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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정주진 박사(평화학 박사) 강좌 원고

관리자 2014-04-16 (수) 11:27 8년전 2282  
  정주진.hwp (47.5K), Down : 18, 2014-04-16 13:18:44
 
 
한반도 평화와 기독교인
 
정 주 진 (평화학박사, 평화교육자)
 
 
한반도 평화,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한반도 평화’는 묵직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단어다. 이 말은 제일 먼저 남한과 북한의 평화적 관계를 생각나게 하고 더 나아가 남한과 북한의 평화적 공존을 상상하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말은 진한 정치적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공허한 구호처럼 들리기도 한다. 단어적 의미를 만족시킬 수 있는 실천이 동반되지 않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소비된 까닭에 오히려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한반도 평화’에 대해 우리가 알고 느끼는 것들이다.
 
한반도 평화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해하는 또는 쓰는 사람에 따라 내포하는 의미가 달라진다. 어떤 사람들에게 한반도 평화는 한반도 안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다른 두 나라로 존재하고 있는 남한과 북한이 적대적 관계를 적절한 수준에서 관리하며 무력 대결 없이 공존함을 의미한다. 또는 남과 북이 상호 관계성을 인정하고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협력도 하면서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고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남과 북이 ‘상호 의존’과 ‘공존’을 강조하면서 상호 발전을 위해 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 말을 이해하기도 한다. 첫 번째 경우는 상호 파괴와 인명 손실을 가져오는 무력 충돌만 예방하며 현 상황을 유지하는 아주 소극적인 이해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경우는 각기 자신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고 이익 추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제한적으로 상대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이해와 접근은 단기적인 시각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경우는 앞의 두 개의 비교하면 중.장기적인 시각에 기반한 이해와 접근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상대의 이익이 나의 이익도 될 수 있다는 전향적인 생각에 기초하고 현재보다는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진다.
 
평화 연구의 시각에서는 한반도 평화를 크게 두 개의 순차적 단계를 포함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첫 단계는 남북 사이의 불안한 무력 대치 상황을 합의를 통해 종식시키고 최소한 상호 파괴가 일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상황을 통제하는 것을 말한다. 평화의 개념에 따르면 이것은 ‘소극적 평화’를 말한다. 소극적 평화는 물리적 힘을 통해 신체에 위협을 가하는 폭력이 없는 상황을 말하며 인간의 생명과 신체적 안전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평화가 성취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소극적 평화의 상태는 현재보다 나은 삶의 질과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상호 대립과 파괴를 야기한 근원적 문제를 해결할 접근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한계다. 때문에 무력 충돌을 야기한 군비 증강이나 무기 경쟁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무력에 근거한 힘의 균형을 강조하는 모순적 상황을 만든다.
 
