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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신앙 [막 16:2~4] - 이해영 목사

비전2015부 (기타,,목사) 2014-03-19 (수) 13:25 6년전 3240  

1958년 4월 10일
회보 9호(2권 4호)

“부활의 신앙”
마가복음 16:2~4

이해영 목사

안식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에서 돌을 굴려주리오 하더니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러졌으니 그돌이 심히 크더라(막 16:2~4).

그 새벽은 부활의 날이었습니다만 무덤을 찾아가는 여인들의 마음은 수난의 아픈 상처를 가슴에 안고 걸어가는 아직도 어두운 새벽길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부활하신 주님이 저들과 동행하고 계시지만 깨닫지 못하고 희망을 잃은 말 모를 허무감에 잠겨 옛 고향으로 돌아가는 황혼길이기도 하였습니다. 안식후 첫날 슬픔에 잠긴 여인들이 “누가 우리를 위하여 이 육중한 무덤의 돌을 옮겨줄가 근심하며” 묘지를 찾아가는 걸음은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 – 숙명의 사람의 모습 – 이기도 합니다. 실로 사람은 나면서부터 죽어야 할 숙명의 멍에아래 놓여있는 불행한 존재입니다. 죄로 인하여 낙원에서 추방당한 인류의 삶은 묘지를 향해가는 괴롭게 긴 행렬이었습니다. 이 죽음의 행렬은 영원자에게서 멀어진 죄로 인한 인간의 비참이기 때문에 아무도 멈추게 할 수 없는 불가피한 역사였습니다. 사람은 결국 죽어야 합니다. 불안하고 괴로워하고 외로워하고 탄식하며 종내 절망으로 통하는 그 길을 걸어서 묘지로 향해가야 합니다.

이 무덤의 돌은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과제를 앞에 두고 불안과 근심에 쌓여있는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 무덤의 돌은 죽어야할 육체를 위해 죄악으로 가득차 있는 세상에서 그날까지 살아야 하는 인간고와 사회악의 총화입니다. 먹고 살기 위한 근심, 질병으로 인한 괴로움, 거짓과 미움과 다툼에서 겪는 아픔, 늙고 죽는 슬픔 들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전쟁과 핵무기와 인공위성의 위협, 사상적 분열과 국제정세의 불안,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파탄, 도덕적 문란과 종교적 타락 등 우리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세계적 현실의 중압은 치명적이고 위기적이며 종말론적인 것들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이 무덤의 돌을 옮겨줄가 하는 문제는 인류의 궁극적 과제이었습니다. 이 과제는 인간 자체의 힘으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죄와 사망의 문제가 그 근저에 가로놓여 있기 때문에 숙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우리를 위해 이 돌을 옮겨줄가 하는 인생과 만물의 탄식은 숙명의 노래의 후렴이었습니다. 그것은 [시지푸]의 신화를 연상하게 하는 숙명의 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의 아침은 왔습니다. 절망과 죽음의 무덤속에서 부활은 생명력의 필연적 현현으로 역사속에 산 사실로 계시되었습니다. 이 부활의 사실은 인간의 주관적 염원이나 절망과는 r계없이 역사속에 나타난 객관적 계시였습니다. 이 역사적 계시는 인간의 이성이야 긍정하든 안하든 엄연히 역사와 세계를 향하여 외치는 진리의 선포로서 사망이 생명을 결단코 음부에 가두지 못한다는 승리의 복음입니다. 어둡고 괴로운 길고 긴 죽음에의 행진인 역사의 밤이 지새는 역사의 분수령에서 우리는 감격에 떨며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너무 벅찬 사실이기 때문에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하는 것이 예나 이제나 옅은 인간의 이성이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있을수 없는 사실이라고 부정하는 천박한 상식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반론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전제 아래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가사 상태에서 회생한 것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모한 나머지 본 환상이든지 그것도 아니면 제자들이 옮겨간 것이거나 원수들이 도적해간 것이거나 그렇지도 않으면 만들어낸 신화일 것이다. 이렇게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여인들도 믿지 못했고 제자들도 믿지 못하고 도마도 못믿어서 실증을 요구한 것을 아무도 꾸짖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실로 차디찬 이성이나 제한된 경험이나 상식으로는 부활은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부조리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확신과 열의를 가지고 변증한대로 전 우주는 부활의 가능성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희 뿌리는 씨가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희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나니라”(고전 15:35~38). 썩은 밀알에서 돋아나는 새싹, 마른 나무에서 초봄 엄돋는 새순, 유충에서 성충으로 비약하는 생명의 과정, 계란에서 병아리로 부화되는 생명의 현상 등으로 보아 차원을 달리하는 세계에 연속하는 생명의 법칙을 부인하는 자들은 그는 어리석은 자여, 하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신앙은 지성의 승인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멍청한 지성만이 진리를 아는 길은 아니다. 부활의 신앙은 사랑하는 이를 무덤에 묻고 쓸쓸히 돌아오는 길에서 깨다를 수 있는 진리다”하고 내촌씨가 말한 것을 옳았습니다. 새로 쌓아올린 무덤 곁에 서서 부활의 진리는 관념이나 교리로써가 아니라 또 미래의 소망으로만 아니라 현재적 신앙으로 육박해오는 실존인 것입니다.

