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title_s6_5_2.gif
 

그리스도의 뜻이 주관하는 삶 [롬 2:17~19] - 안언약 목사

비전2015부 (기타,,목사) 2014-04-15 (화) 14:30 6년전 3563  

[회보 210]

 

그리스도의 뜻이 주관하는 삶

로마서 2:17~29

안언약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들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자라 자처하고 있는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오히려 그 율법이 여지없이 짓밟혀지고 있는 한 사실을 본다.

 

즉 이 성경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유대인들은 말하자면 율법의 자손들이라 하겠는데 저희들이 저희들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율법이 오히려 그 유대인들로 인해 비관할 정도로 짓밟혀지고 무시되어지고 또 이용당하고 있는 사실인 것이다. 즉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도적질말라고 가르치는 바로 그 사람에 의해 강도질이이루어지고 있고 간음치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에 의해 간음이 행해지고 있으며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그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가르치면서 자신은 하등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오히려 태연하게 우상을 섬기고 있는 사실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삶의 한 방편이 되어지고 또는 삶의 한 자본으로서의 위치에 서 있는 종교로서 이는 그 율법과 그 종교가 무력하고 무책해서가 아니라 그 율법과 그 종교의 신봉자라 하는 사람들이 그 율법과 종교에 대해 진실되지 못함에 기인하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오늘의 우리들에게 있어서의 기독교는 어떠한가?

 

신교가 우리 한국에 들어온 지 이미 70여년이 되었다. 그 동안 우리들은 많은 설교를 들어왔고 기독교교육을 받아왔으며 또 각종 회의를 통해서 혹은 학적인 입장에서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여하튼 신앙의 상호적인 면에서도 세계 교회와 갖은 연락을 가진 한국기독교회의 명성이 타국의 그것에 못지 않게 널리 알려지고 발전되어 왔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들은 자신을 다시 한 번 반성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그것이 진실된 신앙적인 면에서이냐 혹은 직업적인 면에서이냐 함에서인 것이다. 왜 그런고 하지 우리들의 삶이란 부단히 환경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제적인 삶은 종교적인 삶의 밖에 있는 문화적인 삶의 경향이 부지불식간에 우리들의 신앙에로 빚어지게 되어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신앙과 상반되는 신앙이념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야 우리들의 마음 속에 뿌리깊게 박혀지게 되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옳은 기독교신앙이라고 자신하는 경우가 없지않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그는 말하기를

 

혹자는 내가 기독교에 2개 종류의 기독교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나는 신약의 기독교가 참 기독교이요 그 이외의 것은 참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과 또 신약의 기독교가 아닌 것은 네모(사각)난 것이 원()일수 없는 것 이상으로 기독교가 아니라는 데 대해서 나의 의견을 굽힐 수는 없다고 한 것이다. 즉 저는 자칭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 속에서 참된 기독교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식화한 기독교에서 경원되어지거나 혹은 탄압을 받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참된 기독교인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사실은 오늘의 우리들의 세계에 서로 마치 한 가지로 통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의 우리들에게 있어서의 기독교 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상식적인 기독교로 변질되어지고 말았다. 기독교가 상식화했다 함이 표면적으로 볼 때에는 좋은 현상인 듯이 생각해질지 모르나 사실에 있어서는 그것은 맛 잃은 소금과 같은 종교가 되고 말았다 함이 되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맛을 잃은 종교, 그것은 시간의 세계에 사는 육적인 사람의 생을 위한 하나의 방편은 되어질 수 있을지 모르나 영원에 통하는 종교로서의 사명은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앙의 삶이라는 것, 그것은 원래 시간의 세계에서만의 삶이 아니라 시간의 세계에서 살면서도 영원에 속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가르쳐서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삶에는 영원에 통하는 일정한 법칙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 사도도 그의 사랑하는 자 디모데에게 교훈하야 말하기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함으로서 그의 삶으로 하여금 일정한 범위내에서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임을 자각케 하고 그 신앙의 삶에 잘못됨이 없기를 경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신앙의 삶을 한다하는 사람들이 지켜야할 법이란 무엇일까. 저는 항상 하나님 앞에 선 자기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닐가 생각한다. 하나님 앞에선 자기 그 자기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그 모든 독립성이 완전히 박탈되어지고 철두철미하게 복종만이 하나님으로부터 강요되어지고 잇는 자기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선 자기에게는 어떠한 종류의 교만도 허용되지 않는 것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선 자기에게는 자기의 공덕도 재간도 특권도 기타 그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선 자기는 자기의 손으로 자기가 가진 그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내어 놓지 않을 수 없게 되어지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오늘까지의 자기의 능동적이던 삶을 주님의 능동에 의한 수동의 삶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 실례를 바울 사도의 교훈에서 들을 수 있다. 즉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야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런고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7~8).

