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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신지에 대한 소망 [계 1:1] - 우동철 목사

비전2015부 (기타,,목사) 2014-03-18 (화) 10:42 6년전 3067  
[회보 6] 19581
 
신천신지에 대한 소망
요한계시록 11
 
우동철 목사
 
우리는 다사했던 1957년을 보내고 보다 더욱 다사할 1958년을 마지하였다.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게 될 때 우리는 새삼스럽게 시간은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마치 기차를 타고 창밖을 내다볼 때 창밖의 모든 풍경들이 뒤다름질 치며 물러가는 것처럼 시간은 만물을 이끌고 우리에게서 영원히 물러가는 것을 보는 것 같다. 이런 때에 있어서 지나간 해에 이 땅을 뒤덮고 있던 모든 허위와 위선, 불의와 불진실, 투쟁과 유혈, …… 이런 것들은 모두 물러가고 공평과 정의가 바로 서고 진실과 정직이 충만한 신천지가 도래하기를 누구나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해가 바뀌었어도 세상은 점점 암흑의 도가 더하여질 뿐이고 광명의 면은 보일 것 같지 않다.
 
우리는 1958년의 새해를 맞이하고 더욱 더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 앞에 가로놓일 모든 것들에 대하여 한가지도 자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국내에 있어서 정치, 경제 등의 불안전 상태는 우리의 생활에 직접적인 불안을 가지게 할뿐 아니라 거기에 따르는 부산물로 인심이 극도로 악화하는 온갖가지의 죄악이 저질러져서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질식케 할 것이다.
 
또한 우리의 교계는 어떠할 것인가? 아직도 복음의 진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순전히 자기 개인출세의 무대로 혹은 생활의 방편으로만 이용할려고 하는 일부 그릇된 지도자들이 있는 한 혼란을 계속될 것이다. 교회의 재산을 위한 분규가 아직 종식되지 않은 것도 하나의 걱정이다.
 
신년을 맞이하여 이모 저모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낙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우리가 당하는 이 사태보다도 더 악한 사태에 직면하였어도 그는 옛 하늘과 옛 땅이 없어지고 바다까지 다시 있지 아니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대적 배경을 살펴 볼 때 기원 64년에 일어난 로마성의 대화(大火)의 책임이 기독교인에게 지워지자 기독교인에게 대한 대박해가 시작되었다. 당시 로마옥에 죄수로 있던 사도 바울도 이때에 순교를 당한 것 같고 또 사도 베드로도 이때에 최후를 바친 것 같다. 곧 로마성의 방화범이 기독교인들이 아님이 판명되었으나 그러나 로마인들은 기독교인들은 전인류에 대하여 증오심을 가진 자들이라는 죄명을 씌우고 박해를 계속한 것이다. 그 이유는 로마제국은 불멸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가이사는 불멸의 왕국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신천신지가 임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다 같이 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장막을 사모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로마 성도 제국도 가이사도 모두 영원히 존속할 것이 못되고 일시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에 세상과 인류를 증오하는 자들이라는 구실을 가지게 한 것이다. 이 박해 때문에 당시 교회의 지도인물들이었던 유스티누스, 안디옥교회의 감독 익나시우스, 서머나교회의 감독 폴리캅 등을 위시하여 유명무명의 무수한 성도들은 계속하여 순교의 피로서 그들의 신앙을 증거하게 되었다. 19절에 나 요한은 너의 형제요 예수의 나라와 환난과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함 같이 이미 수많은 동참자를 잃었으나 지상에는 의연히 피비린내나는 박해로 순교가 계속되었다. 악의 세력은 더욱 강하여지고 우상숭배는 횡일하여 불의한 권세자들은 폭위를 제마음대로 하고 있었다. 세상은 문자 그대로 암흑과 혼란이었다.
 
이러한 중에 영광의 주는 만물과 전 역사의 진상을 그 종 요한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초대 신도들에게 주어지지 않을 수 없는 계시의 선물이다. 또한 모든 시대를 통하야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조금이라도 참여하는 기독자에게는 없지 못할 주의 위로와 격려와 영감의 글이다.
 
요한은 23장까지 만물의 진상을 많은 이상(異象)으로서 표시하여 기록하고 마지막으로 전혀 신천신치가 도래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이상과 같은 암흑에서 어떻게 신천신지를 볼 수 있었던가? 그것은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하였고 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안다고 함과 같이 신앙의 눈은 자연인이 볼수없는 세계를 보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면하는 이런 정도의 사태에 대하여도 자연인은 모두 낙심하고 말 것이다. 그 이유는 자연인의 눈과 신앙인의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몸은 죽어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말라고 하시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멸할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은 자연인은 육신과 거기 따르는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또한 그러한 상황여하에 따라 희비를 일감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사물을 관찰할때는 그 모습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정말 사상가 키에르케고르는 자연인과 기독자의 차이는 마치 어린아이와 성인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린아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성인이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무서워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못한다. 그것은 성인은 알고 무서워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이들의 불완전한 첫째 점이다. 다음으로 그 때문에 아이들은 무서워하지 않을 것을 무서워하는 결과를 가지게 된다. 자연인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저들은 무엇이 진실로 무서워할 것인지를 알지못한다. 자연인은 지상적인 시간적인 고뇌, 곤궁, 질병, 비참, 환란, 고통, 번민, 염려, 원한 등을 가장 무서운 것으로 안다. 그러나 기독자들은 이러한 것들은 지상에 있는 흔이 있다가도 없어지는 일시적인 사건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또는 이런 사건들의 배후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의 능력의 손이 움직이시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역사상에는 부단히 모든 인류로 하여금 암흑으로 이끌어 갈려고 하는 의자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맹목적인 의지(意志)이건,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이건 하여튼 공중의 권세잡은 사탄의 의지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한편 이 의지를 꺾으시고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하나님의 의지가 더 강한 것을 우리는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의지를 이 땅위에 실현하는 일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안을 가지지 말자. 우리는 이러한 시기에 있어서 우리의 존재이유나 의의(意義)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때가 많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주위에 암흑의 세력은 너무나 크고 강한데 비해서 우리의 불빛은 너무나 비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통하여 있어질 결과를 생각할 때 너무나 한심스러울 때가 많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전 역사와 우주를 묵시록 기자가 본것과 같이 볼수 있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대승리의 도상의 적은 돌멩이로 따라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계획타산으로 일희일비하는 자리에 있지 말자.
 
천지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지으셨고 대능의 손으로 섭리하시고 독생자를 통하여 구원하신다. 이 신앙에서 새해를 맞게 될 때 우리의 눈앞에는 신천신지가 전개되는 것이다.
 
(필자 서울 동소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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