둘째 단계는 상호 이해와 인정을 지나 상호 발전, 공동의 미래, 평화적 공존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평화의 개념에서는 ‘적극적 평화’로 가는 긴 여정을 의미한다. 적극적 평화는 신체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는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그런 폭력의 근원이 되는 구조와 문화를 통한 폭력까지 모두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한반도 평화와 관련지어 설명하자면 군비 증강과 무기 경쟁을 야기하는 정치 사회 구조와 법체계는 물론 무력 대결과 힘에 근거한 불안한 평화를 정당화하는 이론, 사상, 정치 사회 담론 등도 모두 사라지고 평화적 공존에 초점을 맞춘 정치 사회 구조와 문화가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어떤 평화가 더 바람직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현실적으로 직면하는 도전은 소극적 평화를 넘어 적극적 평화를 추구할 사회 차원의 목표와 의지,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공감대와 비전의 공유, 그리고 그런 환경 형성을 위한 복잡하고 지난한 절차를 포용할 사회적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어떤 평화를 추구하며, 그 과정을 어떻게 진행시킬 것이냐는 ‘한반도 평화는 누구를 위한 평화여야 하는가?’의 질문과 통한다. 이 질문을 앞서 얘기한 평화의 개념과 연결시켜 해석해보면, 먼저 소극적 평화는 현 상황 유지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것은 국가 사이의 전쟁, 또는 내전이나 그에 준하는 무력 충돌이 끝난 후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전쟁과 무력 충돌을 야기한 원인들의 해결 없이 예전의 상황이 그대로 유지되는 상황을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언제든지 무력 충돌이 재발될 수 있고 무력 충돌이 조기 중단된다 해도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가 계속된다. 이것은 사회 구성원들, 특히 약자들에게 있어서는 절망적인 상황이며 그들의 원하는 평화는 더욱 아니다. 소극적 평화가 이런 부정적 상황의 반복이 되지 않게 하려면 두 가지 전제가 따라야 한다. 하나는 전쟁 및 무력 충돌이 힘에 의한 승리가 아니라 평화적 방법에 의해 중단돼야 하고, 다른 하나는 폭력의 중단과 함께 문제를 야기한 근본적 사회 문제의 개선이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언급한 적극적 평화는 현재의 상황에 토대를 두고 미래를 목표로 삼는 것을 말한다. 적극적 평화는 모든 폭력이 사라진 가장 바람직한 상황을 말하지만, 해석 및 실천과 관련해서는 보통 그 바람직한 상황을 위해 현 상황을 진단하고, 중.장기적 목표와 모순되지 않는 단기적 목표를 설정해 성취해 가며, 단계마다 참여를 통해 성과를 평가하고 절차를 수정해가는 과정에 더 초점이 맞춰진다. 단기적 목표는 적극적 평화의 성취를 염두에 둔 소극적 평화의 달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평화적 방법에 의한 소극적 평화의 달성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 된다. 중.장기적 목표 설정 및 성취와 관련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와 공동 논의가 과정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것은 무력 충돌을 야기한 근본적인 원인을 개선하기 위해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모든 사람들의 성찰과 필요를 경청해 바람직한 미래의 구상에 포함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접근은 과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특별히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와 공동 논의는 그들이 원하는 평화가 무엇인지 드러나게 하고 그들이 원하는 평화를 성취하기 위한 포괄적 절차의 구상을 가능하게 한다.
소극적 평화의 부정적 반복 상태는 우리의 현 상황을 말해준다. 휴전협정 이후 지난 60여 년 동안 한반도에서는 무력에 기초한 대결과 간헐적 무력 충돌의 상황이 반복돼 왔다. 남북 사이의 일시적인 관계 개선과 대화가 이뤄지긴 했지만 지속성을 갖지 못했다. 긴 시간대에서 보면 그런 따뜻한 기류는 아주 잠깐의 휴식 정도에 가까웠다. 물론 그런 상황의 반복도 없는 것보다는 낫고 장기적으로 다소 긍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것도 남북의 대결과 무력 충돌을 뛰어넘을 지속적 파급력을 가지지 못했다. 결국 장기적으로는 생명과 신체의 안전 보장이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되지 않는 폭력적 상황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폭력적 상황으로 인한 피해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소외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물론 남북의 대결과 무력 충돌이 중단되고, 대결적인 구조와 문화에서 야기된 폭력이 사라지며, 남북 대결 상황이 야기한 모든 억압과 통제가 사라지는 적극적 평화에 대한 비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비전은 소수 집단의 목소리로 머물러 있고 주류 담론에서 소외돼 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한반도 평화’는 여전히 일부 정치인들, 전문가들, 운동가들의 전유물처럼 취급되고 있다. 이것은 한반도 평화 담론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지도 않고 공유되지도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배타적인 담론이 형성되고 그에 따라 한반도 평화 문제가 대중의 필요를 반영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한반도 평화 담론이 지나치게 정치화돼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난 60년 동안 남북문제와 관련 정책을 정치권이 독점해 왔음을 의미한다. 대중의 필요가 아닌 정치 문제에 초점이 맞춰진 담론은 대중을 소외시키고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 다른 이유는 평화 담론이 거시적 문제에 매몰돼 있기 때문이다. 평화는 현실의 문제와는 동떨어져 정치 체계, 군사 문제, 관계 개선, 경제 협력, 정부 차원의 대화 등 거시적 문제만 다루거나 그것을 우선시하고 있다. 이런 접근은 두 가지 문제를 낳는다. 하나는 대중의 접근을 힘들게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때가 되면 바뀌는 정권의 성향을 쫓기 때문에 지속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반도 평화가 우리 사회 내부의 대립과 분열을 강화시키는 담론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가 대중의 삶의 문제와 연결되지 않고 정치 문제와 거시적 문제에 초점을 맞춘 구호로 전락해 이념 대립의 도구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한반도 평화 담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앞에서 제기한 ‘한반도 평화는 누구를 위한 평화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심각하게 고민해 볼 때이다.
 