 

이 말씀에 의해서 볼 때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됨으로부터 자기에 관한 모든 것을 주님께 가져다 바치고 완전히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지배하에 들어가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수동의 삶에서 시종하였던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것보다 더 구체적인 바울의 고백을 빌 3:4 이하의 말씀에서 읽을 수 있다. 거기에 기록되어진 바의 바울 사도의 삶의 태도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구약을 법이나 또는 기독교 정신에 영향받아 이루어지는 사업 등에 정통하거나 유능하다 해서 이루어지는 삶의 태도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나의 정신으로 하고서 살아 나가는 삶을 통해서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삶인 것이다. 왜 그런고하니 원래 신앙이란 율법이거나 사업 아닌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람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진실된 삶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헬라어에 있어서의 진실 즉 피스토스는 신앙 즉 피스티스와 통하는 것으로 이것을 보아도 진실이라 하는 것이 신앙의 사람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 알만한 문제인가 한다. 즉 신앙의 사람은 이 세상살이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의 앞에선 자기로서 진실하게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해서 하나님의 앞에선 자기의 모습을 진실된 눈으로 보고 그 하나님의 앞에선 자기란 완전히 하나의 종임을 발견하게 될 때 그때 저에게는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의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는 자기임을 자각케 될 것이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뜻에 진실되이 순종하면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자신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자기에게 있어서의 이러한 삶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이루어 졌다고 했다. 사실 사람은 하나님을 진실로 알고 그 하나님을 그의 삶의 출발점으로 할때에만 자기의 참된 삶이라는 것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삶 그것은 자기를 만물의 척도로 삼고서 살아가려 하는 삶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죄라 하는 것 불의라 하는 것 우매라 하는 것이 정당하게 이해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저는 다만 자기를 거스리는 데에서만 이들을 찾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무식함에서 오는 결과인 것이다. 무식이 일견 평안한 길임과 같이 생각되어질는지 모르나 그러나 그 무식은 마침내 자기를 파멸로 이끌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하여 무엇이며 우리와 어떠한 관계가 있으며 또 그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일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야만 한다.

 

나는 전일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책자를 읽는 중에 이러한 글이 있는 것을 보았다.

 

내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그리사면 소를 잡아 제단에 드리리다. 그러나 만일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당신이 제단을 불살으겠나이다고 한 것이다.

 

