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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차 월요기도회 설교문(신연식 목사)

관리자 2014-12-30 (화) 21:36 9년전 2634  
제31차 평화통일 월요기도회 설교문
 
 
설교 : 신연식 목사(총회본부 정의평화선교부)
 
 
제목 :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본문 : 에베소서 2장 14-16절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15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16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엡2:14-16)
 
 
<평화를 위한 기도>
우리는 지난 사순절 첫 주부터 분단되어 고통받고 있는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하여 매주 월요일마다 기도회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독일의 통일에 있어서 라이프찌히에 있는 작은 기도모임이 불씨가 되어 통일의 새 장이 열렸던 것처럼, 분단 69년, 세계에서 가장 오랜시간 분단으로 고통받고 있는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매주 기도의 씨앗을 심고 있으며, 오늘 31번째 기도회로 드리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기도회를 이어가기로 한 만큼 하루속히 통일이 이루어져서 더 이상 이곳에서 기도회를 하지 않아도 될 그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습니다. ^^ 여러분도 그러시죠?
앞서 카리나 선교사님의 기도에서 말한 것과 같이 1982년에 시작된 독일 니콜라이의 평화기도회가 통일의 불을 지피게 되었던 1989년까지 약 7년의 시간은 그저 평화를 염원하는 작은 기도모임이었습니다. 그들은 서구의 군비증강에 항의하기 위해, 세계의 가난과 질병, 파괴되는 환경, 그리고 전쟁과 핵무기로부터 인류를 구해내기 위해 평화기도회로 모였고, 교회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은 교회의 입구에 기도제목을 적어 놓은 노란색 종이와 촛불을 놓습니다. 어느 누구도 훗날 이 기도모임을 통해서 통일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혹자의 말처럼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고 그것을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기도회가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기도를 통해 반드시 통일의 그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평화 부재, 우리의 현실>
최근 대북 전단 살포와 이를 중단해야 남북대화를 하겠다는 북한, 다시 이를 거부한 남한의 입장에 따라 2차 고위급회담이 사실상 무산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2012년 12월 남북관계를 역사를 되돌리던 이명박 정권이 끝나고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많은 이들이 남북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대선이 끝나고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대는 대부분 실망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남북대화를 가로막고 있는 5.24조치 해제, 민간교류의 활성화 등의 변화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북한 역시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으로 정권을 교체하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 2년을 맞은 오늘 남북관계는 평화 부재의 한반도 현실과 통일의 당위성만 부각시켜 놓은 것 이외 한 발도 진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전협정 60년을 맞은 지난 2013년 남과 북은 화해의 길은 커녕 서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신경전으로 대화와 협력의 기회를 놓쳐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오히려 남북의 긴장이 고조되고 전쟁위협이 극에 달했으며, 그동안 근근히 이어오던 개성공단마저 단절되고 이후 위축되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시절부터 이야기 해오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앙고없는 붕어빵처럼 신뢰없는 신뢰프로세스가 계속되고 ‘상호신뢰관계 회복’이 아니라 ‘우리에게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기조를 유지할 뿐이었습니다. 한편 북한 역시, 대화와 위협이라는 두가지 전략을 병행하며, 대화의 주도권을 잡기위해 노력할 뿐이었습니다.
아시안 게임 폐막식 행사에 북측 당, 군, 정 최고 실력자들이 방한함에 따라서 다시금 평화 무드가 조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조성되었습니다. 빠른 시일 안에 2차 고위급 회담이 오고가며, 5.24조치와 금강산관광 재개라는 빅 이슈까지 논의되지 않을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대북 전단 살포를 민간차원의 일이라며 수수방관하는 정부를 보면서, 또한 언제 있을지 모르는 북한의 도발을 대비한다며, 미국이 주도하는 미사일 방어체제시스템에 참여하고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무기한 연기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남과 북 당국에 과연 평화와 통일을 향한 의지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통일은 남과 북이 대박으로 가는 길이며, 여전히 우리는 남과 북의 한 민족, 한 형제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서로를 향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가장 큰 위협이며, 가장 큰 적이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분단과 갈등을 통해 이득을 얻고 있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통일은 좀처럼 한발조차 내딛기 어려운 게 우리의 현실인 듯 싶습니다.
평화 부재의 우리의 현실, ‘야훼 샬롬’, 하나님의 평화가 더욱 간절한 때입니다.
 
