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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차 월요기도회 설교문(정상시 목사)

관리자 2015-01-07 (수) 13:44 9년전 3292  
제40차 평화통일 월요기도회 설교문
 
 
설교 : 정상시 목사(안민교회, 총회 평화통일위원장)
 
 
제목 : 그는 우리의 평화통일입니다.
본문 : 에베소서 2:11-19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2:11-19)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 한 구절이지만 사실은 초대교회의 공동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구절을 쉽게 읽지만 당시에는 로마제국에 도전하는 위험한 시국선언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이 ‘로마가 평화다(팍스 로마나)’선언할 때 교회는 ‘아니! 그리스도가 우리 평화다’ 고백 선언을 한 것입니다. 반체제 시국선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초대교회가 엄청난 박해를 받았습니다. 야고보와 스테반이 순교를 당하였고 베드로 등 많은 교회 지도자와 성도가 갇히거나 유배당했습니다. 예루살렘 박해에 이어 로마 대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왜, 맨손의 그리스도인들을 로마가 그토록 모진 박해를 했을까? 전쟁을 통해 유지되는 가짜 평화제국 로마에게는 참 평화가 두려웠고 존재의 뿌리를 흔드는 치명적 위협요소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입으로는 평화를 말하면서 ‘평화의 사람들’을 탄압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평화가 탄압을 받았습니다. 평화와 상생의 도(道), 동학이 무참히 탄압을 받았습니다. 분단독재 이승만 시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진보당 당수 조봉암에 대한 ‘사법살인’은 대표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그 후 군사독재 시대도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 숱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전쟁과 분단세력에 의한 평화통일 일꾼에 대한 탄압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분단 70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분단 70년을 맞는 새해, 첫 평화통일 월요기도회입니다. 이제 분단의 바벨론 포로 시대 70년이 끝나고 평화의 새 시대 도래를 바라볼 때입니다. 막힌 담을 허무시고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사망의 그늘진 이 땅에 오시는 평화의 왕 예수를 일어나 영접합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통일이다” 깃발 들고 환영하며 행진을 합시다.
 
 
세상의 평화와 다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로마는 평화의 깃발 아래 전쟁을 일삼았습니다. 억압, 수탈했습니다. 세리들을 통해 흡혈귀처럼 백성의 고혈을 빨았습니다. 포로들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제국의 본질입니다. 일본제국도 그랬습니다. 동양평화(東洋平和)의 깃발아래 침략전쟁을 했습니다. 조선을 침략하고 만주사변을 일으켰습니다. 그 때 일본이 내세운 깃발이 ‘대동아 공영권’이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동아시아가 평화롭게 함께 잘 살자’는 뜻입니다. 실상은 전쟁, 학살, 억압이었고 동아시아를 일본이 식민지로 잡아먹겠다는 말입니다. 그 거짓 평화의 깃발 아래 많은 젊은이들이 총알받이로 끌려가 죽었고 여인들이 전쟁 위안부로 끌려가 성노예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그런 가짜 평화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평화의 깃발 아래 전쟁을 연습합니다. 평화의 이름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또한 물신주의(物神主義) 사탄이 왕노릇 하는 황금제국이 평화의 깃발을 흔들며 사람들을 ‘쩐의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전쟁통 세상, 약육강식의 사회입니다. 며칠 전 타계한 세계적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라는 책을 통해 ‘평화 없는 황금제국’의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이 시대 예언자였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평화의 실상이요 본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다릅니다. 그 평화는 무력이나 정치군사적인 파워게임용 평화가 아닙니다. 약함의 강함이고 섬김의 평화이고 다양성 속의 일치를 이루는 평화입니다. 그 평화가 통일의 힘입니다. 초대교회처럼 우리도 가짜 평화, 전쟁통 세상에서 깨어 일어나 ‘그리스도가 우리 평화요 통일입니다’ 고백하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십자가 평화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십자가 평화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5-27) 예수의 길은 십자가 길이었고 그 길은 어리석은 것 같지만 지혜롭고 약한 것 같지만 강합니다. 죽음으로 사는 것이고 줌으로서 얻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십자가 도는 담을 허무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 앞에 막힌 담이 허물어집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3:11) 오늘 본문도 말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6) 그 뿐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 안의 자아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주의, 옛사람의 자기 아성들이 무너져야 평화가 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이웃과 형제를 찔러 아프게 합니다. 빅토르 위고 단편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대포를 실은 배가 태풍을 만나 대포를 묶은 밧줄이 끊어졌습니다. 선원들은 배 안에서 구르는 대포를 고정시키려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때 선원들은 외부 태풍보다 배안의 대포가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대포를 녹이는 힘이 십자가의 도(道)에 있습니다. 옛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 밤을 새우며 하나님과 씨름하는 가운데 옛사람 야곱은 죽고 새사람 이스라엘로 거듭납니다. 아침에 일어나 얍복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절뚝이며 걸어가는데 브니엘의 해가 떠올랐습니다(창32:31). 야곱의 새해였습니다. 술수와 잔꾀로 약취(掠取)의 삶을 살아왔던 야곱이 주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동안 원수로, 등지고 살았던 형, 에서를 위해 많은 선물을 준비하고 가나안으로 갑니다.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오 젖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가 나귀 열이라”(창32:14-15) 술수와 잔꾀, 탐욕의 삶을 살아왔던 야곱의 변화가 놀랍습니다. 형과의 막힌 담을 허물고 평화의 아침을 열기 위해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된 것입니다. 야곱의 십자가의 도입니다. 야곱은 이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장자권자가 된 것입니다.
 
 
평화의 일꾼으로 삽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평화를 위해 일하는 평화의 일꾼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예수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자녀를 자처하는 많은 교회들이 민족의 평화와 통일보다 분단의 담을 쌓는, 분열의 영 악령의 일을 하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화평케 하는 일은 게을리 한채 민족의 화해와 통일보다 미움과 정죄로 분단의 담 쌓는 일을 계속한다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 예수님의 준엄한 책망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평화의 왕 예수를 따라 평화의 일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전쟁통 세상에서 평화 의 꽃을 가꾸는 농부가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그 사명을 자각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 한국교회는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평화의 일꾼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책’ 사명을 외면한 채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살아온 우리 모두의 죄책을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아프게 성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달라져야 합니다. 독일교회는 독일 통일의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신 우리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평화의 일꾼 되길 축원합니다.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부터 합시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평화통일의 기도행진을 할 때 분단의 장벽, 막힌 담이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흩어져서 실천합시다. 다양한 현장 교회들을 예수 평화 공동체로 새롭게 세워갑시다. 로마제국 곳곳에 세워진 예수 평화 공동체들, 그 적은 무리가 제국을 이겼습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12:32)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1) 제국을 닮은 교회가 아니라 예수를 닮은 평화의 교회가 전쟁통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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