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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차 월요기도회 설교문(이병일 목사)

관리자 2014-10-06 (월) 10:09 9년전 2182  
제26차 평화통일 월요기도회 설교문
 
 
설교 : 이병일 목사(서울동노회 강남향린교회)
 
 
제목 :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본문 : 마태복음 4:12-17; 이사야 9:1-5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 13 그리고 그는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14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15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16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17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마4:12-17)
1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옛적에는 주님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받게 버려두셨으나, 그 뒤로는 주님께서 서쪽 지중해로부터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방 사람이 살고 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2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3 "하나님, 주님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4 주님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처럼, 그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5 침략자의 군화와 피 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사9:1-5)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이 활동을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이 본문에는 아직 설명이 없지만, 요한이 잡힌 이유는 헤롯왕의 부도덕성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요한이 헤롯의 행위를 보고 못 본채 하거나 에둘러 비판했다면 이렇게까지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겠지만 아주 노골적으로 비판하다가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결국 요한은 풀려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유대의 마지막 예언자, 불꽃처럼 말씀을 선포하던 세례 요한이 잡혔지만 그것으로 하느님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뚫고 자신의 통치를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새로운 역사는 ‘요한이 잡힌 후’에 다시 시작됩니다. 우리의 눈에 ‘요한이 잡힌 후’는 절망이지만 하느님의 눈에 그것은 오히려 희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것 너머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통치하시는 하느님에게만 의존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만을 의존하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이 희망은 결코 자기 욕망이나 미망이 아닙니다. 현실 도피적 망상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임하는 하느님의 통치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기다림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활동은 하느님 나라를 말씀과 행동으로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 시작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한반도의 역사와 정치적 현실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통일입니다. 남한과 북조선의 지배세력은 분단을 이용하여 자기 정권이 저지른 독재와 실정을 덮고, 허울 좋은 안보와 평화라는 명분으로 민중들을 지배해왔습니다. 전쟁의 임박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의 임박성을 유포하기 위하여 마치 전쟁 영화를 찍듯이 인위적으로 전쟁의 상황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소위 총풍, 북풍을 비롯한 국지적인 무력충돌, 그 외에도 이승복과 공산당, KAL858기 폭파사건, 천안함 좌초 등이 그들의 작품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음모에 의하여 어느덧 정신병에 걸려 있을 정도입니다. 노정선 교수는 이를 “분단 정신병”이라고 합니다. 불의한 지배세력의 준동을 막고 민중들의 분단정신병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남과 북의 평화와 통일이 그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체포 이후에 본격적으로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듯이 남한에서 통일운동을 하신 문익환 목사님을 학자에서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사도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하게 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문익환 목사가 처음부터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뛰어든 것은 아닙니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일제 식민지시대에 민족정기의 요람이었던 명동촌에서 살았던 경험은 그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짐작하게 합니다. 목사로서의 문익환은 성서의 번역에 대한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익환 목사는 한반도에 개신교가 전래되면서 한글로 번역된 성서를 통해 겨레의 정신이 깨어났고, 민중과 여성계의 문맹이 퇴치되었음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나라를 위한 운동으로 이어졌음을 주목했습니다. 문익환은 1960년대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 모두를 성서의 번역을 통해 변화시키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1970년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이 그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현대의 진보적인 인물들 중에는 전태일의 죽음이 사상적-신앙적 전환의 계기가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익환 목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태일 아닌 것들아 / 다들 물러가거라 / 눈물 아닌 것 아픔 아닌 것 절망 아닌 것 / 모든 허접한 쓰레기들아 모든 거짓들아 / 당장 물러들 가거라 / 온 강산이 한바탕 큰 울음 터뜨리게” (문익환 시 ‘전태일’ 중 일부분) 문익환은 전태일의 죽음을 통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시가 그의 정신을 움직였고, 그 다음은 전태일이 그의 육신을 움직였습니다. 청년은 죽었지만, 그 청년이 민중의 삶 속에서 부활했음을 문익환은 깨달았습니다. 그 또한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부활시킬지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1973년 긴급조치 1호로 해직된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갈릴리 교회를 세웠는데, 그 첫날에 장준하기 산에서 실족사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장준하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늦봄은 그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고 조사하게 되고, 단순한 실족사가 아닌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타살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늦봄이 장준하 영결식의 장례위원장을 맡으며 장준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장준하가 말했던 현실의 사회악이 무엇인지 절실히 파악했습니다. 문익환은 장준하가 바라본 한반도의 상황과 사회악에 동의하면서 장준하를 땅에 묻지 않고 역사 속에 살리고자, ‘사상계’에 실린 장준하의 사설들을 모아 책으로 펴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에 의해 인쇄가 불발되고 늦봄은 그 사회악을 더욱 절실히 느끼며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문익환 목사가 3.1민주구국선언문을 초안하고 조직하게 된 것도 장준하의 삶을 역사에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문익환이 역사에 대해 직접적으로 투신한 것은 단순히 절친한 장준하의 죽음에서 폭발한 단순한 혈기가 아닌, 아주 오랜 시간을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가?’라는 문익환의 신앙삶에 대한 고민을 통해 이루어진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목회자로서의 신앙삶은 단순히 종교라는 틀로 국한된 삶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한반도에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끊임없는 고민의 연속이었습니다.
 
