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참"에서 만난 두 영인 유영모와 함석헌

관리자 2010-12-27 (월) 15:11 13년전 3968  

"참"에서 만난 두 영인 유영모와 함석헌<들소리 12.25> 


 
사진 왼쪽부터 유달영 선생, 함석헌, 유영모 선생(오른편)과 함께.

# 오산의 현장

함석헌이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든 오산학교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7∼80호 되는 촌곽에 4∼5백명의 학생이 모여드니 있을 곳이 없어 농가의 사랑방, 건너방, 큰체의 작은방까지 서로 끼어 욱적거리면서 옴이 성하고 장질부사가 나고 더럽기 한이 없었다. 문제는 기숙 상태만이 아니었다. 사람도 그랬다.

옛날부터 계신 선생님이라고는 두서너 분 뿐이고, 그 외에는 다 새로온 분들인데, 그때 함석헌이 보기엔 엉터리 선생도 많았다. 한 해 있다가는 선생들은 태반이었고 한학기 있다가는 이, 심지어는 한달있다가 간다는 말도 없이 가버리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실력도 별로 없는 것 같았고, 수업하는 자세도 충실하지 못했다. 당시 선생들의 수업하는 태도에 오히려 가슴 아파하는 함석헌과 한반의 한 학우가 있었는데 그 이름을 신언준이라 했다.

후에 상해에서 언론 활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이인데, 이 신언준이 수업을 대충대충 하는 선생을 향해 “오늘도 오전어 치는 배워야 하지 않아요” 했다는 것이다. 그때 한달 수업료가 1환50전이었다고 전해진다. 학생 또한 잡탕이었다는 것은 이미 전에 언급한바 있다. 게다가 학교는 순촌 골짜기. 아무리 생각해도 될 것 같지 않은 학교였다.

석헌에게 다름 꿈은 없었다. 그저 한번 공부에 매진해 보고 싶을 뿐이었다. 함석헌에겐 어릴때부터 이상스러우리만큼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무슨 선생이 된다든가 학사·박사가 된다든가 하는것은 분명히 아니었지만 그는 어렸을때부터 `읽기'와 `쓰기'에 쉴줄을 몰랐다.

그는 그가 다녔던 평고 학생생활 3년을 “소년시절 3년을 그속에서 자란것은 일생에 잊지못할 행복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는데 그것은 공립학교의 과학분야의 폭넓은 수업과 이 과학의 수업을 통해 성서의 모순(일점일획도 틀림이없다는)을 발견하면서 주목하게 된 학문세계 때문이었다. 그런 함석헌에게 오산 현상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런 함석헌에겐 학문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열려오고 있었다.

# 함석헌, 유영모를 만나다


유영모를 만난 것이다. 사실 함석헌에게 있어 유영모는 알듯 모를듯 그런 분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 유영모를 통해서 인문(人文)이나 과학, 기예(技藝) 등의 세계 너머에 있는, 그래서 그런 것들로는 미칠 수 없는 `새경지'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때가 함석헌이 스물한 살 되던 해인데, 시셋말로 공부벌레는 아니었다 해도 지적인 호기심만은 충만했던 그는 이제 체계적인 학교수업 보다도 유영모의 가르침에 더욱 관심하기 시작한다.

유영모의 가르침(敎)의 핵심은 생(生)이요, 뜻이요, 참이요, 자유함(스스로함) 같은 것들이었다. 유영모는 1921년 9월 7일, 32세의 젊은 나이에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1년반 동안 교직을 수행했는데, 교장으로 재임하면서도 줄기차게 수업을 맡아 했다.

교장 유영모의 수업 방식은 특이했다. 일어로 엮어진 일체의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았다. 깨알처럼 눌러쓴 강의내용지 한 장만 달랑 손에 들고 교실에 들어오는데, 그러나 그 강의기록물을 참조하는 경우마저 거의 없었다. 철저한 준비로 인한 것이었는지, 이미 체화된 박식에서였는지 아니면 둘다였는지 아무튼 유영모의 수업시간은 기이했다. 사람이란 뭐냐? 산다는건 뭐냐? 배운다는건 뭐냐? 왜 배워야 하는거냐? 뜻이라니? 참이라니? 작은 것이 큰 것보다, 낮은 것이 높은 것 보다, 나중 것이 처음 것 보다, 뒷선 것이 앞선 것 보다, 처진 놈이 선두 보다, 밤이  낮보다….

유명모의 시간은 무슨 선문답(禪門·答)의 시간 같았다. 함석헌과 한반이었던 학우들은 어땠는지 함석헌에겐 특이한 체험의 시간들이었다. 어느 시간만이 아니었다. 언제 어느시간이나 그랬다.

