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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교회 [엡 1:17~23] - 김재준 목사

비전2015부 (기타,,목사) 2014-03-17 (월) 11:46 5년전 3488  
[회보 1] 19577월호
 
그리스도와 교회
에베소서 1:17~23
한국신학대학교수 김재준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다. 사지백체(四肢百體)가 다 가추어 있어도 머리가 없으면 몸 노릇을 할 수가 없다. 머리는 몸에 정신과 목적을 부여하며 온갖 주권적인 지도명령을 내린다. 몸은 머리에 의하여 온전함을 이루며 그 의미를 찾는 것이다. 머리도 몸이 없이는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 할 때 교회 없이는 그리스도도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느냐?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자신(自身)으로서 온전한 존재시지만, 그가 교회를 향한 사랑이 너무나 지극하시기 때문에 그는 교회없이 온전함을 느끼지 못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시 또 그리스도와 교회를 남편과 아내의 사이로 비유하였다. 남편이 아내를 제몸 같이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그 사랑안에서 순복하는 것은 남편이나 아내가 각기(各其) 스스로의 존재로서 결함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 서로 사랑하는 것 때문에 상대방(相對方)이 없이는 온전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편이 아내와 합하여 한[]을 이루는 것 같이 그리스도와 교회도 그렇다고 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근본태(根本態)를 본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회에 개체와 단체의 관계를 좀더 고찰하고 다음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에서 30세까지 노동자로 지내다가 요한에게 세례 받고 두루다니며 선한 일을 하시다가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40일만에 승천하신 분으로서 그의 기록(記錄)은 어디까지나 뚜렷한 개인(個人)이요 다른 아무와도 혼동(混同)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란 것은 누천년래(累千年來) 몇 억만만(億萬萬)의 사람들이 그 회원(會員)이 되어 오고 가고 나고 죽고하면서 유지되어 오는 한 종교집단(宗敎集團)이어서 그리스도라도 [개인(個人)]에게 []이라는 말로 일치(一致)시키기에는 너무나 산만(散漫)하다. 그리고 그 역사적(歷史的)으로 저질러 온 사건들과 그 성격등(性格等)으로 볼지라도 [그리스도] 개인(個人)의 하신 일과 그 품격(品格)에 일치(一致)시키기에는 너무나 범죄적(犯罪的)이다. 이것을 유기체적(有機體的)인 생명(生命)으로 비유해서 소위 [신비체(神秘體)](Mystical Body)라고 하여 보지만 그것은 설명(說明)하기에는 너무 신비(神秘)하다.
 
여기서 구약사상에 있는 이른바 (Corporate Personality), 법인격(法人格) 또는 공동인격(共同人格)이란 것을 연상(聯想)하는 것이 이해(理解)에 도움이 될 줄 믿는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등을 부르셔서 그들 하나 하나와 -의 관계를 세우셨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구약에서의 이런 개인들은 모래알처럼 분산된 개체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한 공동인격으로, 하나님과 계약관계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개인이 아니라 전민족(全民族)이다. 이 전민족이 한 개인과 같은 단위(單位)로 하나님 앞에 계약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개인임과 동시에 이스라엘 전체(全體)였고 이스라엘 전체는 한 민족임과 동시에 개인격(個人格)이었다.
 
이사야 53장은 그것이 한 개인으로서의 메시아가 수난의 종으로 예언된 것임과 동시에 또한 이스라엘 민족, 특히 남은 백성으로서의 새 이스라엘의 수난을 예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지향(指向)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진행시킨 역사(歷史)니만치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가 오신다면 당연히 이스라엘 민족의 공동인격의 초점(焦點)에서 불붙는 [인자(人子)]에게 성령의 성육으로 임할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이스라엘 민족생명의 개인화한 것이어서 그의 안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전역사가 품겨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다윗의 자손이었으며 인자였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개인이면서도 전이스라엘 민족으로서의 법인격을 가진 개인이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도 이런 선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개인이지만 그의 생명이 움직여 이루어진 집단으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법인격이어서 결국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로 표식(表識)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믿음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이스라엘의 전통을 이어가진 공동인격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말하기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베드로전서 2:9, 10)한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옛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여 세우신 것 같이 교회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옛날 이스라엘 나라가 세계만방의 제사장 국가로, 만민의 중보자가 되었던 것 같이 교회도 영원한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민의 중보기관(仲保機關)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시(禮拜時)마다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이 까닭이며, 한국교회는 적어도 한국의 제사장으로 한국을 위하여 하나님께 도고(禱告)하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이 세계열방 중에서 성별되어 하나님의 다스리는 나라, 신정국가로 되었던 것 같이 교회도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영역, 그리스도의 직접 통치하시는 구역으로 된 거룩한 나라이며, 옛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즉 하나님께서 이것은 내 백성이다하고 갈라 세우신 백성이었던 것 같이 교회도 하나님이 그 아드님의 피로 사신 백성인 것이다. 묵시록에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라한 것은 이런 교회의 구극(究極)을 말한 것이다.
 