문익환 목사가 민주화운동에서 통일운동으로 그의 행동의 적극적 전환의 계기가 있었는데, 바로 1986년 5월 20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에서 ‘광주항쟁의 민족사적 의의’라는 주제에 초청되어 강연을 하다, 눈앞에 학생회관 옥상에서 원예과 1년 이동수 군(23)의 투신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문익환 목사에게 통일은 그저 남과 북이 만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분단된 국토와 이념, 그 가운데 억압받는 자와 억압하는 자, 그 어떤 이유로든 갈라져 싸우느라 빼앗긴 민족의 능력과 자존심을 되찾는 일이며, 이 모든 한반도 근현대사의 엉킨 첫 단추를 다시 제대로 잠그는 일이었습니다.
 
벗들이여! / 이런 꿈은 어떻겠소? / 155마일 휴전선을 / 해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 푸른 바다가 보이는 산정에 다달아 /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 /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 / 합장을 지내는 꿈, /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들이 제대로 돌아 /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문익환 시 ‘꿈을 비는 마음’ 중 일부분)
 
목회자이자 민주통일운동가였던 문익환의 삶을 요약하자면, 첫째,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철저한 신앙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서 민주통일운동은 ‘민족과 한반도에 대한 종교적 섬김’이었습니다. 그는 목회자로서 ‘그리스도에서 사회로’를 외치고 고민했고, 민주통일운동가로서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외치고 고민했던 신앙삶이었다 말할 수 있습니다. 문익환 목사가 행동했던 신앙적 삶은 한반도공동체성 회복과, 한국 교회공동체성 회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가 바랐던 것은 이 혼란하고 복잡했던 그리고 고통 받고 상실되었던 한반도 공동체성의 회복이었습니다. 한반도의 온갖 ‘생명 바그라짐’을 ‘생명 아우러짐’으로 돌려놓길 원했고, 어떤 특정한 세력의 힘에 의한 불완전한 평화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로 바꾸길 원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혼란스럽던 한반도공동체성의 회복만이 아니었습니다. 한반도 근현대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한국교회사의 문제이며, 한국교회 공동체성의 회복이기도 했습니다.
문익환 목사는 이 시대와 이 민족을 향한 하느님의 파수군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에 암울한 탄압의 현실에서도 예수님이 기꺼이 활동을 시작하였듯이, 전태일과 장준하와 이동수의 죽음 후에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서 본격적인 파수군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의 한국교회 대다수는 문익환 목사의 우려에서 나온 섬김의 삶을 잊은 채 역사와 공동체성을 등한시했고, 도리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은 이들에게 문익환 목사의 신앙삶은 ‘예수의 사랑과 삶’으로 남아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문익환 목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처구니없는 꿈”으로 보이는 꿈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면서 행동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잠꼬대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 “잠꼬대 아닌 잠꼬대”가 되어 실현될 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 / 나부끼는 일이라고 /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잠꼬대 아닌 잠꼬대” 중에서) 그는 온몸으로 역사를 만들면서 역사를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또 문익환 목사의 삶과 신앙을 보고 들을 때에 그분이 위대한 분이라고 칭송하는 것만으로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분의 목소리가 나의 가슴을 때리고, 그분의 신앙이 나의 마음을 울리고, 그분의 삶이 나에게 와서 살이 되고 피가 될 때에 그분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모습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지만, 삶과 신앙에 대한 진실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자극이 우리의 삶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움직일 여지를 남겨둡시다. 내 생각, 내 욕심, 내 지식, 내 신앙으로 나를 꽉 채우지 말고 그분의 말씀, 그분의 믿음, 그분의 삶이 나에게 들어올 틈을 열어둡시다. 꿈속에서 계속 헤매는 이들에게는 잠꼬대이지만, 꿈을 이루려 애쓰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잠꼬대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깨우는 뇌성이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요한이 잡힌 후에 나사렛을 떠나서 갈릴리 지역의 가버나움으로 가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은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였습니다. 그곳은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써 멸시와 전쟁의 위협이 항상 존재하는 땅이었습니다. 가장 엄혹한 때에, 가장 비참한 곳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기장총회 평화통일위원회와 평화공동체운동본부가 주체가 되어 이 기도회를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열망이 식어가고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남과 북의 관계와 교류가 악화된 때에 시작하게 된 것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독일 통일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평화기도회처럼 이 기도회가 평화통일운동의 기폭제가 되어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을 완성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981년에 시작한 ‘평화를 위한 10일 기도회’가 1982년부터는 ‘평화기도회’를 월요일마다 하였고, 이 후에 미사일 배치를 반대하는 평화운동으로, 1989년 5월 대규모 탈출사태와 부정선거를 계기로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 평화기도회가 꿋꿋이 자리를 지키면서 시대의 흐름에 적절하게 대처하면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남한은 세계적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자랐다고는 하지만, 미국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중국의 확장을 막기 위한 변방 혹은 이방인의 땅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회귀한 독재정권에 의하여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본과 권력에 길들여진 언론과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자기의 모습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정치인들,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사로잡혀 박정희 박근혜를 신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그늘진 죽음의 땅의 어둠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통일 기도회가 이 시대에 던지는 의미가 더욱 큽니다. 또한 이 기도회가 이 땅의 많은 민중들에게 잠자던 의식을 깨우고,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기도회를 통하여 평화와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기어이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그 길에 함께 나서고, 그 일을 함께 감당합시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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