<평화 - 화해>
평화. 어떻게 하면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오늘 함께 나눌 에베소서 2장의 말씀은 평화에 대해 다루는 다른 본문들과 달리 정의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은 마치 베를린 장벽의 벽을 허물듯, 그리스도가 유대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허물고 갈라진 이들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평화를 이루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14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이 선언은 예수가 자신의 삶과 그리고 그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참 평화의 길을 열었다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 그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한 일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갈라진 이들을 하나로 묶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던 담이 허물어 원수 된 것을 없애고 이들을 얽어매던 율법을 폐기함으로 평화를 이루었다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갈라지고 나뉘어 서로 담을 쌓고 원수로 지내는 곳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매우 큰 문제였습니다. 다윗 이후 유대교의 선민사상이 강해짐에 따라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이방인과 구별하려 하였고 이것은 소외와 차별을 넘어 그들을 원수까지 되게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죄인과 천민들과 더불어 먹고 나누며 평등공동체를 이룬 예수의 삶과 그리고 십자가 사건의 복음은 매우 큰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삶은 온전한 사랑의 실천이며, 이 실천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분리하지 않고 이와 같다고 말하고 있으며, 우리가 황금률로 잘 알고 있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기독교 일반 윤리를 너머 원수를 사랑하고 화해를 이루어야 하나님께 진실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는 인간과 평화하지 않고는 하나님과도 화해할 수 없음을 그들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참 평화를 일깨워준 예수를 전하는 사도 바울의 감격에 찬 증언이라고 할 것입니다. 평화, 그것은 갈라진 것들을 잇고 막힌 담을 허물어 원수된 것이 없게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사이에서’ 이룩됩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이웃과 이웃, 나라와 나라, 종족과 종족 사이에 막혀있는 담을 허물어 관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적대자상>
평화교육이론 중에 “적대자상”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 개인이나 집단이 상대를 적대자로 설정함으로써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을 더 선하거나 긍정적 위치에 놓는 것을 말합니다.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가까운 예를 하나든다면 부시대통령이 이라크, 이란, 북한을 가르켜 ‘악의 축’으로 설정하고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부시는 이 세나라를 적대자로 설정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세웠습니다. 미국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핵무기는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적성국”이 지니고 있는 핵무기는 침략용이며 평화를 위태롭게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미국이 중동지방을 비롯한 “제3세계”에 막대한 무기를 판매하는 것은 평화유지를 위한 것이지만, 북한이 중동지역에 판매하는 것은 평화를 위태롭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아니요)
적대자상의 큰 특징은 이분법적 사고와 잘못된 선입견에 있습니다. 즉, 선과 악, 긍정과 부정 등 이분법적 사고를 통해 자신과 대치되는 상대에게 잘못되고 부정적인 선입견을 덧입히고 적대자로 설정함으로써 자신을 우위에 놓고 안정을 추구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적대자상이 가장 절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마도 북을 주적으로 두고 여전히 반공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빨갱이, 간첩, 국가보안법 등은 이북을 적대자로 유지시키는 것들입니다.
적대자상의 사회적 정치적 기능들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현실이 왜 그렇게 유지되고 있는지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외부에 있는 공동의 적대자는 한 집단, 사회, 국가의 내부적 단결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담당합니다. 아마도 왜 이렇게 전 언론과 매스컴을 통해서 월드컵을 띄우고 있는지를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 대한민국!!
둘째로 외부에 있는 공동의 적대자는 한 집단, 사회, 국가의 인간들에게 공격성의 표출하는 대상을 제공해 줍니다. 다시 말해서 적대자상을 통해서 지배자들이 사회 내부로 향하는 공격성을 외부의 적대자에게로 유도함으로써 사회 ‘안정’을 꾀한다는 말입니다. 정부 고위직의 비리나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수새로 몰릴 때면 언제든지 간첩이 등장하고 땅굴이 발견되고 이북이 미사일을 발사해 전쟁을 일으킨다는 기사가 올라오는 것은 다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NLL문제나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말하며 전쟁의 위협을 높여가는 것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고 내부로부터의 비판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적대자를 만들어내는 정치지도자들의 꼼수인 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평화와 화해가 형성되고 통일이 되는 것은 오히려 이들의 정권을 지켜주는 방패막이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적대자상은 비단 국가나 집단에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의 일상이나 개인 간에도 종종 경험됩니다. 철학자 니체는 “적대자를 갖는 것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습관이며 따라서 가장 강한 욕구이다”라는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우위에 서기 위해 다른 사람을 모함하거나 깎아내림으로 자신이 높아지려한다거나 청소년들이 한명을 찍어서 따돌림으로 해서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도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에서 경쟁의 구도에서 더욱 적대자상을 쉽게 형성할 수 있습니다. 늘 누군가에게 경계하고 적대감을 갖도록 부추깁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고린도후서 5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화해의 직분을 부여받은 평화의 일꾼입니다. 분단된 한반도, 평화 부재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인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이 땅에 화해와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나누고 가르는 적대자상을 해체해야 합니다. 잘못된 선입견으로, 이분법적 사고로 만들어진 적대자상 뒤에 거짓과 술책이 있음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북한은 우리의 주적 또는 적대자가 아니라 함께 미래를 살아가야할 우리의 형제이자 이웃입니다. 갈라지고 나뉘어 서로 담을 쌓고 원수로 지내는 곳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남과 북 사이를 가르고 있는 담을 허물어 화해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삶에서 먼저 화해를 이루는 훈련을 하십시오. 악과 싸우다 악에 물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랫시간동안 평화를 위해 저항하여 싸우다보면 우리가 나뉘고 가르고 공격하고 상처내는 일에 익숙해지고 닮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늘 경계해야합니다. 훗날 우리가 통일세상을 살아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부딪히게 되는 것이 차별과 갈등입니다. 동독과 서독이 2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내부적 갈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본다면 기독인들이 해야 할 화해의 사명은 분명합니다. 먼저 곁에 있는 가족, 이웃, 공동체에서 막혀있는 담을 허물고 화해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작은 곳에서 이루는 평화가 더욱 큰 평화를 만들어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남과 북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고 나와 갈라진 내 이웃을 하나로 이어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됨을 경험하였고 이웃과 연결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를 따라 평화를 이루어야 할 때입니다. 자신과 갈라지고 막혀있는 담이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곁에 있는 이웃과 화해하고 관계를 회복함으로부터 평화를 이루는 일을 시작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이 이 땅의 평화가 되어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샬롬!!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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