한반도 평화, 누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다. 한반도 평화가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현실적 목표고, 남북의 구분이 없이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현재와 미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일부 계층이나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라면 그것을 만들어가는 역할의 중심에는 당연히 대중이 자리 잡아야 한다. 이것은 누구도 거부하기 힘든 원칙이다. 그러나 지난 60여 년 동안 이런 원칙은 철저하게 무시돼 왔다. 때문에 원칙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논의나 방법의 모색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정치권은 물론 시민운동도 한반도 평화 담론을 마치 자신들의 전유물처럼 여기며 엘리트 담론으로 만들어버렸고 대중도 그런 배타적 담론에 굳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주제의 성격과 복잡성 때문에 대중이 스스로 거리두기를 선택한 측면도 있다. 어쨌든 결론은 명분상으로는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로 언급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지금까지 대중에게 담론의 형성 및 현실화 모색과 관련해 아무런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고, 대중의 역할이 제대로 고려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대중이 소외되는 한반도 평화 담론과 접근은 치명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무엇보다 정당성을 확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성찰, 문제 제기, 필요 등이 반영되지 않는 한반도 평화는 합리화되기 힘들뿐만 아니라 의미도 희석될 수밖에 없다. 물론 북한의 경우 대중을 참여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민주국가인 남한에서조차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대중이 소외된다면 정당성을 확보하기 힘들뿐만 아니라 담론의 질과 내용 면에서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둘째는 정권에 의한 정치화를 극복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또한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것처럼 한반도 평화는 정권의 구미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다른 접근을 동반하며, 결과적으로 내용의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5년마다 바뀌는 정권의 입장과 이익에 휘둘려 왔다. 결국 한반도 평화의 전제가 되는 남북 관계의 개선, 교류의 확대, 상호 이해의 증진 등은 모두 일회성 행사나 단기적 성과에 머물며 장기적 구상에 기여하지 못했다. 셋째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진정한 평화를 실현시킬 수 없다는 점이다. 한반도 평화는 모두의 평화가 되어야 한다. 일부 엘리트 계층이나 기득권층의 입장과 이익을 대변하는 한반도 평화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라 할 수 없다. 물론 누구도 한반도 평화가 소수의 평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수의 대중이 소외된 한반도 평화 담론과 접근은 결과적으로 소수의 평화, 또는 기득권층의 평화가 될 수밖에 없고, 결국 그것은 보편적 의미의 평화와 동떨어진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가장 중요하게는, 평화 연구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중이 소외되는 과정은 그 본질상 평화적 과정이라 할 수 없고, 때문에 이론적으로 합리화될 수 없으며, 현실적으로 절대 대중을 만족시키는 평화를 성취할 수 없다. 이런 연유로 평화 연구의 입장에서는 대중이 배제된 한반도 평화 담론과 접근을 절대 수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반도 평화를 만드는데 있어 대중이 중심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접근이 이뤄져야 하는가? 핵심은 절차와 내용에 있어 지금의 하향식(top-down) 접근에서 벗어나 상향식(bottom-up) 접근을 만드는 것이다. 하향식 접근은 일방적이고, 부과적이며, 비민주적이다. 이런 접근의 가장 큰 문제는 의도가 있든 없든 결국 정권과 일부 기득권층의 입장과 이익만 대변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대중의 입장 및 이익은 배제되고, 때문에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지 못하며, 결국 지속성을 갖지 못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는 정책 접근은 정당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에 하향식 접근이 가져오는 최선의 결과는 일시적 분위기 전환이고 최악의 결과는 대중의 외면을 받고 폐기되는 것이다.
 
현 정부는 시작과 함께 ‘비무장지대(DMZ) 평화공원" 조성 계획을 발표했고 올해 초 통일부는 2014년 내에 조성 계획을 완료하고 북한에도 제안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계획을 두고 경기도 파주시와 연천군, 강원도 철원군과 고성군이 유치전에 뛰어 들어 이미 위원회를 구성했고 서명운동도 벌이고 있다. 정부는 북한과의 사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계획을 발표했고, 지방자치단체는 한반도 평화가 아니라 단지 지역 개발과 경제적 특수를 기대하며 김칫국을 마시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국민은 실현가능성을 믿지 않고 그 취지에도 공감하지 않는 것 같다. 또한 다수는 새로운 정부가 내놓는 전시 정책이라 생각하는지 아예 관심조차 없다. 절차나 내용 면에서 정당성을 가지지 못하는 이 일은 대북 정책 홍보용으로 전락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밝힌 ’통일대박‘ 주장도 한반도 평화의 방향성에 대한 사회의 합의는 물론 북한의 입장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주장이었다. 홍보용이었다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뒀지만 진심이었다면 대중과 북한에게 의미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소통 실패작이라 할 수 있다.
하향식 접근의 가장 큰 특징은 내용에 있어 주로 거시적 문제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정치, 경제, 군사 문제, 관계 개선, 교류 확대 등이 핵심 현안이 된다. 이것은 하향식 접근의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물론 다룰만하고 다뤄야 하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거시적 문제는 주로 정치 체제와 국가 안보에 초점이 맞춰지고, 나아가 정권과 기득권층의 이념과 목적에 토대를 두기 때문에 흔히 국민 개개인의 안전과 삶의 문제는 정치 체제 유지와 국가 안보 우선이라는 명분하에서 희생되곤 한다. 이와 같은 치명적 한계를 극복하고 절차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길은 결국 상향식 접근을 만드는 길 밖에 없다.
 
