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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야 할 누룩 [마 16:5~12] - 정용철 목사

비전2015부 (기타,,목사) 2014-03-17 (월) 12:00 6년전 4355  
[회보 4] 1957년 11월호
 
삼가야 할 누룩
마태 16:5~12
정용철 목사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리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벳세다로 가시는 도중(途中) 배위에서 제자들에게 엄히 경계하신 말씀은 삼가 너희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신 말씀이나, 처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서 자기들이 잊어버리고 떡을 가져오지 아니한 것을 걱정했다. 그들은 유월절 외에는 늘 밀가루에 약간의 누룩을 넣어서 떡을 만들어 먹었기 때문에 누룩이라면 얼른 떡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치신 누룩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마가복음에 보면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8:15)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고 보면 예수님이 주의시킨 누룩은 세가지로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바리새인의 누룩, 사두개인의 누룩, 헤롯의 누룩인데 이 누룩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누룩은 퍼지는 것이고 변질케 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생생한 곡식에서 누룩이 드러가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져 그 곡식을 다른 맛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이 누룩을 좋은 것으로 상징(象徵)한 예는 마태 13장에 천국비유에서 천국은 가루 서말 속에 넣어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다”(마태 13:33)는 예밖에 없고 그 외에는 대개 무서운 침투성(浸透性)을 가진 패덕의 상징으로 누룩이란 말이 쓰여졌다. 누룩이 곡식 속에 드러가서 전체에 침투가 되어 아주 딴 맛으로 변질케 하는 것처럼 거짓교훈과 악한 패덕이 개인이나 가족이나 교회에 들어오면 그 전체를 변질케 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미리 제자들에게 주의시켰던 것이다.
 
바리새인의 누룩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의 형식주의자들로서 종교를 의식화(儀式化)함으로써 종교의 지위(地位)와 본질을 떨어뜨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물론 처음부터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무척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볼려고 애쓰는 나머지 율법의 조문에 충실했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각지방에 있는 회당과 학교를 근거로 해서 일반 유대인과 긴밀(緊密)한 접촉을 하고 따라서 그들 사이에 신망(信望)을 받았다. “바리새라는 말은 자기들이 지은 이름이 아니고 특별하게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남들어 붙여준 별명이다. “바리새란 말은 분리자(分離者)”란 말인데 일반 사람과 달리 사는 사람이란 뜻인 것 같다. 그것은 마치 영국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배를 타고 아메리카로 떠났던 사람들을 청교도(淸敎徒, 퓨리탄)라고 남들이 불러주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생활을 보면 농민들에게 곡식을 살 때 그 농민이 율법대로 십일조를 바치는 가 않은가를 보아 십일조(十一條)를 바치는 자의 것이 아니면 절대로 사지 않았고 그런 사람의 초대(招待)에는 응하지도 않았다. 그 외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면 교제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생활이 율법중심이었기 때문에 항상 율법을 배워주고 가르치는 데 전력을 다했고 엄격히 Torah(율법)를 준봉하고자 하여 그 내용을 많은 세목으로 구분했는데 적극적인 계율 248(인체의 부분의 수) 소극적인 것이 365(일년의 일수) 합계 613(율법의 문자수)을 정하고 지켰는데 그 중에 의식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어느 것이 중한지 마지막에는 조문에 사로잡혀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는 중에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보다 조상들의 유전(遺傳)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용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치중(置重)하여 선후를 분간하지 못했다. 이런 의식주의(儀式主義)는 결국 위선으로 화하여 버렸다. 위선이란 표상(表喪)의 구별이 있음을 말한 것으로써 표면을 장절(裝節)함으로 표면의 부패(腐敗)를 감추는 것이 위선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이런 중대한 자기과오에 빠졌다. 율법이 정신을 잊어버리고 율법의 조문에 붙잡혀서 율법의 노예가 된 사람이 바리새인이다. 옳은 일()과 사랑()과 진실()은 버리면서 박하, 회향, 근채와 같은 적은 풀의 소출의 십일조를 따지기에 여념이 없었다. 누가 현대의 법을 가르쳐 큰 고기는 차고 나가고 송사리떼만 걸리는 그물이라고 말했다고 하거니와 바리새인들은 약대는 송두리째 삼기고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식의 의식주의자들이었다. 근본을 잃어 버리고 지엽(枝葉)을 붙들고 벌벌떠는 자들, 속은 썩고 있으면서 겉만 꾸미는 사람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책망하셨다. 말만 하고 행치 않는 자들, 무거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한 손가락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무리, 그러면서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경문(經文)을 넓히고 성구(聖句)를 기록한 옷술을 크게 달고, 잔치에는 상좌(上座)와 시장에서는 문안(問安)받는 것을 즐기는 무리, 천국문을 사람앞에서 닫고 자기도 안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 하는 자들, 돌아다니며 교인 얻기를 힘쓰기는 하나 얻은 교인으로 참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파의 노예를 만들어 자기보다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자들, 맹세는 곧잘하면서 하나도 지키지 않는 무리, 조상과 선지자의 무덤을 쌓고 그 비석을 꾸미는 데는 빠르나 조상의 아름다운 행위를 하나도 본받기를 거절하는 자들, 잔과 대접의 겉은 씻으면서 속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차게 하는 무리, 이렇게 준엄하게 책망을 하셨다.
 
