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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맞이하는 ‘제주4·3’ 63주년 - “화해자 조남수목사 활약상 재조명”

관리자 2011-04-15 (금) 17:07 12년전 4376  

사순절에 맞이하는 ‘제주4·3’ 63주년 - “화해자 조남수목사 활약상 재조명”

사순절 예수 화해정신 실천한 조 목사 재평가
‘산사람’ 자수 선무강연 통해 숱한 생명 구해
모슬포주민들 진개동산에 ‘조남수목사 공덕비’

제주기독신문  2011/04/07
제주 4·3이 63주기를 맞으며 각종 기념 행사들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 기간 교회에서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화해자로 오신 예수님과 그 죽음을 묵상하는 절기다.

이 절기에 교계에서는 제주4·3사건 당시 좌익과 우익을 떠나 화해를 도모했던 기독교인 조남수 목사의 당시 활약상을 알리는 등 재평가 하자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슬포교회 100년사’와 조남수목사가 저술한 ‘회고록(1987년) 중 4·3 당시의 내용을 되짚어 본다.



모슬포 진개동산에 세워진 조남수목사 공덕비
63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까지 도민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제주4·3은 그 오랜 세월동안 풀리지 않는 아픔으로 기억되고 있다.

1948년 ‘4·3’이 발생한 이후 제주도는 ‘낮이면 대한민국이요, 밤이면 인민공화국’인 세상으로 변모했다고 한다. 낮에는 경찰과 서북청년응원대가 마을에서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사람을 죽이고, 밤에는 공비들이 내려와 힘없는 민중을 살해하는 등 무고한 주민들을 향한 집단학살이 끊임없이 이어져 도민들에게는 생지옥과도 같았던 고통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내어놓고 학살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었던 이가 당시 모슬포교회를 담임했던 조남수목사였다.

1947년 모슬포교회에 부임한 조남수 목사는 그 이듬해 바로 ‘제주 4·3’에 직면한다. 민족청년단(좌익)과 한국청년단(우익)으로 나뉘어 이념분쟁을 펼친 그 당시는 일명 ‘山사람(공비)’들의 주요 타킷이 ‘공무원, 마을유지, 기독교인’이라고 할 정도로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이 심했다.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집도 불에 태워버리던 시기였다고 한다. 이때 모슬포교회 허성재장로가 공비들에게 피살됐고, 최근에 작고한 이백년 장로의 집도 습격을 당하는 등 가족들의 피해도 컸다.

때문에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낮에는 (경찰)지서에서 살고, 밤에는 살기위해 소외양간이나 돼지우리, 심지어 초가집 지붕과 천정사이에 숨어 지내야 했다. 또한 ‘교회당에 불을 붙이고 목사도 죽여라’고 할 만큼 위험한 상황에서 조목사 역시 습격을 받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 조목사는 생명을 구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고 한다.

자칫 오해를 받아 오히려 자신이 죽음에 직면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조 목사는 모슬포경찰서로 찾아가 문형순 경찰응원대장과 “이런 식으로는 제주도민이 다 죽는다. 근본대책을 세워야 한다. 자수하는 사람은 죄의 유무를 불문에 붙여 목숨을 살려줘야 한다”며 담판을 짓고, 자수강연을 시작한다.

조목사는 자수 선무강연을 펼치면서 “나는 기독교 목사입니다. 인간 조남수를 믿어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 목사인 조남수를 믿고 자수해달라는 말입니다”라며 자수를 독려했다.

첫 강연에서의 98명의 자수자가 문 응원대장의 허락을 받아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진 소문이 나자 대정지역과 한림, 화순, 중문, 서귀포에 이르기까지 강연신청이 이어졌고, 총 150여회의 강연을 통해 3000여 명의 사람들이 자수를 했다고 한다.

또한 위협 등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삐라 등을 소지했다가 형 집행이 확정돼 억울하게 죽음에 직면하게 된 소위 ‘산사람’측으로 여김을 당한 200여 명을 조목사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보증한다며 데리고 나와 이들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예수를 믿고 모슬포교회 신자가 되기도 했다. 또한 그 가족들이 은혜를 갚는다며 많은 선물을 들고 찾아오면, “은혜를 갚는다면 하나님께 갚아야지, 내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고. 앞으로 예수나 잘 믿읍시다”며 모조리 돌려보냈다고 한다.

故 이백년 장로는 생전 인터뷰에서 모슬포교회를 섬겼던 목회자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목사로 조남수 목사를 꼽았다.

이 장로가 기억하는 조 목사는 성격이 아주 활발한 분이었으며 교회에 큰 어려움 있어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데 그 정도 괴로움 못 당하겠어?”라며 허허 웃으면서 넘길 만큼 당당한 모습으로 기억했다.

모슬포교회 손재운 담임목사는 “제주 역사에서 많은 아픔들이 있었지만 제주4·3은 피의 역사다. 그 아픈 상처를 봉합하기 위해서는 피해자나 가해자 등의 규명 외에도 화해자가 있어야 한다”고 전제하고 “서로가 치열하게 죽이고 죽을 때, 이대로는 안된다며 화해의 측면에서 사람들을 자수하게 했고, 자수할 수 있게 동기를 처음으로 마련해 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조남수 목사님이셨다. 그분이 화해자의 역할을 하셨다”고 평가했다.

이런 조 목사의 공적에 대해서는 자수강연을 통해 수천 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평가와 그에 반해 자수자들 중 자수하는 바람에 오히려 목숨을 잃게 됐다는 유가족들의 주장으로 인해 그 평가가 다소 엇갈리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담보하는 순교의 정신은 아픈 역사를 품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평가다.

한편 지난 1996년 5월 11일에는 조 목사로 인해 목숨을 건졌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모슬포주민들이 진개동산에 ‘조남수목사 공덕비’를 세워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공적을 기리고 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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