가장 이상적인 상향식 접근은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 대중이 문제를 제기하고, 현안을 찾아내며,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다. 물론 대중이 중심에 서는 이런 접근의 전제는 대중이 스스로 중심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 인식,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반도 평화 담론과 제한적 실천을 일부 정치인, 지식인, 운동권 그룹이 주도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대중은 아직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점은 우리가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문제다. 대중은 전체적으로 역량을 형성시킬 적절한 기회를 갖지 못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항상 담론 형성과 실천에서 주도적 역할은커녕 제대로 된 참관자 역할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다른 한 편으로 대중의 역량, 인식, 의지의 부족은 대중을 배제시키는 핑계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동안 정치와 사회 차원에서 대중을 참여시키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적극적 방법이 모색되지 않았고,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이해와 분석의 기회가 제공되지 않았으며, 대중과 함께 정보가 공유되지 않았다는 점은 그런 핑계가 설득력을 가질 수 없음을 말해준다.
 
대중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상향식 접근이 이뤄진다면 지금까지 외면됐던 현안들이 한반도 평화 담론에 적극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념적 분단이 심한 우리 사회의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적어도 국가와 영토 보전에 초점을 맞춘 국가안보에 더해 개인의 총체적 안전을 강조하는 인간안보(human security)가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군대와 징집제의 문제, 민통선 지역 주민의 안전 문제, 금강산 관광과 고성 주민들의 경제적 안전 문제, 개성 공단과 노동자 및 기업의 문제, 이산가족 상봉 등이 우선적 사안으로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상향식 접근은 거시적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남북 관계 악화와 군사적 긴장은 개인 안전의 문제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고, 민주주의 국가 정부의 국민 보호 우선 의무와 연결될 것이며, 선거철마다 등장하는 정치권의 이념 논쟁 또한 대중의 관심과 필요에 맞춰 사활을 달리할 것이다.
 
상향식 접근은 글머리에서 언급한 ‘한반도 평화, 누구의 평화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된다. 대중의 참여가 빠진 한반도 평화는 지금까지 정치적 수사와 구호로 머물렀고 방향성도 잡지 못한 채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다. 때문에 남북 관계는 점진적 발전이 담보되지 않고 남북의 평화적 공존은 그냥 ‘꿈’으로 머물러 있다. 대중의 참여가 담보되고 독려되는 한반도 평화 담론이 있어야만 한반도 평화는 현실적 목표가 될 수 있다.
 
기독교인의 역할과 실천 과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한국기독교장로회 등 진보적 한국교회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평화통일운동에 있어 선도적 역할을 해오고 있다. 민주화가 되기도 전인 1980년대에 통일에 평화를 접목시킨 것도 교회였으며 해외교회 및 국제사회와 한반도 평화 현안을 꾸준히 공유해 온 것도 교회였다. 한반도 평화는 여전히 교회가 사명감을 가지고 다루고 있는 가장 핵심 주제 중 하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 교회가 해 온 역할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많다. 그러나 비판적 평가를 위해 한계를 지적해보면 크게 세 가지를 언급할 수 있겠다. 첫째는 교회의 한반도 평화 담론과 접근은 사회의 그것과 거의 차별성이 없다는 점이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사회 담론과 접근을 답습하는 면을 보이기도 한다. 교회의 담론과 접근 역시 정치권 및 시민운동과 비슷하게 교회 안의 일부 지도층과 소수 그룹의 전유물이 돼 왔다.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교회와 사회의 대중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정치권 설득에 주력했다. 때문에 대중 역량, 인식, 의지를 형성하는데 기여하지 못했고 사회 담론과 마찬가지로 대중을 소외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의 분열과 대립을 악화시키는데 기여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한반도 평화 담론의 확산에 기여하지 못하고 대중이 중심 역할을 하도록 독려하는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교회가 종교적 가치에 토대를 두고 평화를 강조하지만 실천적인 면에 있어서는 참여가 중심이 되는 평화적 과정에 대한 이해와 원칙이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말해준다.
 