불성실과 위선과 형식주의의 누룩은 오늘에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의 종교는 참, 진리, 성실의 종교다. 그러므로 거짓과 위선과 형식주의는 우리들의 신앙에서 가장 배격해야 할 적인 것이다.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조차 나는 것이다하고 예수님은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은 솔직하면서도 성실해야 한다. 결코 !”해서는 안된다. 잘 믿는 체, 경건한 체, 아는 체, 있는 체, 잘난 체, 이런 것은 기독교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누룩이다. 이런 바리새적인 신앙은 전도하는데 꼭 자기파, 자기소속의 당파인을 만들려고 한다. 오늘 우리는 하루살이보다 약대를, 박하와 회향과 근채보다 의와 인과 신을 중하게 여겨야 하며 그리스도를 중심해서 소이(小異)를 버리고 단결(團結)하고 노력해야 한다.
 
2. 사두개인의 누룩
 
예수님 시대의 사두개파 사람들은 인수(人數)는 많지 않았으나 대개로 돈있고 세력있는 부류의 사람들로 조직되어있다. 예루살렘에 본부를 둔 귀족당으로 헬라문화에 도취(陶醉)하며 의복도 헬라식, 이름까지 헬라식으로 지었다. 그들에게는 일정하고 확고한 신념과 주장은 없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일망정 잘 믿고 잘 살아본다는 주장과 부활이나 영혼 불멸, 심판, 하나님의 섭리(攝理)를 믿었지만, 사두개인들은 통 그런 것을 믿지 않았다. “내세가 어디 있으며 사람이 다시 산다는 것이란 망상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어디 있느냐 사람은 사는 것이고 살다가 죽는 것이고 죽으면 인생은 끝난다해서 극히 회의주의자요 유물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이 현실주의자들인만치 정치에는 취미(趣味)를 가지고 있었고 그러므로 공회에서 제일 의석을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와 명예와 권력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를 배격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 심판, 부활, 영생을 말씀하시니 그것이 싫어서 배척했다. 그들이 헬라문화를 좋아한 까닭도 헬라의 현세주의자 에피쿠레오를 좋아한 까닭도 그들이 현실주의자였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람의 현실을 만족케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물질이다. 물질과 권세만 있으면 현실은 즐길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유물주의자가 안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사두개인의 누룩은 오늘도 굉장하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실험관(實驗管)으로 실험할 수 없는 것은 다 부인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즐기는 사상과 주의는 분명히 인간을 동물이하로 타락시키는 약한 누룩임이 틀림없다. 오늘 세계에서 한국의 원하는 무소불능이다하는 격언이 생길정도로 우리나라 돈(물질)이 우리 국민 사이에서 세도(勢道)를 부리게 되었다면 우리 백성처럼 유물주의자가 없다는 말이 된다. 만일에 우리 국민이 이렇게 물질숭배자가 되어 버리는 날이면 우리나라의 운명을 걱정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지금 바로 우리 이웃의 한 나라가 맛보고 있는 똑똑한 실례다.
 