죄에 매인 육체가 고통의 멍에 아래 신음하다 필경 죽는 것은 숙명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처음익은 열매로써 우리도 영과 함께 썩고 죽지 않는 영화한 몸으로 부활하는 그날을 사모하며 기다리게 합니다(고후 5:4).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은 이 완전한 생명관의 계시며 실증으로 우리 소망의 보증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26)고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청하십니다. 산자와 불사의 신앙, 죽은 자의 부활의 신앙은 죄와 사망을 이미 정복한 신앙인 것입니다. 종말에 있어서 죽은 자의 육체의 부활과 산자의 영화된 육체는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완성한 인간 생명의 본연의 자태입니다. 인간은 죽으면 육체는 썩고 만다. 영혼만이 불멸의 것으로써 죽음 저 피안에서 영생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저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저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함이라”(고후 5:4). 여기 영생의 희망이 부활로 성취되는 진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사실로 실증되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 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히라라”(고전 15:51~54).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주님의 수육과 육신을 무덤에 벗어놓고 영으로만 훨훨 하늘나라로 가시지 않고 기어이 부활하신 몸으로 승천하시고 그 몸으로 재림을 약속하신 소이가 여기 있습니다. 인간뿐 아니라 자연과 우주 전체가 영화된 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영화된 세계에서 영화된 육체가 영생을 누리는 것을 그리스도의 부활은 실증합니다.

그러기에 굳게 닫힌 돌문을 여시고 사망 권세를 깨뜨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실이 역사적 사실일뿐 아니라 또 미래에 이루어질 영원한 소망일뿐 아니라 현재적인 생명신앙으로 우리를 고무하는 것입니다. 불의가 공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는 시대에, 전쟁이 평화를, 공포가 희망을 억압하는 자유를 혼란이 질서를 분열이 통일을 미움이 사랑을 거짓이 참을 죽여 무덤에 봉하려는 흑암의 권세를 향하여 그리스도는 오늘도 살아계셔서 진리와 정의와 생명의 승리를 천명하십니다. “진리는 멸하지 않는다. 자유는 빼앗지 못한다. 죄와 사망이 의와 생명을 결단코 무덤에 봉하지 못한다”는 사신(使信)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 위기와 종말로 전락하는 세계를 향하여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5:56~57). 이것은 바로 부활의 신앙에서 사는 이의 개가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선생과 같이 부활의 신앙에서 살고 죽어 그날을 기라리는 천천만 성도와 함게 이 개가를 드높이 부르고져 합니다.

(필자 : 전주 남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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