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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인도를 따라 [마 2:1~12] - 조향록 목사

비전2015부 (기타,,목사) 2014-05-09 (금) 14:52 6년전 3082  

별의 인도를 따라

마태복음 2:1~12

조향록 목사

 

동방 파사의 박사 세 사람이 별을 따라 우리 주님이 어린 아기로 나신 베들레헴에 이르렀습니다.

 

동방 파사 사람들은 밤 하늘에 총총한 별을 보고 우리들처럼 무심히 지나지는 않았습니다. 망망한 사막, 넓을 벌판에 살면서 밤이면 그 먹칠한 듯한 어두움을 이 세상인 듯 생각하였고 창공에 반짝이는 뭇 별을 보고서는 저 별이 바로 땅 위에 사는 인간의 혼()인가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 이 세상에 태어나면 하늘에도 별 하나 더 생겨지고 사람이 하나 죽어가면 하늘에 별 하나 없어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 하늘 창공에 저마다 나의 별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 별, 내 생명의 별을 쳐다보는 것이 살아 있다는 자기 실존에 대한 즐거움이요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내 생명의 표상 저 별이 있으므로 해서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었고 그 별, 내 생명의 별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내 운명의 광채가 더 빛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즐거워 하였습니다.

 

때로 먹구름장이 사정없이 밤하늘을 덮는 밤이면 하늘의 별, 그 내 생명의 별을 볼 수 없어 내 지상의 존재도 그만 죽엄에 들어간 것처럼 사는 보람을 잊어버리고 사실상의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이 사막에서 사는 유목민들은 뜨거운 열품이 부는 낮이면 온갖 활동이 정지되고 밤이 오기를 기다려 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항상 나그네의 생활로 살아가는 이 백성들은 밤길을 걸어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데 저 하늘의 별은 바로 그들의 인도자요 길표이며 방향선인 것이었습니다. 동으로 가려든가 서쪽으로 가려는 사람, 남쪽으로 혹은 북쪽으로 가고 싶은 이 대상(隊商)들은 오직 이 넓은 사막에서 밤 하늘의 별만이 그들의 묙포요 길장인 것이었습니다.

 

여기 동방에 세 박사님들이 밤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문득 이상한 별을 보았다 합니다. 이 별은 그들의 앞장을 서서 행진하였다 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모든 일들과 소유를 잠시 내어버리고 이 별의 인도를 따라 길을 떠났다 합니다. 이 별은 넓은 아라비아의 사막을 건너게 하였습니다. 험준한 계곡, 높은 산, 산과 시내를 넘고 건너게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별은 베들레헴 상공에 머물렀습니다. 이 별 아래에는 우리 주님이 말구유에 방금 태어나 누워 있는 것입니다.

 

이 박사님들은 이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고 그 앞에 공손히 경배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나는 이 성경말씀에 우의적인 해석을 붙여보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저 유명한 근대 철학의 비조가 되는 임마누엘 칸트의 유명한 말 저 창공에는 빛난 별이 비추이고 인간의 가슴 속에는 맑은 양심이 빛난다는 말을 여기 붙여 생각하고저 합니다.

 

파사의 점성술이 인간의 운명을 저 창공의 별과 인연을 짓는 것, 칸트가 인간의 양심과 창공의 별과 서로 관계를 지은 것은 우연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에 또 다시 이 별이 예수님의 강탄에 세 박사를 인도하여 그 앞에까지 이르게 하고 그 다음 그 별은 없어졌다는 이 인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여기 숨어있는 깊은 뜻을 파악하여야 하도록 강하게 자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달을 접어들어 초순만 지나면 벌써 크리스마스의 기분이 완연히 들어옵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성탄을 기다리는 조바심이 없지 않습니다. 성탄을 경절로서만 아니라 정말로 우리 주님을 그 어지신 우리 주님을, 내 생명의 우리 주님을 반겨 만나고 싶은 충동을 금치 못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을 살펴봅니다. 그 첫 고찰이 오늘 이 박사들의 사실이요, 그 별의 사실입니다.

 

이 성경말씀은 분명히 금년 성탄을 맞이할 우리들에게 이 세대에 주시는 예비적인 경고요 전언인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세대가 캄캄한 밤이올시다. 이 역사 위에는 지금 사막의 열풍이 마구 불어와서 흥감하게 자라고 익어가던 문명의 성장과 열매가 지금 모조리 시들어 가고 말라가고 타서 죽어가는 참상을 우리 눈 앞에 보고 있습니다. 동서사면을 돌아 보아야 어디서 헤치고 나갈만한 방향이 보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민족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 황폐하고 퇴락한 산천은 재건할 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한해도 마치 죽어가는 어머니의 가슴팍에서도 한방울 피와 같은 젖을 사정없이 짜내어 제 배를 불리려고 덤비는 철부지처럼 이 땅에 기름을 짜내어 쌀이 몇 천만석이니 잡곡이 몇백만석이니 하지만 헐벗은 이 땅 메마른 이 강토를 살찌게 하고 비옥하려 하는 노력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할 마음이 없어진 사회에 어디 산천을 사랑할 마음이 생겨 나겠습니까?

