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title_s6_5_2.gif
 

어린 아이의 마음 [마 19:13~15] - 강신정 목사

비전2015부 (기타,,목사) 2014-03-21 (금) 17:32 6년전 3346  
회보 2권 5호

1958년 5월 10일

“어린 아이의 마음”
마태복음 19:13~15

강신정 목사

요한 웨슬레 선생이 “어린이와 꽃”이란 제목으로 설교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 땅 위의 교회들이 해마다 지키는 “어린이 주일”의 시발점이라고 합니다. 웨슬레 선생이 그 설교를 한 지 171년째로 접어드는 오늘! “어린이 주일”의 행사는 해마다 다채로워가고 있습니다.

과연 어린 아이들이란 가정과 사회에 있어서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없는 가정과 사회를 상상해 보십시오. 거기야말로 꽃 향기 풍기지 않는 쓸쓸한 사막일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평범하고도 심오한 주님의 가르치심을 배워야겠습니다. “사람들이 만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주님이 계신 곳으로 모여왔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이 반갑지가 않을뿐 아니라 성가시게 생각되어서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셔서 책망하신 후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니라”하는 기이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려면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린 아이로서 천국 시민의 표준을 삼으셨습니다. 이는 곧 “어린 아이의 마음”을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어린이주일”은 어린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요체되겠지마는, 오늘은 “어린 아이의 마음”에서 우리 어른들이 배워야 할 기본적인 것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부모를 의지하는 마음

부모에게 대한 어린 아이의 믿고 의지하는 신뢰심(信賴心)은 문자 그대로 절대적입니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부모를 떠나면 죽을 줄만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의 마음”입니다.

어떤 곳에 식물학자가 식물 채집을 하기위하여 산으로 들로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하루는 깍가지른 듯한 절벽에 있는 신기한 풀을 발견했습니다. 발견한 것은 기뻤으나, 혼자서는 어찌할 길이 없었습니다. 때마침 가까운 곳에서 소를 먹이고 있는 한 소년을 발견하고 “얘야 내가 돈을 얼마 줄터이니 이 밧줄을 잡고 내려가서 저기 보이는 신기한 풀을 캐어가지고 올라올 수 없느냐?” 한즉 “돈은 안받아도 좋아요,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오셔서 이 밧줄을 잡아주신다면 할 수 있습니다”하고 달려가서 아버지를 모셔다가 줄을 잡게 한 후에 안심하고 내려가서 그 풀을 캐어가지고 올라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와같이 부모에게 대한 어린 아이들의 신뢰심은 절대적이어서 틈이 없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이 점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신경 서두에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입술로만 외울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절대 신뢰하는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전심 전력을 기울여 신뢰하여야 합니다.

1. 역경(逆境)에서

젊은이들 중에는 역경에서 자기의 부모를 탓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나도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고비에 종종 부딪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부모님을 원망스럽게 생각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신자들 중에서도 순경이 아닌 역경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도리어 원망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신다면, 그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왜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들으면 아마도 정당한 불편으로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불평을 긍정할 수가 없습니다. 즉 “역경은 반드시 보다 참된 축복의 약속”임을 믿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일주야중 가장 어두운 때가 축복의 새 아침에 가장 가까운 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개인적이건 사회적이건 가장 괴로운 진통 속에서 고통할 그 순간이 곧 보다 나은 새 날의 탄생을 위한 어두움의 고통일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 때야말로 다른 어느 때 보다도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하고, 신뢰할 때인 것입니다.