2. 교회의 근본태가 이런 것이니만치 이런 교회가 지상에서 활동하는 활동태도 이에 준하여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1) 교회 자신의 생활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이 되어 있느니만치 그 생활은 그리스도의 생활태에 따를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활은 한마디 말로 한다면 [십자가의 생활]이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생활은 교회 안에서 그 모본을 세운다. 하나님의 명령은 역설적이다. 자연히 타고난 생활의 절도없는 발전이라는, 세상에서의 일반생활양식을 따른다면 교회는 살지 못한다. 일반 인간도 살지 못한다. “네 목숨을 얻고저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잃으면 얻으리라”, “나를 위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모든 악하다는 거짓말로 비방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하신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죽음의 제단에 바치기 전에는 그 신앙의 완열(完熱)을 기대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이 교회도 언제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위하여 죽는 것을 택하는 때에만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원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된 자들은 재산이건, 지식이건, 시간이건, 기술이건, 무엇보다도 우리 각기의 존재자체를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하여 죽이는 때, 그 안에서 참으로 사는 길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 생활에도 적용되는 참 사는 유일한 것이다. 십자가가 골고다 언덕 위에 서므로 만민에게 영생의 길이 열렸다. 십자가는 그러므로 지금도 교회의 서는 자리며 그 포인트.
 
(2) 교회는 그 서야할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향하여 무엇을 하는가? 구약시대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가 있었던 것과 같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대언하는 예언자로서, 그 강단(講壇)을 가지고 있다. 또 모든 신도는 다 이 일을 맡은 예언자들이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이 있어 중보의 직분을 한 것 같이 교회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만민을 위하여 대도(代禱)하며 성도의 제물을 성별하여 제단에 바치며 하나님의 사유(赦宥)와 축복(祝福)을 전달한다. 로마카톨릭에서는 제사장직에 치중하고 개신교에서는 예언자직에 치중한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그리스도가 예언자와 제사장직을 완성하신 것 같이 교회도 이 두 직분을 다 맡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으로 임하실 때 교회도 그와 함께 영광 가운데 [왕노릇]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적인 봉사생활(奉仕生活)이 그 바탕을 이룬 때에만 주어질 수 있는 특권(特權)이요, 오늘의 강력주의적환상(强力主義的幻想)은 아닌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 전해지고 인간의 하소연이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염없는 죄인들이 영원자와 교제하는 곳이 교회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늘에 닿는 사다리. 이것이 교회의 활동태(活動態)높이.
 
(3) 교회는 또한 세계를 향한 생활태()를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천하만민과 전우주에 부단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구원은 이스라엘에서 난다. 그러나 구원 받아야 할 자는 천하 만민, 극악의 죄인까지도 예외없이 그 계산에 들어간다. 그리스도 이후의 교회는 새 인간, 새 인류의 창조활동이며, 한 영원한 인격을 중심으로 천하만민이 모이는 운동이며, 전우주적 속량(贖良)의 목표를 향한 속량사회 건설의 운동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느 종파 안에 농성(籠城)한다거나 어느 지방에 안주한다거나 어느 계급에 아부한다거나 어느 국가나 민족에 국한되는데서 만족하지 않는다. 교회는 전세계, 전우주를 향하여 뻐쳐 나가는 거룩한 생명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충만이라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한 곳이요, 그 생명은 또한 만물 안에 충만하시고 만물에 충만하셔서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케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서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충만이라는 말 플레로마는 달리도 해석할 수 있어서 보충(補充)한다’, ‘완전케한다는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몸과 머리가 서로 그 어느 한편이 없이는 온전해질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교회도 그러하며 만물이 또한 그리스도 없이는 온전할 수 없고 그리스도도 만물이 온전히 속량되어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하기까지는 온전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는 하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본 호나상에는 온갖 부정한 짐승, 날짐승, 기는 벌레, 사류(蛇類)에 이르기까지 하늘의 위대(偉大)한 사랑의 보자기에 간직해 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부정한 것도 속량된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부정타 하지 말라!” 하였다. 그리스도의 속량애(贖良愛)는 이제 전세계, 전우주를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채우고야 말 것이다. 이 운동의 기지(基地)’가 교회다. 이것이 활동하는 교회의 넓이.
 
공동인격사상(共同人格思想)의 완성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격화(人格化)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나서 그리스도인이 될수 없다. 흔히 생각하기를 개개인의 신도가 모여서 교회를 이룬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가 있어서 개개인의 신도가 생긴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관찰(觀察)이다. 이 교회가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삶으로 말미암아 높이로 하늘에 통하고 넓이로 전우주를 속량하는 기점(基點)이 된다. 우리는 교회의 일원으로 교회를 받드는 행복(幸福)과 특권(特權)을 재인식하여 교회에 충성하는데서 생()의 최고의 의의(意義)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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