둘째로 한반도 평화 담론과 접근으로 교회도 설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반도 평화 담론은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 내의 분열과 단절을 오히려 심화시켰다. 이것은 교회 안의 한반도 평화 담론이 사회의 그것과 차별성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일부 지도층과 진보적 목회자 운동에 머물러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권의 그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한반도 평화 담론과 캠페인은 소수 그룹의 주도로 이뤄지고, 교회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으며, 때로 일회성 사건이나 홍보용 행사가 되기도 한다. 결국 한반도 평화는 교회 내에서도 대부분의 평신도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 교회 내 대중의 역량, 인식, 의지는 10-20년 전과 별다른 변화가 없다. 이것은 교회가 강조하고 한반도 평화의 근간이 되는 보편적 평화를 교회 안에서조차 실현시키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셋째로 기독교적 평화의 가치에 근거해 무력 대결, 무기 경쟁, 전쟁 가능성, 무기 감축, 국방비, 군의 역할 등 남북 대결을 야기하고 전 국민의 안전과 번영을 위협하는 근원적인 문제들을 조직적으로 다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민감한 주제들은 종교적 가치에 근거해 교회가 다룰 수 있는, 또는 교회만이 다룰 수 있는 현안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사회의 한반도 평화 담론을 선도하지 못하고 새로운 문제 제기에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음으로써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남북 관계에 있어서도 남북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지 못하고 북한에 대한 지원과 이해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사회와 교회의 분열 완화에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시키는데 기여했다.
 
위에서 언급한 한계를 극복하고 기독교인들이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 바람직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가치에 근거해 근원적이면서도 새로운 현안들을 고민하고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며, 다른 한편으로 사회와 교회에 존재하는 다양하고 때로는 대립적인 견해들을 아우르는 공간을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가 일부 집단 또는 개인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대중의 불안, 절망, 피로, 필요, 소망 등을 담는 것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는 역할일 것이다. 그런 역할을 위해 먼저 아래와 같은 질문들을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고민해 보기를 제안한다.
 
통일은 왜 당연한 민족적 목표가 돼야 하는가? 과연 그런가?
통일의 당위성은 이제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청소년이나 청년 세대는 물론 장년층까지도 통일을 하면 오히려 남한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통일의 당위성이 아니라 통일이 필요한지 아닌지에 대해 진지한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
교회 안의 대립과 분열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교회 안의 이념 대립은 한국 교회의 불치병처럼 취급돼 왔다. 이것은 교회 내에 사회의 한반도 평화 담론과 접근이 그대로 이식됐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에 맞는 교회의 담론을 교회 대중과 함께 어떻게 만들고 공유할 것인지에 대한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 또한 그에 대한 전제로서 교회 내 집단 또는 개인 사이의 증오와 대립의 소리를 경청할 공간을 만들 방법을 고민해봐야 한다.
 
대중적 한반도 평화 담론과 접근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대중적 한반도 평화 담론과 접근은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필요하다. 대중적 담론과 접근이 형성되지 않는 이유는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대중이 소외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가 거시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전문 지식의 나열에 집중하며, 대중의 삶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은 대중의 참여 없이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를 보편적 평화와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한반도 평화는 여전히 남북의 군사 대립과 충돌을 막고 국가안보를 지키는 소극적 평화에 머물러 있다. 최근에는 오히려 후퇴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기 위한 군사력 강화에 집중되고 선제공격 가능성까지 언급되고 있다. 남북 모든 사람들의 안전과 번영을 포함하는 적극적 평화의 개념의 도입을 통해 힘에 이용한 대립과 충돌 억지의 불안한 평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군비 증강과 무기 경쟁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무력에 기댄 한반도의 왜곡된 평화 유지는 무기 경쟁을 가속시키고 북한의 핵무기 개발 위기까지 야기했다. 교회는 지금까지도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 남북의 무기 경쟁, 무력 대결, 국방 예산 등을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 군축의 문제도 다루지 않고 있다. 이런 주제는 교회가 선도해야 하고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것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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