만일에 이런 사두개의 누룩이 교회에 들어와서 신앙도 딸라나 구제품에 팔리고 교회의 사랑으로써의 단합이 파당이나 정치에 요리되는 날이면 교회는 그맛을 잃어버리고 변질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물질로 평가할 수 없는 높은 것이 있다. 아름다운 인정, 거짓 없는 동정심(사랑) 높은 하나님 나라에 연결되는 소망이 우리를 이끌어주기 때문에 물질이 그 기능을 상실했을 때도, 우리 몸이 지극한 병약에 빠졌을 때도 용기를 잃지 않고 새로운 생애를 엮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것을 전연 부정하고 보이는 현실과 물질에만 치중하는 사두개의 누룩을 주의해야 한다.
 
3. 헤롯의 누룩
 
헤롯의 누룩은 세속주의와 불신앙을 의미한다. 기원전 37년에서 기원 4년에 이른 헤롯대왕은 대왕이라는 존호(尊號)를 유대국민들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헬라 역사가를 돈으로 매수하여 얻은 이름이다. 유대인은 헤롯왕을 에돔의 노예라고 부르고 로마나라를 싫어함과 같이 헤롯도 싫어했고 맹렬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 까닭은 헤롯이라는 사람은 논리와 도덕에 있어서 탈선하고 방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기육신의 정욕을 위해서는 아내를 몇사람씩 바꾸고 자기 뜻을 달성하는 데 방해된다고 생각했을 때는 가까운 친척은 물론 자기 아내까지도 살해하는 자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권력과 영예를 확장(擴張)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남의 나라 정부에 아부하기를 능사로 하였다. 헤롯왕가는 그후 오랫동안 대대에 그 행습이 계승되어 세속주의자의 상징으로써 후세인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헤롯 안티파스가 그 동생의 아내(제수)를 빼앗아 정욕에 형락(亨樂)하는 것을 안 세례요한은 궁궐에까지 찾아 들어가서 왕을 책망했다. 그런 관계로 세례 요한은 그의 손에서 목을 바치는 희생을 당하지만 세속주의는 언제나 의인의 피를 흘리는데 무자비하다. 헤롯이 예수를 죽이는 데 전적으로 찬의(贊意)를 표한 이유도 여기 있었다. 세상 향락을 하나님 이상 즐기고 그것을 꾸짖는 자를 배격하고 처치(處置)하는 세속주의 헤롯의 누룩은 오늘의 시대에도 있다.
 
오늘 윤리와 도덕의 타락은 세속주의의 산물이다. 이런 주의가 종교신앙과 결탁하면 종교를 하나의 도락(道樂)으로 알고 무아지경에 도취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여 종교의 높은 의무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도()가 심하면 종교신앙을 육체행위에까지 타락시키고 그러면서도 그것이 거룩한 행위라고 변호하며 권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누룩이 잘못하면 온 덩어리에 퍼지게 될 우려가 있다. 기독교는 윤리적종교다. 물론 깊은 감정의 안위(安慰)도 있지만 높고 깨끗하고 거룩한 의무가 기독교에 있다. 우리는 결코 세속주의 헤롯의 누룩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누룩을 삼가야 한다. 알지못하는 사이에 들어와서 알지못하는 사이에 우리 마음과 전체를 순수한 복음적인 신앙에서 변질케하고 멀어지게 하는 누룩, 불성실과 위선과 형식주의의 바리새인의 누룩, 현실주의와 유물주의와 회의주의의 사두개의 누룩, 세속주의와 불신앙의 누룩들은 조금도 용납해서는 안된다.
 
바울 선생은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해 들어온 누룩을 매우 걱정하고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경고한 일이 있거니와(5:7, 9) 오늘 우리 교회에 이 누룩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그 본질적인데서 이해하고 신앙을 생활화하는데 더욱 힘써야 하겠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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