어느 한날이었다. 답답하고 칙칙하고 안타깝던 가슴이 뻥뚫리는 날이 있었다. 그렇게 가슴이 뻥뚫림을 체험하면서 함석헌은 이렇게 소리쳤다. “오, 참! 그래. 참이야, 참!” 이래서 유영모의 `참' 신앙(?)은 함석헌에게 전이된 것이다. 세상에 알려진대로 유영모는 함석헌의 스승이다. 함석헌이 `선생님이' 혹은 `선생님께서' 할 때, 그 선생님은 오직 유영모를 두고서였다.

유영모는 1901년생인 함석헌 보다 열한 해 앞서 1890년 〈서울남대문수각교〉가 위치한 마을에서 아버지 류명근(柳明根)과 어머니 김완전 사이에서 13명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유영모는 스물한 살에 첫번째 오산학교 선생이 되어 갔다가 새로 교장이 되어온 전 평양신학교 교장 로버트와의 학교운영 방식의 이견으로 사임, 다시 두번째, 서른두 살에 교장으로 부임하게 되는데, 첫번째 약관 20대 초의 나이로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기까지 그는 개인적으로 거의 재앙(災殃)이나 저주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비참을 치루어내야 했다.

자신을 포함해 세상에 온 13명 형제들이 자신이 스물한 살이 되는 사이 어떤 동생은 세상에 온지 5, 6개월 만에, 어떤 동생은 여섯살, 일곱살에, 또다른 동생의 경우 10, 11살에 이런저런 병으로 혹은 이런저런 일로 다 먼저 죽고, 열아홉이 되는 바로 아랫 동생 영묵이만 정말 고맙게도 어렵게 살아남아 있었는데, 이 동생 영묵이 마저 유영모가 오산에 부임해 두달이 되던 때 돌연사를 당하게 된다.

한없이 애지중지 하던 아우였다. 교회도 함께 다니고 YMCA에도 함께 다니고 삶에 대한 모든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친구같은 동생이었다. 이전부터 수많은 동생들이 멀쩡이 죽어가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아온 영모는 사실 하나남은 동생과 함께 지내면서도 멍해지는 때가 늘 있었다. “우리 영묵이는 문제가 없을 것인가?”, “영묵이도 갑자기 떠나버리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일때마다 두려움과 초조함에 어쩔줄을 몰랐다. 그러나 유영모는 자신의 생사문제에 대해서는 참으로 담담했다.

거의 생사의 염(念)을 초월했다고 하리만큼 담담했다. 그런데 영묵이에 대해서만은 달랐다. 유영모는 마치 하나님께서 동생 영묵을 통해 어떤 위대한 삶(生)의 답을 요구하는 듯한 느낌을 갖곤 했다. 유영모는 언제부터인가 그같은 맘으로 그의 동생 영묵을 바라보는 때가 자주 있게 되었고, 바라본 후의 마음은 더욱 그랬다. 급기야 영묵은 유영모에게 인생에 대한 두려움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했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이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묘한 감(感)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 한몸 같던 동생 영묵 마저 그 형 영모를 뒤에 둔채 훌쩍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1910년 11월 7일 오후 5시 5분이었다. 유영모의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 내린것은 몸뚱이가 아니었다. 그 몸뚱이의 존립,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맘뚱이'이가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이때까지 유영모의 맘을 덩이지어 온것은 오직하나 기독교 신앙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무너진 것이다.

이제까지 “교회가 내게 주어 믿어온 신앙”이라는 것이 거짓이었다는 새소리, 새음성, 새말씀을 듣게된 것이다. 이제 그 안에서 무쇠를 녹이는 불가마 같은 고뇌(苦惱)가 시작된다. 이 사선(死線)에 선 유영모의 고뇌를 겹으로 하게 한 것이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있던 로버트의 오산학교장으로의 부임이었다.

지금 민족의 어른으로서 학교의 어른이신 남강은 1910년 `안명근' 사건으로 2년 형기로 제주도에 유배중에 있고, 실질적인 교장 역할을 하던 여준은 만주로 떠나고 춘원 이광수는 톨스토이가 쓴 〈통일복음서〉로 설교하다가 퇴직을 당하는 때, 이같은 일련의 사건을 지지하거나 주동하는 로버트의 행위에 동생 영묵의 죽음으로 이제까지의 소위 `정통신앙'으로 주창되어온 “타율적 교리신앙”(다석연구가 박영호·다석유영모, 두레 2009. 2. 15. p.33)과의 싸움을 시작한 유영모로선 조용히 좌시할 수 없는데서 오는 고뇌였다.