이 사실 중에 한 신이 신적인 위치에 모셔져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신은 인간의 뜻에 굴복하여 인간의 만족을 채워주기 위한 이용물로서 있을 따름이요 따라서 그 신이 신으로서의 자기의 사명을 완수치 못할 때는 그는 그의 신봉자들에 의해 불사름을 당치 않을 수 없는 비참한 존재로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은 아니신 것이다. 당신의 손으로 구름을 펴기도 하시고 이를 거두기도 하시며 이 땅에 비를 내리기도 하시고 이를 거두기도 하시며 인간들의 생명을 거두기도 하시고 이를 연장시키기도 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들의 하나님은 창세기에 나타나신 그대로 오늘도 그렇게 이 천지간에 창조의 사업을 이루어가고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 하나님에 대해 우리들은 우리들의 설 자리를 알아서 설 자리에 서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설 자리를 알아서 설 자리에 서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들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의 사람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능동에 근거한 수동의 삶이라 하겠다. 즉 문화적인 생에 있어서의 삶의 주체는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하고서 자기를 실현코자 하는 인생이다. 그러나 신앙적인 생에 있어서의 삶은 그와 정반대로 인간을 초월한 주체 즉 절대 타자로서의 하나님이 그 주체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신앙의 삶에 있어서는 언제나 하나님께의 영광을 위한 복종만이 요구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앙의 세계에서는 자아의지에 타인의 굴복의 강요가 허용되지 아니한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 세계에서는 그리스도 이외의 그 하자도 나를 따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제아무리 그리스도의 이름을 크게 붙여서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자라 할지라도 저는 나를 따르라 할 수 없는 자인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저도 하나의 피조물로서 완전한 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참된 기독자에게 요구되어지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에게로의 복종뿐인 것이다.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에는 어떻게 하면 내가 교회적인 지도자의 자리에 설 수 있을까 하는 일종의 허영심이라 할까, 영웅심이라 할까, 여하튼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이와 같은 생각은 일견 좋은 생각인 듯이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이야말로 신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이 보호하려 하는 어리석은 것으로서 미운 물건이 서지 못할 자리에 서는 결과로서의 말세의 징조일 따름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러한 위대한 지도자보다 진실된 봉사자를 요구하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오늘의 한국교회에는 위대한 지도자와 교회의 수호자는 많으나 그러나 그 교회를 위해 몸 바치고 마음 바쳐 봉사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려 하는 사람이 없어서 허물어져 가려하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복종 그것은 지식이거나 관념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삶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선 자기로서의 진실된 삶인 것이다. 그 삶은 명령에 의해 움직여지는 삶인 것이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자기를 아버지의 의지에 전적으로 위임하고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대로 행동해야 하는 삶인 것이다. 오늘의 한국 백만신도들 가운데 이러한 삶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 오늘에 한국교회의 신앙은 신약의 신앙이라기 보담도 확실히 하나의 상식화한 신앙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이제 결론적으로 우리들의 그리스도 신앙의 목적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리스도 신앙의 사람의 삶의 목적이 자기 아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 영원히 그를 기쁘시게 함에 있는 것임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롬 8:5 이하에서 바울 사도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라고 함으로써 육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음을 밝혀 놓았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다시 계속해서 말하기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을 우리들의 마음 속에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 이로써 하나님을 영화로우시게 할 수 있는 자 될 수 있음을 밝혀 놓았다. 이로 미루어볼 때 우리들의 신앙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뜻이 나를 주관하시게 함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겠다. 환원해서 우리들의 신앙의 목적은 나의 뜻에 그리스도를 굴복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에 나의 뜻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현재의 나의 삶의 태도는 어떠한가? 오늘의 우리들은 그리스도 신앙을 육적인 자아만족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한다 하면서 사실에 있어서는 예수를 모르고 있지나 않은가? 오늘의 우리들은 교회적인 사업 가령 건축사업이나 자선 사업이나 혹은 교회 총회를 한다 하면서도 예수님은 모르면서 이들을 행한다 하는 무지의 열심꾼이 되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오늘의 우리가 만일 그러한 자리에 선 자라면 그러한 우리가 곧 본문에 기록되어진 사실대로 율법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바로 그 자신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 자인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로우시게 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호를 빙자하여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반역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고로 오늘의 우리들은 오늘의 본문을 주의깊게 상고하는 중에서 그리스도의 뜻이 진실로 나를 주관하시는 자로서의 삶을 가짐으로써 참된 신앙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영화로우시게 또 영원히 그를 기꺼우시게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신자가 되기를 노력하사이다.

 

[서울 수도교회 목사]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 츲ҺڻȰ 忩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п ⵶̰߿ 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