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생명 치유 회복”
요10:10, 롬8:18-19, 미7:8, 시91:2-3
이건희 목사(직전 총회장)
사랑하는 제106회 총회 총회원 여러분, 전 세계적인 코로나19 팬데믹이 본격화된 상황에서 시작한 제105회 총회를 마감하면서, 이제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라는 주제와, ‘생명, 치유, 회복’라는 부제로 제106회 총회를 맞이했다. 거룩한 총회에 참여한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지난 105회 총회를 초유의 온라인 총회로 시작해서, 또한 초유의 체육관 속회 총회까지 거쳤다. 완벽한 코로나 총회장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회기 내내 기도하며 지냈다. 한 회기 내내 온라인을 겸한 총회 일정을 소화했지만 아직도 코로나 시대가 끝나려면 먼 것 같다. 이런 상황에 앞으로는 ‘위드 코로나’를 넘어서 ‘위드 에브리원’이라는 삶의 방향성을 가지고 지내야 한다. 이 또한 새로운 길로써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 105회 총회를 온라인으로 치르면서 만감이 교차했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래도 금번 106회 총회는 이 지역 도지사님과 시장님의 배려와 도·시의 담당자들의 도움 가운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네 군데 교회로 나눠 총회를 맞이했다. 그리고 지난 105회 총회 속회를 실내체육관에서 가질 수 있도록 크게 협력해 주신 청주시기독교연합회에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 감사한 것은 성 총회를 일반 시설이 아니라, 주님의 몸인 교회에서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늘 아쉬운 마음이었는데, 이번에 제한적이지만 교회에서 총회를 이룰 수 있어서 말이다. 이번에 총회를 유치한 교회들은 청주제일교회와 그 탄생부터 함께 했던 교회들 그리고 100년이 넘는 세 교회들이 함께 하고 있다. 청주제일교회가 117년, 우암교회가 101년. 성동교회가 113년(1908년 시작), 청주동부교회가 66년(1955년 시작)이 되었다. 이준원 목사님과 당회원들, 고광희 목사님과 당회원들, 김길중 목사님과 당회원들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게 감사드린다.
여러분이 코로나 백신 접종과 PCR 검사와 관련한 불편함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당연히 취해야 할 조처들이었다. 다행히 지난 9월 25일 기준으로 백신 2차 접종 후 14일이 경과한 총대 비율이 88% 정도로 확인되었다. 협력해 주신 총대들과 특히 각 노회 노회장님들과 서기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저는 총회장으로 지난 24일(금) 오후에도 충북도청, 청주시청 관계자들과 만나서 깊이 있게 대화하고, 우리의 준비상황을 소상히 설명했고, 관계자들도 우려되는 측면들을 점검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어려운 시기의 대면, 비대면 병행 총회이니 여러분 모두 협력해 주시고, 잘 폐회를 이룰 수 있도록 조심 또 조심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금번 총회의 주제는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생명 치유 회복”이다. 지난 회기 동안 우리 모두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돌이켜야 한다는, ‘아드 폰테스’의 뜻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하나님 피조세계에 드리운 어두움을 넘어서 빛인 생명, 치유, 회복을 이루어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주제라고 본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를 염두에 둔 주제이기도 하다.
특별히 이 주제, “어두움 후에 빛이 오리라!(post tenebras lux)”는 중세 시대의 칠흙 같은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던 교회들과 성직자들이 오로지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의 빛으로 변화되어 진리와 사랑 가운데 살도록 하기 위한 신앙과 삶의 방향성, 특히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 운동의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주제는 500여 년 전부터 개혁교회 신앙의 흐름을 잘 대변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주제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어느 때는 영화 제목으로, 또는 카페 이름으로, 심지어는 온라인 게임 ‘데스티니 가디언즈’ OST 가사 중에도 등장하는 등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제는 종교개혁 당시 스위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 교회들이 깊은 어두움에 빠져 있었을 때를 배경으로 탄생했다는 것을 의미 있게 받아들인다.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성서 해석을 자의적으로 하고 있는 성직자들의 부패하고 왜곡된 신앙은 어두움 그 자체였다. 뿐만 아니라, 중세 시대를 관통하면서 수 세기 계속되었던 감염병인 흑사병 또한 심각한 어두움이었다. 흑사병은 당시 유럽 인구 절반의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크나큰 재앙이었고 어두움이었다.