# 유영모·함석헌을 묶어낸 '참'


어쨌든 유영모는 아우의 죽음을 통해 타율적 교리신앙에서 `자율적인 자각신앙'(박영호 다산사상 연구가 같은 책 같은 쪽)에로 뛰어넘는 역사를 품게 되었고 “앞으로 올 세계구원”에 디딤돌을 놓게 되었다. 영묵이 죽으면서, 오산학교에 이제까지(로버트가 교장으로 취임하기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명히 말한다면 반오산적(反五山的)인 행정권력이 작동하면서 이같은 모든 거짓에 저항하는 힘으로써, 원소로써 유영모는 `참'을 유일신앙으로 선언하게 되었고, 유영모의 `참'은 그대로 그의 제자 함석헌에게 잇대어지게 된다.

평화주의자 함석헌으로 하여금 90평생 국가주의, 대량주의, 군사무력주의에 저항으로 직선일관 하게 한것은 곧 이 `참'이라는 영적 기반이었을 것이다. 유영모가 20살 약관으로 오산에 왔다가 그의 동생 영묵의 죽음을 통해 새종교를 체험한 후 기독교라는 거짓종교(타율적·교리적·구조적인)를 거부하고 오산을 떠난지 꼭 10년. 이제는 교장으로 오산에 다시 부임하게 되는데, 이는 앞으로 오게될 새역사, 새철학, 새종교를 열망하는 지적 청년 함석헌에게는 글로, 말로, 몸짓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하늘의 축복'이었다.

함석헌은 그에게 두번 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스스로 증거한다. 그가 쉰네 살 되던 해 그의 생신 20,000날을 맞아 그를 평소에 스승으로 따르던 20여 명의 제자들이 비용을 모아 2만날 생일잔치를 열어드렸다. 역시 친구와 제자들이 힘모아 모금한 돈으로 준비해드린 원효로 그의 저택에서였다. 스승의 2만날 축하 모임의 사회는 당시 고대(高大)의 청년교수 김용준이었다. 김용준은 그 축하 모임에서 있었던 함석헌의 답사(?)를 이렇게 전해준다.

“선생님이 그래프 한장을 그려가지고 나오셨습니다. 그래프를 펴드시는데 그저 몇가지 선(線)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얼마쯤 곡선(曲線)이 그어지다가 평선(平線)으로 바뀝니다. 그러더니 거의 직선(直線)으로 솟구칩니다. 그림은 다시 이전을 반복합니다. 곡선과 평선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 곡선과 평선이 또한번 수직으로 치솟습니다. 무엇을 말씀하실려는 것일까? 하고 모두가 이제는 그래프가 아닌 `선생님'을 주목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그 특유한 빙그레 웃음을 띄우며, 그 선의 그림을 풀이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곡선과 평선은 내 인생길을 의미합니다. 이 곡선과 평선에서 위를 향해 두차례 수직으로 치솟는 선이 있는데 이는 내 인생에 있었던 두 차례의 비약(飛躍)을 의미합니다. 첫번째 수직은 유영모 선생님을 만난 때이고, 두번째의 수직은 우찌무라 간촌(內忖)을 만났을 때입니다(1989. 3월호 씨알의 소리 `함석헌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함석헌이 오산학교 선생으로 유영모를 배운 기간, 유영모가 스승으로 함석헌을 가르친 기간은 1년여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영원을 지향하는 길동무'로서의 뜨거움은 스승과 제자가 공히 90여 평생에 식을 줄을 몰랐고, 특히 감격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은 2008년, 세계철학자대회를 한국철학계가 한국에 유치하게 되면서 이제까지 주류(?) 철학계로부터 사실상 이단시 되어온 유영모·함석헌의 `씨알사상'이 한국사상·한국철학의 주제로 제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유영모가 오산학교 교장으로서의 인준을 받지 못한체 1년반을 가르치다가 사임하고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데 심부름꾼 하나만 함께 하였다. 서울로 돌아갈려면 오산에서 고읍(古邑)이라는 역으로 나아가 기차를 타야했다. 한시간쯤의 보행길이었는데 뜻밖에 이 길에 졸업반 학생 함석헌이 선생님의 배웅을 나온 것이다. 평소에 색시같은 석헌이었다.

평소에 거의 말없는 학생, 언제보아도 책을 읽거나 무슨 글을 쓰고 있는 학생, 묵묵히 학교의 거친 일들을 해내는 학생으로 익혀져 있는 석헌이었다. 특히 유영모의 머리속에 자리잡은 석헌은 곧 잘 멍∼한 모습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젊은이었다. 유영모는 그 함석헌이 참 좋았다. 말없이 따라 걷고 있는 석헌에게 유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번에 오산에 다시 왔던 것은 자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였던가보이”.




생명교회 원로목사/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문대골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