여러해 전에 내 아내와 같이 고추 밭에 나가서 김도 매고, 고추도 솎고 했습니다. 그때 세 살 난 딸 아이가 어머니 뒤를 따라가면서 어머니가 적당하게 세워 놓은 고추를 차례 차례로 깨끗하게 뽑고 있었습니다. 한평가량 뽑았을 때에 어머니가 알고 궁댕이를 두어번 때리면서 야단을 쳤습니다. 세 살난 딸은 눈물을 흘리면서 설다고 울었습니다. 울면서도 일을 계속하고 있는 어머니 곁으로 가더니 어머니 등에 팔을 벌리며 엎이는 것이었습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의지할 이는 어머니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를 맞지 않던 때보다도 매를 맞는 그때야말로 좀더 의지하지 않으면 안될 존재였던 것입니다. 역경에서 하나님을 원망한다던지,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신앙을 저버린다든지, 심하면 스스로 생을 저주하고, 생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는 다 역경의 참된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고난 다음에 무엇이 오는 것임을 모르는데서 지어지는 장난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교회 및 민족적으로 직면한 역경이 그 정도가 심하면 심한 것 만큼 그때야말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품 속으로 뛰어들어 그만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신사 참배를 강요 당하던 때나, 6.25의 역경이나, 38선, 정전선의 괴로움 등은 다 이 땅의 교회와 민족으로 하여금 좀더 하나님의 품안에 묻어 있어 참된 은혜의 생활을 하도록 하시려는 사랑의 채찍임을 깨닫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뢰해야 할 때는 괴로운 역경에서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발자취야말로 70년이란 바벨론 포로 생활의 괴로움을 통하여, 더욱더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2. 순경(順境)에서

흔히 사람들은 순경에서는 역경의 경우보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훨씬 편리하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언제나 실패하기 쉬운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역경보다도 순경이 더 위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모든 경영이 뜻과 같이 잘되어 가면 하나님 신뢰의 필요성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희박해지는 반면에, 자신의 힘에 대한 믿음성이 급속도로 커지는 것입니다. 그때는 벌써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어른이기 때문에 부모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어린 아이의 생활같은 것은 도리어 거추장 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정말(丁抹)이란 나라는 무리 세태에서 “농민의 낙원”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전 국민의 98퍼센트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독교 국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농본국인 우리 한국인에게는 상당한 기간 동경의 대상이 되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들려 오는 소식중에는 “정말 국민의 성도덕이 일반적으로 낮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찍이 절망적인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과 이웃과 땅을 사랑하자”, “밖으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고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과연 그들의 땀은 헛되지 않았으며, 상당한 가긴 남 부럽지 않은 유족한 생활을 살아왔습니다. 이와 같이 순경에서 지내는 중에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신뢰해오던 절대적인 “어린 아이의 마음”을 잃어가고 있다는 증후가 나타난 줄 압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언제나 순경에서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우리 나라 교회도 1907년 이래 교회 사상에서 보기 드문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인간의 역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참된 의미에서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하나님 신뢰에 전적 봉헌자들을 통해서 일으키신 부흥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내는 중에 점점 “어린 아이의 마음”에서 부모를 의지할 필요가 없는 어른의 마음으로 옮겨 갔습니다. 사실 교권을 남용하던 최근의 슬픈 연극들이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언제 어디서나 어린 아이의 순전한 마음을 잘 간직하는 것이 귀한 일입니다. 그리고 순경에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밖에도 어린 아이의 젖을 사모하는 마음이라던가, 모방심, 경쟁심, 화목심, 주기를 좋아하는 마음, 자랑하는 마음 등등의 배울 점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가장 기본이 되는 “어린 아이의 절대적인 신뢰심” 만을 말씀드렸습니다. 역경에서나 순경에서나 부모를 신뢰하지 않고는 죽을줄만 아는 어린 아이의 마음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긴요합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들의 신앙 상태가 하나님만 신뢰하던 순전성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계의 기본적인 문제는 신앙의 재건에 있다”고 지적한 비오 19세에게 보낸 트루맨씨의 편지의 1절은 온 인류가 듣고 실천해야 할 보배로운 설교입니다.

이는 돌이켜 어린 아이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하는 절대 겸허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절대 신뢰심의 열매일 것입니다.

(필자, 김천 평화동교회 목사)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 츲ҺڻȰ 忩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п ⵶̰߿ 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