취리히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운동을 이끌었던 츠빙글리는 1519년 9월 이 무서운 흑사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1520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건강을 되찾고 하나님의 소명에 확신을 가지고 더욱 적극적으로 종교개혁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감사하며 그가 만든 ‘흑사병 찬송’은 츠빙글리의 신앙고백과 그에 따른 결단을 잘 묘사하고 있다. 1522년 취리히 찬송가는 이 찬송을 “흑사병의 공격을 받은 츠빙글리를 통해 만들어진 교회 찬송가”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찬송 시 가사에는 106회 주제 성구 가운데 로마서 8장 18절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그 가사를 요약하면 이렇다. “주 하나님, 위로하소서. 이 위기에서 도와주소서. 죽음이 문 앞에 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여, 친히 죽음과 싸워주소서. 당신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당신에게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내가 한참 살아 일해야 하는 날에 내가 죽는 것이 당신의 뜻인지요? 당신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 내 혀는 굳어졌고, 더는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제 감각은 완전히 굳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당신이 저를 위해서 계속해서 싸움을 하실 시간입니다. 저를 회복시켜주십시오. 주 하나님, 저를 회복시켜주십시오. 제가 다치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 땅에 있는 저를 더는 죄의 불꽃이 사로잡지 못할 것이라고 믿으실 때, 내 입술은 항상 그렇듯이 순전하고 아낌없이 당신을 향한 찬양과 당신의 가르침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선포할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의 폭압과 폭력에 맞서서 그 어떤 두려움도 없이, 천국에서 받을 상을 바라보면서 당신의 도움만을 의지하여 인내할 것입니다.”
최근에 츠빙글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더군다나 우리 교단과 사상적인 흐름이 비슷한 것으로 파악되는 종교개혁가이기 때문에도 더욱 흥미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인간 모든 삶의 영역 특별히 정치, 경제 등 공공영역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의 문제와 그리스도인들의 정의로운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인물이다. 그리고 이런 정신은 칼빈에게 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뒤를 따르는 개혁교회는 이원론적이 아니라 통전적이고 공공성이 있는 신앙 전통을 가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다시금 이러한 개혁교회 신앙 전통을 되살려서 통전적인 신앙이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적인 이윤 추구 극대화의 문제성과, 성장의 한계를 절실히 깨닫고 시민 공동체의 정치적 책임 의식과 공동체적 의식을 고양하는 사회, 경제 윤리적 관점에서도 개혁교회 신학 윤리의 토대를 놓은 인물인 츠빙글리는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츠빙글리의 신앙과 신학에 크게 영향을 받은 칼빈을 비롯한 스위스 종교개혁가들을 제네바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제네바시의 ‘빠스티옹’(Promenade des Bastions)공원에 가면 종교개혁의 중심인물들을 기념하는 길이 약 100m에 높이 약 10m에 달하는 거대한 석상이 세워져 있는 ‘종교개혁 기념비’(Monument de la Reformation)가 있다. 그 중앙에는 왼쪽부터 차례로 네 명의 종교개혁가 파렐(Farel), 칼빈(Calvin), 베자(Beze), 낙스(Knox)가 나란히 서 있다. 그 중에 칼빈은 펼쳐진 성경을 들고 있다.
이들이 서 있는 벽에는 “포스트 테네브라스 룩스 Post Tenebras Lux”라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어둠 후의 빛”이라는 뜻으로 제네바 종교개혁 강령이었다. 그리고 이 표어는 현재 제네바시의 슬로건이기도 하다. 여기에 새겨진 1536년은 제네바 시의회가 종교개혁을 승인한 때가 1536년 5월 21일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이 석상들은 칼빈 탄생 400주년인 1919년에 완성되었다. 이와 관련한 사진을 보도록 하겠다.
**사진 세 장을 보자. 종교개혁가들을 중심으로 좌우편에 육안으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바로 금 번 106회 총회의 메인 주제가 새겨져 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일부러 붉은색으로 표시한 것이다. “포스트 테네브라스 룩스”, “어두움 후에 빛”이라는 바로 106회 총회 주제인 것이다.
그런데 사진상으로도 볼 수 있겠는데, 이 작품을 만들면서 세 단어의 위치가 왜 이런 식으로 배열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포스트’는 ‘애프터’ 뒤에라는 뜻이고, ‘룩스’는 빛을 말한다. 그리고 중앙에 있는 ‘테네브라스’ 즉 어둠이라는 뜻인데, 한 단어 ‘테네브라스’를 갈라놓았다. 일부러 그랬을까? 내가 작업한 사람이라도 일종의 의도를 가지고 그랬을 것 같다. 왜? 어둠은 깨뜨려져야 하는 것이니까. 사라져야 하고, 지나가야 하고, 없어져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 어둠을 물리칠 수 있을까? 이 단어 ‘테네브라스’ 즉 어둠을 갈라 세우고 있는 인물들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이다. 저들의 외침의 핵심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하나님께로. 하나님은 말씀으로, 진리와 사랑으로 역사하시니 그 근원인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벽에 새겨진 글자 셋 중에 유독 어두움이라는 단어만 갈라져 있다. 그래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말씀의 능력을 언급한 것이라고 본다. 히브리서 4:12에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히4:12-13). 하나님 말씀은 모든 영역에서 어두움을 물리치게 하는 힘과 능력이며, 순종하는 자들이 생명과 치유와 회복의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근원적인 하늘의 힘인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선포하는 선한 목자는 예수를 닮아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자세를 바르게 가져야 한다고 츠빙글리는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복음의 바른 선포만이 어두움에 빠진 교회공동체와 역사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츠빙글리는 어두움의 비진리에 서 있는 세력들을 물리치고 치유하며 새롭게 하면서 변화시키는 길을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실생활까지 변화시킴을 믿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은 목자이며, 우리는 양 떼이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목자이며, 진정한 우리들의 목장이고 초원이셔서, 무지와 유혹이라는 인간적 가르침과 어두움 가운데서 우리를 하나님의 지혜와 빛으로 불러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목자의 직분과 과제는 하나님 말씀이 보여주는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하나님의 양들을 돌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목자의 자격을 언급했다. 1) 목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른다. 매일 십자가를 지는 사람으로 그 어느 것도 자기 능력이나 자기 지식으로 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준으로 행동한다. 2) 목자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성령을 받고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3) 목자는 그리스도를 따라 회개의 설교를 해야 한다. 인간은 소망이 없음을 알 때 회개할 수밖에 없으며, 어떠한 존재인지를 모를 때 회개하지 않는다고 했다. 4) 목자는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곧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어야 한다. 곧 목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친 바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목자는 자기 생각과 이론을 따라 살면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위선이 없는 그리스도만이 목자의 참 모범이시다.
