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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2020년 주현절

관리자 2020-01-08 (수) 17:37 4년전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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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공동체운동본부> 절기설교 시리즈 계획

 

교회 생태목회 참조자료로 절기별 생태설교를 아래와 같이 공유합니다.

많은 관심 가져주시고 생태선교 동역의 길에 함께해주시기 바랍니다.

 

o 목적

 1) 생태신앙을 공유하고 개교회 목회계획에 참조하는 계기로 삼는다.

 2) 생태신학을 정립하고 생태선교의 방향을 모색한다.

 3) 교단의 생태선교에 관한 관심도를 고양한다.

 

o1년차(2020년) 절기설교 방점(목표) : 창조신앙론(생태신의 기본 의식 정립) 

o2020년 주현절 생태설교 작성 : 최형묵 목사(생태공동체운동본부 상임대표, 천안살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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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주현절 생태설교


인간의 조건과

(창세기 2:4~15)

 

본문말씀은 단적으로 말해 인간의 조건과 참 인간의 길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본문말씀은, 1장의 창조 이야기와 구별되는 또 다른 창조 이야기로, 우리에게 에덴 동산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의 한 대목입니다. 그 핵심 기사는 인간의 탄생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7절 말씀에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생명의 기운으로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는 인간의 탄생 의미와 인간의 조건을 바라보는 성서 기자의 시각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말씀의 기록자는 인간의 탄생을 축복의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그 인간의 조건은, 한편으로는 자연의 질료를 몸으로 하고 있으되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생명의 기를 이어받고 있습니다. 흙으로 빚어졌으되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입음으로써 완전한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과 하늘의 결합으로 인간의 생명을 이해하는 것이며, 동시에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을 함축하는 이해 방식입니다.

이와 같은 성서 기록자의 이해는, 고대의 다른 신화와 비교할 때 그 의의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성서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창세 신화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내용상으로 유사한 점이 많이 발견되며, 어떤 대목에서는 그 요소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인간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따르면, 인간의 탄생은 작은 신들의 반란에서 비롯됩니다. 큰 신들이 작은 신들을 부려 흙을 파게 하고 일을 하게 했는데, 그 노역에 지친 작은 신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큰 신들이 쉴 수가 없어 작은 신들의 우두머리를 잡아 죽이고 그 살과 피에 흙을 뒤섞어 사람을 만들어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작은 신들을 대신하여 노역을 담당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신의 살과 피로 만들어진 인간은 혼을 지니게 되었으나,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로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생명이 유한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바로 이 사실, 곧 마지막 결론은 오늘 성서 본문에서 말하는 인간의 조건과 아주 유사합니다.

그러나 성서 본문의 인간 탄생 이야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인간 탄생 이야기와 형태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결정적 차이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인간의 탄생은 일종의 저주의 결과입니다. 흙을 파며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인간들의 숙명론적인 삶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을 하지 않는 신의 아들들(고대의 제왕들)과 일을 해야만 하는 저주받은 신의 자식들(민중들)의 이분법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거대한 권력과 무시무시한 자연적 재난 앞에 무력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의 탄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말씀은 다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탄생은 저주의 결과가 아닙니다. 인간은 축복받은 존재로 그려집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의 동산에 인간을 두셨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축복을 의미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동산’, ‘정원은 힘 있는 제왕들의 소유일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배타적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낙원이 인간에게 허락되었습니다. 흙으로 빚어졌으되 하나님의 생기로 생명을 누리는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낙원이었습니다. 창조성 없는 노동의 고통(소외된 노동)은 처음부터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된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동산을 가꾸며 기쁨을 누리는 것이 인간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 기자의 인간의 탄생에 관한 기본 시각입니다. 그러한 시각은, 이집트 대제국의 권력 아래서 종살이 경험을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는 히브리인들의 전통, 그리고 이스라엘 안에서 국가가 탄생하는 시점에서의 뼈아픈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다시는 인간이 신의 이름을 빌어 인간을 억압하는 불행한 일이 빚어져서는 안 된다하는 염원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성서의 기자도 동의하고 있는 인간의 조건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그 인간의 조건은 운명적으로 규정된 저주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축복받은 존재로서 인간의 조건은 한계와 가능성을 말합니다. 흙으로 빚어졌으되 하나님의 생기를 지닌 생명체, 자연의 질료로 이루어졌으되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 그것은 자연의 일부로서 그 순환의 질서를 따라야 하는 인간 존재 성격을 말하는 것인 동시에, 그러나 운명적으로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각하고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합니다.

그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한계만을 인식할 때 인간은 숙명론에 빠지고 허무주의에 빠집니다. 반면에 가능성만을 인식할 때 인간은 무모해지고 기고만장합니다. 그리고 그 무모함과 기고만장은 자신의 능력을 남용하게 하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타자의 희생을 강요하게 됩니다. 다른 존재 다른 사람에게 운명의 족쇄를 채우는 것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고된 삶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 민중들과, 무엇이든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보는 신의 아들들, 곧 제왕들의 삶이 갈리는 것은 이런 이치입니다. 성서의 기자는 그런 세상과 그런 세상을 빚어내는 생각을 거부한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든 똑같이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지녔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이 본문 기자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한계와 동시에 가능성을 지닌 인간은, 자신에 주어진 조건과 능력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적절함, 그 균형의 지표가 바로 선악과생명나무입니다.

