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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차 월요기도회 설교문(박경철 목사)

관리자 2014-10-15 (수) 00:18 9년전 3083  
제28차 평화통일 월요기도회 설교문
 
 
설교 : 박경철 목사(한신대 신대원 교학부장, 구약학 교수)
 
 
제목 : 한반도, 하나님의 얼굴
본문 : 창세기 33장 1-11절
 
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5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6 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7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8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9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10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11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창33:1-11)
 
하루는 예수님께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희에게 하나님을 좀 보여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하나님을 못 봤느냐, 내가 지금까지 너희들하고 함께 있었는데 아직까지 못봤느냐”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데, 그리고 내가 너희들하고 함께 있는데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못 봤느냐” 하고 말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금 말장난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아마도 의아하게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예수님께서 “그래도 못 믿겠느냐, 그러면 내가 하는 일을 통하여 믿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우리의 행위를 통하여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고민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 제자들 뿐 만 아니라 아마 오늘날 우리 기독인들도 때로는 “하나님을 한번 봤으면 좋겠다.”하고 원하고 기도할지도 모릅니다.
 
시편의 많은 탄식의 시들을 보면 실제로 기도자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내게로 비춰서 내가 주께로부터 은혜받기를 원한다고 기도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고난을 당하고 고통 속에서 울부짖으며 외칠 때 ‘하나님 어찌하여 당신은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돌리시나이까’ ‘주님, 언제까지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습니까?’ 하고 탄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전통 중에 또 다른 하나 전통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채가 너무 커서 감히 인간으로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하나님의 형상도 그래서 만들지 못하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권력자들이 자신의 통치수단의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그 신의 이름으로 그 모습으로 대신하려고 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토라를 받을 때에도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에게 내가 산에 지날 때 너희는 산에 오르지 말고 너희들이 등을 돌려서 혹여라도 너희 중에 누구가 나를 보면 죽을까 하노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께 소명을 받을 때도 그가 내가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 하고 두려워 떠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 내게 비췬다는 것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키신다는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는 그 위대한 하나님의 상을 상정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때로는 그리워하기도 하고 뵙기도 원합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혹시 지금 하나님을 뵙기를 원합니까?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의 얼굴이 여러분에게 비춰질까요?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단 한곳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었던 창세기 33장, 우리가 잘 아는 야곱에 형 에서를 만나는 장면에서 형님의 얼굴을 보게 되오니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고 하는 바로 이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길래 야곱이 형 에서를 향하여서 이렇게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했을까? 그건 무한한 상상을 동원해도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야곱이 어떤 하나님의 얼굴을 그렸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성서자체가 전체적으로 얘기하는 장면을 보면 바로 여기에서 매우 특이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모든 이야기를 통틀어서 아주 특이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형제들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하와에서 태어난 가인과 아벨은 살인까지 일어났고, 노아의 자녀들의 갈등의 관계들도 우리가 잘 알고 있으며,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도 역시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등이 나타나 오늘날까지 종교분쟁의 씨앗으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나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의 갈등관계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끝으로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서 형제들이 요셉과의 갈등관계로 창세기가 마무리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갈등관계를 하나로 집중하게 만드는 장면이 많은 이스라엘 조상들 중에서 유독 야곱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야곱과 에서의 문제로 이 조상들의 얘기는 이스라엘 뿐 만 아니라 이스라엘 주변 이방 나라들의 민족의 시원을 이루게 해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말라기서가 있는데 말라기서의 시작은 야곱과 에서간의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이 야곱에게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구약성서 마지막까지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과의 갈등관계에서 끝까지 풀리지 않는 민족이 바로 에서의 후손인 에돔민족입니다. 이스라엘과 에돔의 끊임없는 싸움얘기를, 끝까지 풀리지 않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얘기하고 그 다음에 오바댜가 얘기하는 에돔에 대한 심판의 얘기도 줄곧 끝나지 남았던 문제입니다. 구약성서 전체를 통해서 이 이스라엘과 절대 하나될 수 없는 이방민족, 그 민족 에돔이 사실은 그 시작 엄마의 태 안에서부터 이미 싸움과 갈등의 씨앗이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는 창세기 33장의 장면이 왜 이곳에 배치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바로 전 32장에 나와 있는 야뽁강의 야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천사와의 씨름 얘기로도 유명한 본문입니다만 사실 이 얘기는 구약성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얘기하면서 자기들의 시작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형 에서와의 만남 전날 밤 우리의 민족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일 에서를 만나게 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자기가 많은 부를 이루었지만 이제 한순간 모든 것들이 무너질 것 같고 생명과 모든 것에서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홀로 남아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이름을 받고나서 천사가 떠난 다음에 야곱이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구나.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는데도 내가 죽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렸던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는 그 전통에 사로잡혀 있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죽지 않았다. 그래서 그 장소를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이다’ 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장인 오늘 우리가 읽은 장면에서 형의 얼굴을 보고 ‘형의 얼굴에서 브니엘을 보았다’ 다시 말하면 형 에서의 그냥 얼굴이 아니라 밀접하게 그 전 32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습니다. 내 형 에서를 만나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두렵고 떨렸던 장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이 아니라 은혜가 되고 지금까지 시기와 분노와 미움과 갈등과 서로 화해하지 못하는 그 속에서, 갈등관계 속에서, 생명의 위협 속에서 살아갔던 그 때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고 그것이 이스라엘이 시작되었다고 구약성서 전체는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 전체에서 끊임없이 화해할 수 없는 에돔임에도 불구하고 그 에돔 너희들의 조상과 하나님의 개입을 통하여 우리는 너희들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증언하는 것이 구약성서의 증언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오늘 평화통일 월요기도회는 독일 통일에 있어서 많은 원인과 동기들이 있었지만 동독의 라이프찌히에서 교인들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기도한 것이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오산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유럽 탐방을 가게 되면 꼭 라이프찌히에 들러서 니콜라히 교회에 갑니다. 거기에 가면 그곳에 기도했던 사람들의 발자국들이 있습니다. 독일 통일을 만들었던 사람들, 그들의 발자국을 그렇게 남겨놓았습니다. 그래서 학생들과 가서 그 발자국에 자기도 서 보게 합니다. 그리고 촛불을 들고 잠시 기도합니다.
 
독일의 니콜라이교회 기도회가 시작했던 것도 큰 무리가 아니었습니만 그러나 통일을 이룰 때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의 물결을 이루었던 것처럼 지금은 작은 숫자의 우리들이지만 오늘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곳, 또 여러분들이 딛는 이 곳에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될 것이고 전국에서 라이프찌히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이 바로 이곳에 와서 우리들의 기도자리에 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단지 기도의 장소가 아니라 이 장소가 분단과 갈등과 시기와 서로의 싸움의 자리, 불안하게 떠는 자리에 하나님의 개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죽음으로부터 다시 생명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바뀌는 브니엘의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브니엘의 자리는 직접 야곱을 통해서 확인시켜 줍니다. 그것은 형 에서를 보고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북쪽의 사람들, 이상한 괴물처럼, 피흘리는 늑대처럼 그렸던 그런 것들을 씻어버리고 우리의 동포 민족과의 사랑, 그것을 넘어 기독교인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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