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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소식]대만-구창완선교동역자

관리자 2011-11-04 (금) 14:30 12년전 2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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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 10일 대만에서는 중화민국 건국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습니다. 10 10일은 사람들이 흔히 ‘쌍십절’이라 부르고, 대만의 건국 기념일로 알고 있는 날입니다. 대만에서는 ‘2011년’ 같은 서력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민국100년’이라는 식으로 건국 연호도 많이 사용합니다. 그만큼 건국일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이번 기념식을 통해 건국일에 대한 국민적 공동인식의 부재가 다시 한 번 드러났습니다. 정부가 주관하는 타이베이 시의 공식 기념행사에 야당이 불참하고 타이난 시에서 독자적인 행사를 가진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대만은 오랫동안 남태평양 계열의 여러 소수 부족들이 원주민으로 살아온 섬이었습니다. 그러다 17세기 초 잠시 네덜란드인들이 이 섬을 차지했지만, 명나라의 중흥을 꿈꾸며 이 섬에 들어온 명나라 장수 정청공(鄭成功)에 의해 밀려났습니다. 이때 정청공과 함께 한족이 대거 이주를 하면서 한족이 이 섬의 새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 재건의 꿈은 실패로 돌아갔고, 대만 섬은 그 후 200여 년 동안 청나라의 변방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도 한족 이주는 계속되었는데, 이때 들어온 한족은 주로 대만 섬에서 가까운 푸졘(福建) 성의 한족들이었고, 하카(客家) 족 계열의 한족들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그러다 청일전쟁 후 대만은 일본에 귀속되어 50여 년간 식민지 지배를 받았고,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대만 섬은 다시 중국 땅으로 환원되었는데, 이때 중국을 대표해서 대만 섬을 인수한 사람이 장개석이었습니다. 그러나 본토에서 중국 공산당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그는 1949년 백만 명 이상의 군대와 민간인을 이끌고 본토 탈환을 꿈꾸며 대만 섬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국민당을 통해 일당 독재를 하며 오랜 동안 대만을 다스려 왔습니다.

   일제 통치기간 동안 다른 동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안정된 번영기를 누렸던 대만인들로서는 이렇게 느닷없이 들이닥친 장개석 정권이 정치, 경제면에서 모든 권한을 장악하고 다수파인 기존의 한족들 위에 군림하여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습니다. 당연히 민주화의 이름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장개석 사망 후 계엄령이 해제되고 대만은 서서히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국민당이 들여온 중화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인식에는 기존의 대만인들과 국민당과 함께 들어온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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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100주년축하 불꽃쇼

 

   야당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엄밀히 말해서 10 10일은 중화민국 건국일이 아닙니다. 10 10일은 중국 근대화의 시발로 간주되는 신해혁명이 일어나게 된 계기를 제공했던 우창(武昌)봉기를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1911 5월 청나라가 서양 제국들로부터 자금을 빌어 국가의 재정난을 해결하려고 하자, 그것이 나라를 팔아먹는 일이라 생각한 국민들 사이에 쓰촨(四川)폭동으로 불리는 대규모 저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자 이에 대한 국민들의 무력 대항이 일어났는데, 그 첫 시발점이 된 사건이 10 10일 우창에서 일어난 우창봉기였습니다. 그 후 무장봉기가 확산되어 소위 신해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청나라는 멸망했습니다. 신해혁명의 정신적 배경이 된 것은 쑨원(孫文)이 주장한 ‘삼민주의’였고, 그래서 흔히 쑨원을 신해혁명의 아버지로 부르게 됩니다.

   혁명세력들은 1912 1 1일 쑨원을 임시 총통으로 하고 난징에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여러 세력들 간에 단결이 원활하지 못해 청조의 군벌이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타협하여 그에게 총통의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혁명파를 탄압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혁명파들은 그와 다시 대결을 벌이며 재혁명을 시도해야 했고, 잠시 일본으로 망명을 했던 쑨원은 정당의 이름도 ‘국민당’에서 ‘중국국민당’으로 바꾸었습니다.