동산 가운데 나무가 하나였는지 둘이었는지 조금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본문말씀에서나 뒤의 322절에서 둘을 구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둘의 의미를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삶의 정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범하지 말라고 했던 것을 기어코 범하고 말았던 나무의 이름이 왜 하필 선악과였을까요? ‘선과 악을 가르는 열매’, 그것은 인간의 분별 능력을 지시합니다. 이것과 저것, 선한 것과 악한 것, 나와 너, 우리와 다른 사람,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남자와 여자 등등을 가르는 분별능력입니다. 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죄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분별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인간은 고통을 알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미묘한 문제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가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 그리고 그것을 가를 때 고통이 따른다는 것 역시 당연한 것 아니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 분별능력을 지닌 인간 삶 자체가 죄 아니겠느냐 하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무가 동안 한 가운데, 중심에 있다는 상징적 표현에 유의해야 합니다.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과와 생명나무, 그것은 공유되어야 할 보편적 가치, 중심을 말합니다. 그것은 너나없이 공유되어야 할 어떤 것의 표징입니다. 예컨대, 마을 한 자리에 있는 정자나무는 그 자리에 있어야 마을의 정자나무로서 몫을 합니다. 동네의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나무로서 몫을 합니다. 그러나 그 나무가 유력한 어느 집 정원으로 자리가 옮겨진다면 그것은 이미 정자나무로서 몫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나무를 옮긴 사람에게는 기쁨이 되지만, 그 밖의 마을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되는 일입니다. 나무를 옮긴 사람에게도 결국 그 일은 재앙이 되고 맙니다. 나무를 옮긴다는 것도 무모한 일이지만, 그로부터 터져 나오는 원성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결국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과를 범했다는 것은, 그 분별 능력의 남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편의적인 기준에 따라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고 판단하는 차별의식을 말합니다. 자기만이 진리를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 사회의 현상을 말합니다. 동산,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은 여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상징 마찬가지입니다. 322절은, 아직 인간이 그 생명나무는 범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성서가 지금 다시 기록된다면 이와 관련하여 과연 어떻게 기록되어야 할까요? 아마도 인간은 생명나무마저 범했다고 기록해야 할 겁니다. 미지의 영역으로, 금단의 영역으로 동산 한 가운데에 제한되어 있는 생명나무, 그것 역시 모든 생명이 공유해야 할 가치를 말합니다. 그 생명나무가 동산 한 가운데 있는 한 모든 생명체는 생명의 순환원리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집 정원에 독점되면, 그 결과는 재앙입니다. 이미 농업에서 터미네이터 종자라는 것이 나와 모든 종자의 보급 권을 대규모의 기업에서 독점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고, 인간 생명에 관한 유전자 과학이 또 어떤 재앙을 불러일으킬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과학기술에 의해 파악된 인간 생명원리, 모든 생명체의 생명원리가 모든 생명에게 공유된다면 생명나무는 그 자리를 지키는 셈이지만, 오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분명하게 지시하는 상징입니다.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범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내가 따 먹을 수 있지만, 그 다음에 다가올 다른 사람의 고통과 마침내는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올 고통을 예측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능력과 나의 욕망을 펼칠 수 있지만, 공유될 수 없는 것이라면 포기하는 지혜, 아니 생명의 질서를 깨우치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 인류문명이 처해 있는 위기 상황을 두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지혜를 일깨워 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과학기술을 탐구하되 그것이 특정 세력에게 독점적으로 이용될 소지가 있고 따라서 종국에게는 대다수의 사람과 생명체에 재앙이 될 수 있다면 그에 대한 안전장치부터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한계만을 인식하는 운명론보다는, 무한한 가능성만을 믿는 욕망과 능력 과잉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긍정의 힘이 역설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욕망의 분출과 능력의 과잉 현상 이면에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숙명론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현상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미 일그러져버린 인간의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는 그것을 운명적 질서로 받아들이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삶을 위해서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를 위험사회’ ‘피로사회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 현상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자각하는 것은, 성서의 가르침에 비춰볼 때, 결코 자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로부터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이로부터 연대가 가능해지고, 사랑이 가능해집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요, 모든 피조물과의 연대입니다.

재삼 강조하건대,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계만을 인식할 때 인간은 숙명론에 빠지고 허무주의에 빠지는 반면 가능성만을 인식할 때 인간은 무모해지고 기고만장합니다.

본문말씀은, 인간이 처한 그 두 가지 조건을 늘 유념할 것을 일깨웁니다. 그 말씀의 뜻을 깊이 새김으로써, 진정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헌신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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