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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차 월요기도회 증언문(유르겐 라이첼 목사/EMS총무)

관리자 2014-07-02 (수) 19:04 9년전 1814  
제15차 평화통일 월요기도회 증언
(*독일통일에서 독일교회의 역할 및 경험)
 
증언 : 유르겐 라이첼 목사(EMS 총무)
 
 
개신교회의 평화와 화해를 향한 노력과 공헌 - 독일의 상황을 중심으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가지 요인들이 개신교를 위협했습니다 : 나라는 동쪽의 지역을 포함한 영토의 25%를 잃었고 천만 명의 사람들이 피난하였습니다. 국민들은 자신이 살던 고향으로부터 떨어지게 되었는데 거의 대부분인 80%는 개신교인이었습니다. 백만명의 사람들이 사망하였습니다. 독일은 두나라의 결속과 더불어 정치적 성향을 가진 두 개의 정당 또한 합쳐 졌습니다. 서독은 자본주의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었고, 기독교는 이런 세상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체제를 지탱하는 기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46년까지 인구의 90%가 개신교인이었던 동독은 동유럽의 공산주의 나라에서 마치 군자인 것처럼 행세하였습니다. 동독이 포함된 동유럽에서는 특히 그리스도교 교회가 반 과학적인 것으로 규정되기 일쑤였는데 말이죠. 1945년 이후 독일의 거의 대부분의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사람들의 생존이야말로 당시의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논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다른 문제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나라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나?’ ‘전쟁에 관한 책임을 누가 져야만 하는가?’ ‘누가 잘못을 하였는가?’의 세 가지 의구심은 교회 내에서 화해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원천적으로 가로막았습니다. 이는 첫 번째로 복수에 대한 당위로 이어졌고, 두 번째는 정치세력에 의해 교회의 분열을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세 번째는 과거의 환희와 현재의 비애를 뒤 섞어버려 사람들을 격앙 시켰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일어났던 일을 예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 조부모님은 완전히 자신들의 고향에서 추방당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가족이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하시며 살다가 30년 후 돌아가셨습니다. 또 다른 친척 할아버지는 국가 사회당(나치당)과 나치가 세운 아리안 교회에 소속된 나치(Nazi)였습니다. 독일이 두 개로 나뉘어졌을 때, 우리 가족은 동과 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1961년 이후 가족의 구성원들은 더 이상 서로를 만날 수가 없게 되었고 자손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천만명의 사람들에게 일어났습니다. 분열된 나라의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나치즘을 비판하지 않은 교회 속에서 화해를 이룰 수 있었을까요?
 
독일교회가 그래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독일교회가 가지고 있던 강점 때문이 아닌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칼 바르트가 종교개혁 때와 같이 개신교가 가져야 할 새로운 원리와 원칙을 다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개신교회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니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어떤 세상의 권세도 우리를 굴종시킬 수 없지만 유일하신 하나님 한분만이 우리의 섬김을 받으신다는 것을 역설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나치의 치하인 제3제국에서 낸 바르멘 선언(1934)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 “교회는 순전히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을 현현을 바라는 가운데 그의 인치심과 지도가운데 거하기를 바란다.”
 
1965년에 독일의 복음주의 교회인 EKD는 소련이 본래 독일의 땅에 강압적으로 폴란드인들이 이주할 것을 예상하였습니다. 과거의 적들과 화해를 하는 것만이 앞길을 보장한다는 신념에 따라 독일의 수상인 Brandt는 동유럽의 이웃나라들과 교섭하였고, 서독은 그리하여 새로운 국경선을 승인하였지만 독일 사람들이 본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1969년까지 EKD는 독일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단일교단으로 유지되었습니다. 한편 독일의 공산주의권에 있었던 동독의 개신교회들은 탄압을 당하였고 그리하여, 그들은 이념에 반대하며, 그들만의 정치적인 위치를 견지하기 위한 그들만의 연합체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동독과의 교류는 유지가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의 모델을 동독에 있는 교회들이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들은 공산당의 이념의 독재적인 체계를 변화시키는 평화의 도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더욱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갈망은 “월요 기도회”와 같은 내용으로 표출되었고 최종적으로 이 모임에는 백 만명의 사람들이 참석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폭력”의 정신을 유지하였고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개신교 문화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공산주의의 평화로운 해체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교회자신과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요?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나치당 하의 제3정권에서 큰 죄를 지었습니다. 전쟁 후 1945년 10월, 독일의 유능한 몇몇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을 발표하였습니다. - “교회와(중략) 가톨릭을 비롯한 교회에게 죄가 있다.(중략) 우리에게 죄가 있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할 때 침묵했기 때문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침묵해야 할 때는 되려 침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실이 부재해 있는 이념놀음에 수 십년간 협력하였다. 우리는 구원의 반석에 힘입고, 진리를 보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태만하였다.”
 
그래서 슈투트가르트 선언에서 보인 그리스도인들의 화해의 메시지는 유럽에서 진행되는 화해의 작업을 진전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치로부터 받은 공포와 나치가 일으킨 전후 1500만명의 피난민들 사이에서 고통을 받은 이들과의 화해의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교회는 동독과 서독을 잇는 다리를 짓고 유지하는 데에 주력하였으며 평화와 관련한 이슈에 포커스를 맞추고 과거를 극복하고 화해를 통한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교회가 제3정권에서 행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다시금 함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직전 주교인 Margot Käßmann이 아프가니스탄과 언급한 것과 같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반드시 수긍해야만 합니다. 여전히 상황은 과거보다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을 막지 못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새로운 갈등이 발생하고 있고, 오직 하나님만이 동서와 유럽 간에 평화가 찾아올 것인지를 아십니다. 인권을 유린하는 일이 지중해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온 수백, 수천의 피난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유럽인들이 피난민들로 하여금 위기를 피해 유럽 우리들 나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 유럽의 회사들이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시리아와 이라크등의 근본주의자 테러리스트에게 무기를 수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과 이 세상의 형제 자매들에게 화해를 가져오는 작업은 여전히 부족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즉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다. 우리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시는 분(고후 5:18)”,즉 자신을 매개로 우리를 화해케 하시고 화해의 사역을 감당케 하시는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지하여야 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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