는 모든 시도는 포기되어야 마땅하다. 폭력체로서의 정권은 완전히 박살나고 무너질 것이다. 그 후에 통일은 참된 전망이 열릴 것이다.
 
나가는 말
 
토라는 국가의 해체를 권고한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왕들을 모조리 제거하였다. 가나안 땅을 즐비하게 세운 도시국가들을 다 무너뜨리고 그곳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공동체 연합체제를 결성하였다. 야훼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고대도시국가들의 신전에 봉안한 만신전을 모두 철폐하였다. 창조주 하나님은 유일신이므로 만신전의 위계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모든 도시국가들마다 저마다의 신을 모시고 있었고 도시국가의 위계질서가 곧 만신전의 위계질서로 신전에 표현되었다. 가장 강력한 종주국의 도시에 최고신이 봉안되었다. 야훼는 국가를 수호하는 최고신이 아니었다. 야훼는 모든 신들을 초월하여 홀로 계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다신교의 도시들에서 고통당하는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신 오직 한 분밖에 없으신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야훼의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도시나 국가의 체제를 갖추거나 그 체제에 예속될 수가 없다. 야훼의 백성은 세상의 국가체제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공동체의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야훼의 법은 ‘사랑’이란 한 단어로 요약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축으로 펼쳐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는 세상의 즐비한 국가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랑의 공동체로서 살아가야 한다(요15:9~12). 이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이유다. 성서는 교회로 하여금 국가에 종노릇하지 말고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 봉사하지 말 것을 권면한다. 교회는 국가를 무너뜨려야 한다. 부르조아 독재체제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 모두 폐지해야 한다. 국가란 체제 자체가 폭력으로 성립한 체제이며 폭력이 없이는 국가가 무너질 것이다. 교회는 폭력이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폭력에 희생된 예수의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폭력에 희생당한 그리스도가 결국 승리하고야만다는 진리를 입증한 사건이다.
교회는 유일신 신앙을 굳게 견지한다. 물질주의 우상숭배의 다신론으로 나타난 이념 위에 현실 국가들이 세워져 있다. 교회는 국가의 폭력적 위계질서를 말씀선포와 기도로써 무너뜨려야 한다. 교회는 한 하나님 아래 온 인류가 한 가족으로서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선포하여야 한다. 이것이 참다운 통일운동의 방법론이다.
교회의 선교는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수많은 작은 사랑의 공동체들을 국가의 대안체제로 세워나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미래의 전망이 보인다. 세계의 미래는 오로지 사랑의 공동체 설정의 여부에 달려 있음을 교회는 날마다 분명하게 선포해야 한다. 통일운동의 처음과 끝도 공동체운동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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