 

진실로 캄캄한 한 밤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사막을 건너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넌 그 곳에 나셨다고, 구원 받을 유일한 길이 보여진다고, 사람의 가슴 속에는 양심이 별빛처럼 빛나고 또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별빛의 명령 양심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어야 주님을 찾아 만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 설 자리에 바로 서고야 구원의 길이 보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바른 양심에 돌아가 서야만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그러므로 에밀 부룬너의 말과 같이 엄격한 의미에서 신학은 인간학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양심의 지표를 잃어버리고선 하나님이 찾아지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선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슴 속에 맑은 양심을 찾아내어야 하겠습니다. 페루시아의 하늘에 뜬 한 별은 그때 그들만이 볼 수 있었지만 오늘 우리 가슴에 빛나고 있는 양심은 누구나 언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양심없는 인간 이것은 벌써 개나 돼지에 비할 인간인 것입니다. 양심이 없으면 예의염치를 모릅니다. 무엇이 예절이고 무엇이 의와 불의이며 무엇이 정결되고 무엇이 부끄러움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선 양심을 찾아내여야 합니다. 인간의 인간된 존엄성은 양심의 소유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어느 한편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양심일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부끄러운줄로 아는, 잘못하였으면 미안한 생각이라고 통절히 가지는, 누구에게 피해를 입혔으면 진실로 부끄러워하는, 양심있는 인간이라도 위선되고서야만 그 눈 앞에 하나님이 보일 것이 아닙니까?

 

최근 일본 귀족원에 어느 대의사는 자기의 맞아들이 축첩을 했다고 해서 한 민족의 지도자의 자리에 앉을 수가 없다고 위원을 사임한 일이 있었습니다. 수양대군은 자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자기가 왕권을 잡은 후에도 나중에는 그 양심이 찔려서 명산대찰을 손수 찾아다니면서 속죄의 길을 찾아 해매였습니다.

 

오늘 양심의 파산을 당한 이 민족, 오늘 양심의 파산을 당한 이 교계, ‘축첩자가 장로의 명부에도 집사의 명부에도 심지어 목사의 명부에도 오른다는 이 세대그것을 미안하게 여기고 죄책을 느껴 스스로 괴로워도 않는 이자들을 하늘이 무심치 않다면 축복을 주겠습니까, 천벌을 내리우겠습니까.

 

동양 사천여년의 문명사는 모세의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씀, 그리고 하늘의 영웅 복음의 말씀을 받지 못하였으나 이 양심의 명령을 절대로 알고 예의염치를 지켜 그 질서, 그 문명을 이어 내려온 것입니다.

 

오늘날은 새 문명을 낳아놓은 기독교 도덕도 아니고 우리들의 조상들이 물려준 양심의 명령법도 아닌 완전히 금수의 자리에 떨어져 버린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양심을 찾는 운동을 일으켜야 되겠습니다.

 

다음 양심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그곳으로 가자고 인도합니다. 그곳 참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곳으로 우리를 이끌려고 합니다. 진리의 길로 정의의 자리로 가자고 명령합니다. 우리는 이 양심의 명령에 복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해가 양심을 앞서면 불의에 떨어집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양심의 명령을 어기어 직살을 하였습니다.

 

탐관오리가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양심이 아니라는 명령을 거부하므로 나중은 국가의 재산을 도적질한 놈이 되는 것입니다. 밀무역을 하는 자가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명령을 어기었을 때 그는 민족의 번영을 망쳐놓은 역적이 되는 것입니다.

 

양심의 명령을 헌신짝처럼 내어 던지는 때 그 국가는 멸망합니다. 그 사회는 파멸합니다. 그 교회는 멸절됩니다. 그 개인은 파멸합니다.

 

빌라도는 양심의 명령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을 잡아줄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자고 이래로 양심의 명령을 거부하는 자들이 역적 간신이 되고 그 후손들은 어디가서 설 자리를 못찾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 그것을 끊어야 됩니다. 양심이 명령하면 사지라도 나아가야 됩니다.

 

별을 따라가는 것이 박사들의 임무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양심의 명령을 따라 과감히 나아가야 합니다.

 

나중에 우리의 양심은 마침내 우리 주님 계신 곳까지 이르게 합니다. 그때 우리는 인간의 양심은 그 앞에 가서도 또 더 가고자 하면 안됩니다. 그 곳 거기 가서는 머물러 그 빛 속에서 자기를 감추어야 합니다.

 

인간의 양심은 절대적 선은 아닙니다. 인간은 그 양심마저 믿지 못할 때가 옵니다. 그 양심은 오직 그리스도에게 이르러 우리를 그 앞에 갖다 바치게하는 길인도자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의 율법은 몽학선생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 앞에 당도하였을 때는 별은 꺼져버렸습니다. 그 앞에 황금 유향 몰약의 예물을 바치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을 뵈올 때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채찍질하던 고역은 완전히 소멸되고 동시에 주님앞에 바치는 제사로서 변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맞이한다는 것과 그리고 주님 앞에 우리를 바친다는 것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 가슴에 켜졌던 적은 별빛은 크나 큰 태양 앞에 이르러 그 빛 속에 감추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의 세계는 은혜의 세계요, 은혜의 세계는 사랑의 세계이며, 거기는 인간의 의를 넘는 하나님의 의, 인간의 율법을 넘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통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법은 인간 양심의 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법을 거쳐 들어가서 붙잡는 것이며 속죄의 은총은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시대를 거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사막의 밤 하늘에서 별을 찾아 그 별을 따라 우리 주님의 탄생하신 앞에 이르로 예물을 바치었던 경로는 우리들에게도 우리 주님을 맞이하려는 때 같은 길, 인간양심을 발견하는 길, 그리고 그의 인도를 받아 주님 앞에 이르러 그 앞에 존재 전부를 바쳐서 제물이 되어 사는 길을 보여주시는 산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필자, 서울 초동교회 목사]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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