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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차 월요기도회 설교문(류재성 목사)

관리자 2014-06-18 (수) 21:07 7년전 2088  
제8차 평화통일 월요기도회 설교문
 
 
설교 : 류재성 목사(인천노회 노회장)
 
제목 : 다시 돌아보는 평화통일
본문 : 요한복음 4:14-15, 요한일서 1:1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한복음 4:14-15)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한1서 1:1)
서해 NLL로 인해 항상 긴장상황에 있는 지역에 속해 있는 인천지역으로는 남북한의 갈등의 해소, 그리고 평화통일 기반의 조성이야 말로 그 어느 지역보다도 절실한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곳 수유리 임마누엘 동산은 우리 민족의 자주와 민족 그리고 통일된 세상이었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몸 바쳤던 우리 문익환 목사님, 장준하 선생님 그리고 희망의 선배들의 기운이 깃든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예배는 매우 의미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시간 평화통일을 주제로 예배드리는 이 자리 속에서 제가 평화통일을 뒤돌아본다면 어쨌든 진부한 주제를 제가 다시 한 것은 지금 한국 사회는 ‘세월호’ 선박 침몰이라는 큰 충격 속에 빠져 있습니다. 많은 사상자, 실종자 그리고 다수의 어린 학생들이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더구나 오늘 13일째인 저 진도 앞바다 물속에 있는 실종자들의 구조에 전혀 진전이 없이 방치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현장에 대한 소식들을 들으시면서 어떤 마음이십니까? 아무튼 제가 긴 말을 하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가 가진 총체적 모순을 잘 드러낸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의 모순, 자본주의 사회 속에 이미 욕망과 욕구의 물화된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들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저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못난 어른들 때문에 너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미안함과 함께 우리 마음에 솟구치는 분노와 자괴감으로 우리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습니다. 아마,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이야 말로 그간 작고 큰 사건에 익숙한 우리들이 위험사회,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한국 사회 속에서 잘 잊고 사는 우리들이 아니었습니까. 이번의 상처가 우리들의 속살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으로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쉽게 치유될 수 없을 것으로 봅니다.
 
저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순, 시대가 가지고 있는 모순,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 그 모순의 최종적인 피해자는 바로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사회적 약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적 모순의 담지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알듯이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호 침몰 사건도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말을 따라서 어른들이 만든 세계 속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들이 아이들이 아니었습니까. 부조리한 현실들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대의 모순을 담보한 오늘 현실. 제가 진부한 주제인 다시 통일로 돌아간 것도 분단의 현실로 돌아간 것도 바로 이러한 동일한 모순을 담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했던 4장, 사마리아와 여인, 벌써 이 두 가지가 당시 분단 시대를 살아가는, 제가 히브리 역사, 이스라엘 역사를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그 역사를 출애굽에서 그들이 만들었던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것을 포기하고 살았던 그들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왕정을 거치며 왜곡되고 비틀어진 시대를 살았던 것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마리아 여인, 이 말속에는 이미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그래서 이 여인의 모습을 통해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대의 아픔, 사마리아 여인이라는, 사마리아 지역, 사마리아 지역에서의 약자라는 여성, 왜곡된 역사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 민족, 종교, 성별에 대한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그가 가지게 되는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또 하나는 그것이 삶을 어떻게 처절하게 유린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개인의 삶이라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인의 삶에서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것도 한참 본문에 나오는 대낮에 우물가로 가는 여인. 그 시대에 여인들이 가장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이 우물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우물가를 대낮에 간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입니다. 그 여인의 마음을 쏟아낼 수 있는 것조차 쏟지 못하는 이 안타까운 마음들, 최소한 여인이 누려야 할 삶마저 누리지 못하는, 우물터에서 누리지 못하는 한 여인의 모습입니다. 그의 자폐적인 삶입니다. 대인기피증의 깊은 상처를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의 스토리는 우리들의 굴절된 모습과 동시에 한 여인의 삶을 어떻게 지배하는가, 요한복음 4장의 텍스트는 우리들에게 굴곡 된 역사와 삶과 더불어 어떻게 치유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에스겔 37장은 너무도 잘 아는 본문인데요, 1절이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에스겔 골짜기에 버려진 마른 뼈 같은 모습들이 당시 분단을 살아갔던 이 소시민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여인이 철저히 외적으로 내적으로 닫혀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새로운 존재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까. 감히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 당당한 자신의 세계를 드러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세월호 사건이나 분단의 사건이나 시대적 모순은 함께 맞물려 총체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해결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치유라고 봅니다.
 
오늘 특별히 저희들은 평화통일 기도회로 모였습니다. 이 통일에 대한 모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긴긴 시간 동안에 통일에 대한 남북한의 필요성, 남북한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지 상호신뢰와 과정 등을 밟아왔습니다. 저는 그러한 통일에 대한 노력들을 다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박근혜 대통령이 말했던 “통일 대박”이라는 그 논리,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통일을 바라보는 그 논리, 북한에서 그 저의를 의심하지 않더라도 그 의도는 너무나도 명확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난 역사 안에서 짧은 역사 안에서 너무도 극명하게 보지 않았습니까. 국정원이라는 국가 권력을 통하여 대대적인 선거부정을 저지르고 이런 국가 문란을 저지르고 이런 문란에 대한 국가 정의를 세우는 노력은 방기한 채, NLL문건을 공개하여 다시 한 번 분단의 현실, 민족의 문제를 냉전의 잣대로 분열을 일삼고 이후 정당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하여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국가 권력을 통하여 외교문서를 위조하여 서울시 공무원 간첩단 사건을 일으킨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다 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경제적 득실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쌍용자동차 가족들을 집단적으로 죽음으로 몰아가는 죽음의 행진이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재벌 기업들을 위하여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권리마저도 손해배상을 통해 개인의 재산을 차압하는 아마 초국가적인 초대규모의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권력의 무한질주, 민주주의가 무너진 일방통행의 사회적 정의가 사라지고 견제가 사라진 이 속에서 우리는 어떤 현실인가요. 외적인 삶의 모습은 나아져 보이지만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형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우리를 얽어맨 끈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이 자리가 굉장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새로운 요구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옮겨가는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고 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가 하비 콕스가 쓴 『신의 혁명과 인간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그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인간은 욕망과 욕구로 인해서 갈등하며 변하지만, 하나님은 교회 속에 정형한 형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분은 우리를 향한 구원을 위하여 세상을 향한 구원을 위해서 그는 새로운 존재로 끝없이 고난에 응답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삶의 자세를 바꾸기를 요구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부르고 그의 사람들을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아픔에 직면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가 도종환의 “축복”입니다. 그 시의 말미에 “육신에 병이 조금 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 오지 않았던가. 이 봄 어이 매화꽃만 축복이랴. 내게 오는 건 시련도 비명도 다 축복이다.”
 
어쩌면 2014년 우리가 맞이하는 지금, 우리는 절대 절망처럼 보이고 탓할지도 모르지만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시간으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부활의 한 증언자로 부활의 사건의 담지자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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