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title_s6_5_2.gif
 

수난, 사망, 부활 [고전 15:12~19, 50~58] - 이상철 목사

비전2015부 (기타,,목사) 2014-05-22 (목) 17:34 6년전 3625  

1959년 3월 10일

수난, 사망, 부활

고린도전서 15:12~19, 50~58

이상철

 

그리스도교는 부활의 종교라는 말은 옛날부터 있어온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부활절을 맞이하는 계절이 돌아오면 이 단언적인 말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은 몹시 요동되고 무엇인가 불투명한 고민스러운 심경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사건 사체의 불확실성 같은 것이 전제되어서라기 보다는 아마 이 엄숙한 사건 앞에 유한한 우리가 책임있는 입장에 설 것과 완전한 복종과 과감한 결단을 할 것을 강요당하고 있는 데서부터 오는 감당키 어려운 긴장 때문일 것입니다. 값싼 감격은 우리를 흥분시키고 도취시키지만 참으로 고귀한 감격적인 사건은 도로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번뇌하게 하고, 엄숙한 압박감을 느끼게 하며, 두려움과 환희 사이에 서서 떨게 하는 것이 진리인가 봅니다.

 

그리스도교가 부활의 종교라고 하는 말은 원시그리스도교회의 형성과정을 아는 우리들에게는 의미심장한 말인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하는 바는 첫째, 교회는 예수의 부활사건을 계기로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룩되기까지에 선행된 모-든 사건이 이 부활의 빛을 돌려 비취어 볼 때 그 뜻하는 바가 명백해졌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미래에 속한 모-든 사건도 역시 이 부활의 빛으로 다 밝히 예견되고 설명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과거 역사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신사와 신앙사는 이 고통의 문제에 대한 회의와 해결을 위한 몸부림과 고통에서의 탈출을 위하는 갈망이었습니다. 그들의 고통의 문제를 죄의 값, 훈련 등으로 생각해오기도 했지만 제2이사야에게 와서 고통은 세계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수난의 종의 사상입니다.

 

예수님은 이 히브리 민족의 수난사를 자신에게 적응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고난의 문제의 해결을 차원이 높은 세계에서 해결하여 했습니다. 옛 사람들은 인류를 위한 의로운 민족의 수난을 자각하고 인내하여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도로 찾는데 이르렀으나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을 통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인류를 돌아가게 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인류를 위하여 받는 수난의 승리의 사건으로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의 아침이 오기 전까지는 이 고귀한 예수의 수난의 가치를 이해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부활의 아침은 이 수난이 선행됨이 없이 온 것이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단순한 출가도인의 고행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수난의 극치는 사람의 골짜기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망이란 말이 없이는 부활이란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망의 쏘는 것의 치명적임을 모르는 자에게는 부활의 참 감격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망! 인간에게 있어서 이 말보다 더 치명적으로 무서운 말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사망은 인생을 송두리째 삼켜버리는 무저항입니다. 어느 마지막 지점에 가서 비로소 처음 만나고 몸서리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은 우리가 날때부터 우리 속에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우리 속에 있는 사망이 날마다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산다는 말은 우리 속에 있는 사망을 키운다는 말도 됩니다. 즉 인간은 나면서부터 사망할 실존임을 날마다 자각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이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불안과 공포와 절망을 품고 전전긍긍하는 노예의 생활을 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떤 신학자는 퇴조물감정이라고 합니다. 또 유한한 인간, 죄 아래 있는 인간이라고도 합니다.

 

이와 같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 사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허무하고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행복하게 지낸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가 이 사망에 삼키운 운명이라는 것이 명백한 한, 우리의 날마다의 행복은 침울한 순간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고난속에 있고 이 고난과 날마다 피나게 싸우면서 산다고해도 역시 이 곤고한 투사가 드디어는 사망에게 삼키운다고 생각하면 그의 모든 싸움은 무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근자에 와서 이 사망에게 삼키우는 것으로 끝맺는 인간의 무의미를 깨달은 이들은 인간의 종말이 이렇게 무의미하니 모든 것이 무의미해져서 내어던짐을 당하여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인간이라고 절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이 사망의 허무가 있었습니다. 그는 죽음에게 삼키움을 당하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바 사박다니라고 외쳤습니다. 그 허무의 골짜기에 던지운 후에 그는 영광의 부활을 은사로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단독적인 행위였습니다. 즉 위로부터 오는 일반적인 은혜였습니다. 이 은혜는 인간의 이성이 작용하는 인식범주에 들어오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성서 기자들은 이 사건에 대하여 어떤 논리를 전개할 대세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어난 사건에 대한 정직한 증인이 되려 했습니다. 그들은 빈 무덤의 이야기와 부활한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감격스러운 관계를 맺은 이야기와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자기들 속에 전혀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이야기들을 힘차게 전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서로 격려하기를 이 그리스도가 받은 영광을 우리도 반가워하여 그가 겪은 수난에 우리도 동참하자고 하였습니다.

 

부활은 악운에 시달리고 사망의 침노를 무시도 당하는 인간에게 영원한 희망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 찬란한 부활의 아침이 약속되어 있는 한 우리는 절망을 느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부활은 사망에게 종노릇하는 비운을 슬퍼하는 인간에게 주는 승리의 표증입니다. 빈무덤과 부활한 예수의 대면과 그의 승천 등을 목격한 신도들 앞에서 사망의 권세는 이미 무색해진 것입니다. 부활은 신속에 감추인 인류의 수수께끼를 완전히 풀어준 구체적인 해결입니다. 몸으로 부활하여 처음 익은 열매가 될 그리스도는 영혼불멸론의 표증도 아니며, 장생불로의 신선도 아니며, 가현설의 낮도깨비도 아닙니다. 그는 유한한 인간이 영원에게 안기우며 그 찰나에 썩어질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새로운 생명체로 나타나게 되는 신비한 은총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새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인간의 회의의 극치는 사후의 문제에 결려 있는 것은 누구나가 긍정하는 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회의에 명백한 해답을 주신 것입니다.

 

현대는 인간을 도로 찾으려는 의욕이 불타는 시대입니다. 그리하여 실존주의 같은 것은 모든 거짓의 두루마기를 입은 인간을 적나라한 벌거벗은 인간으로 내세워 보려고합니다.

 

인간을 도로 찾겠다는 말은 살겠다는 말입니다. 진리보다도 관념보다도 나라보다도 도덕률보다도 때로는 종교보다도 인간은 더 귀중하다고 생각해 보련느 것이 현재의 갈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인간은 죽음에 포위당한 위축된 생명이며 자율을 잃은 예속적인 실존인 것입니다.

 

이 곤경을 타개하려고 모든 문화를 총동원하여 본 것은 이미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권태로움을 잠깐 덜어주는 임시조치도 되지 못했습니다.

 

참되게 살기를 원하는 자는 유한에서의 업치락 뒤치락으로 일삼을 것이 아닙니다. 영원에서 내려오는 새 생명 속에 과감하게 뛰어들어갈 것입니다.

 

[필자 : 서울 성암교회 목사]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 츲ҺڻȰ 忩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п ⵶̰߿ 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