   여러 혁명 세력들이 있는 가운데 1920년 창립된 공산당은 1921 7 1일 상하이에서 제1차 당 대회를 열어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새로운 혁명세력으로 등장했고, 혁명의 성공을 위해 쑨원은 공산당과 합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국공합작 중 1925년 쑨원이 전사를 했고, 내부 권력다툼을 통해 장개석이 국민당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의 주도권을 놓고 오랜 싸움에 들어갔고, 모택동이 공산당 지도자로 부각된 후 국민당은 싸움에서 패배하여 대만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우창봉기나 쑨원의 근대화 정신에 대해서는 국민당이나 공산당 모두가 인정을 하고 있고, 그 의미를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공산당이 지배하고 있는 중국에서는 역시 쌍십절보다는 1949년 공산당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10 1일을 국경절로 더 중시합니다. 쑨원이 위대한 혁명가임은 분명하지만, 중국 근대화의 주역은 중국 공산당이라는 입장입니다.

   반면 대만에서는 중국 근대화의 계기가 된 우창봉기에 쑨원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가 세운 국민당이 중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논리로 국민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고, 우창봉기와 중화민국, 혹은 국민당을 연계하여 쌍십절을 국경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당에서는 우창봉기가 일어났을 때 쑨원은 군비를 마련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이어서 우창봉기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쑨원과 우창봉기를 직접 연결시킬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중화민국 정부가 모든 혁명 세력을 대표하는 정부가 아니었고, 국민당도 여러 혁명 세력들 가운데 소수당파들을 규합하여 세운 정당이어서 혁명의 중심세력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10 10일을 중화민국의 기념일로 삼는 것도 적절하지 않고, 국민당이 대만의 주인행세를 하는 것이나 대만이 중화민국으로 불리는 것도 역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아무튼 국민당이 공산당과의 대결 구도를 대만까지 끌어들여 대만이 독자적인 국가로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데 장애물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최근 들어서는 중국과의 화해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국민당 정부가 중국에 대해 너무 저자세 외교를 하고 있다며 야당은 크게 반발하는 있습니다.

 

   대만의 민주주의 역사는 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길지 않습니다. 정권 교체도 38년간의 계엄통치를 포함한 41년간의 국민당 통치에서 민진당 통치로, 그리고 8년의 민진당 통치에서 다시 국민당 통치로 겨우 두 번 있었을 뿐입니다. 내년 1 14일 대만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됩니다. 이번에 다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입니다. 국민당에서는 현 마잉주(馬英九)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뛰고 있고, 국민당에서는 차이잉원(蔡英文) 씨가 정권 탈환과 첫 여성 대통령 취임을 노리며 뛰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당의 인기가 흔들리고 있는 틈을 타서 여당 성향의 송추위(宋楚瑜) 씨가 신민당을 창당해 출사표를 던진 상태입니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후보자들이 연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만, 현직 대통령이 반 년 넘게 차기 대권을 위해 연일 사소한 모임들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심지어 연예인 결혼식 주례도 서 주고 하는 것 등은 그리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는 마 대통령이 제가 있는 창롱대학교에도 와서 강연회를 가졌습니다. 학교에서는 야당 후보자 강연회도 허락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현재 여론조사에서는 국민당과 민진당의 두 후보자 가운데 국민당의 현 대통령이 다소 앞선 가운데 35% 내외의 지지율로 각축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회문제와 남북문제, 지역감정, 이념 대립의 잔재 등이 뒤얽혀 국민 간에 의견 대립이 많은 것처럼 대만의 경우도 제반 사회 문제와 대 중국 문제, 지역감정, 그리고 종족 갈등 등이 뒤얽혀 여론이 분열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든 대만이든 감정적 대립보다는 보다 더 냉정하고 성숙한 논의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며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한국은 이미 늦가을로 들어섰겠지만, 이곳은 아직도 낮 온도가 30도를 오르내립니다.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서 계절이 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환절기를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기도드리며,

  
2011
11 1, 대만에서 구창완 목사가 올립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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