그리고 츠빙글리는 목자가 어떻게 양들을 양육해야 하는지를 자상하게 열거하며 가르쳤다.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만 전하는 목자여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심각한 죄의 어두움에 빠져 있는지, 그 죄악과 함께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가르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행복할 수 있음을 전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목자는 모든 다른 것보다 우선순위로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츠빙글리는 이 외에도 죄악을 공격해야 하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고, 악한 군주를 대적해야 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보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목양법을 안내하고 있다.
그리고 거짓 목자 식별법 12가지를 안내함으로 참 목자를 구별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내용은, 1)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가르치지 않는 자 2)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인간의 생각을 가르치는 자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고, 사람의 이익과 영광을 위해 말씀을 가르치는 자 4)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면서도 악한 정치인의 폭정을 방관하며, 비판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에게 아부하는 자 5) 말씀을 가르치지만, 행함이 없는 자이며 행위로 말씀을 허무는 자 6) 가난한 자들을 멀리할 뿐 아니라, 그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를 모른 체 하는 자 7) 목자의 직분을 가졌으면서도 세상 통치자처럼 군림하는 가장 사악한 늑대 8) 갖은 방법을 다해 물질을 탐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경외를 가르쳐주지도 실천하지도 않는 늑대 9) 창조자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섬기도록 이끄는 자 10) 표적과 기적을 일으키고, 점을 치면서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게 하는 자 11) 사람을 이 땅의 신으로 부르며, 그에게 존경과 영광을 바치는 자 12) 자신의 꿈과 환상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거짓 예언자 등이다.
그러나 지금은 진리의 빛이 다시 밝혀져서 곳곳에 퍼져 있는 늑대들을 쉽게 보고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어두움은 반드시 물러가고 밝은 빛의 시대는 오게 되어 있다. 츠빙글리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목숨을 걸고 선포했던 종교개혁 시대를 ‘빛의 시대’라고 부른 것이다. 하나님 말씀 바른 선포가 회복되는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의 회복만이 우리들에게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야말로 우리 인간들을 죽임에 이르게 하는 심각한 병적 증상이라고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착각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모두가 절망하고 불행해질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전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는 탓이라고 한다.
도대체 그는 왜 이렇게 비관적인 생각을 했을까? 여기서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의 이르는 병’은 암(癌)처럼 몸에 깃든 병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고상한 부분’인 정신에 감염되어 있는 병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결코 이 병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에 절망하여 죽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이 절망을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에 따라, 절망의 정도를 나누었다.
1) 가장 위험한 상태는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알지 못하는 절망”이다. 2)이보다 좀 나은 절망은 “자신이 절망하고 있음을 깨닫는 절망”이다. 이 단계에 이른 자들은 삶의 허무함과 고통을 더 이상 바깥에서 찾지 않고 덧없고 무의미한 삶 자체에서 비롯됨을 깨달은 자들이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른 사람들 역시 대부분은 절망 안에서 주저앉아 버린다. 급기야는 아무 희망 없음에 좌절하여 자살에까지 이르곤 한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탓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다.” 신은 죽어 사라져버려서 의미 없을 우리네 삶을 비로소 가치 있고 영원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절망은 변증법적이다. 절망은 인생을 힘들게 만들지만, 그 때문에 비로소 거짓 생활을 진정한 삶으로 거듭나게 만들기도 한다. 고난이 인생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그 의미를 깨우칠 때 삶이 더 깊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처럼, 가장 높은 단계인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려는 절망’은 하나님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와 믿음을 통해 완성된다.
키에르케고르는 “믿음은 절망에 대한 안전한 해독제”라고 말한다. 해독제는 자신이 독에 물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내 삶을 절망에서 이끌어 낼 ‘믿음’은 어디 있을까? 기독교 신자인 키에르케고르는 그 답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찾았다. 그는 믿음만이 희망이라고 말한 것이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가 있다. 그는 1855년 독일 남서쪽에서 유대인 철도 노동자로 태어나 평생 가난하게 살았고, 63살에 처음으로 교수가 되기 전까지 일정한 직업이 없는 재야 학자로 생활했다. 1917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스위스 망명을 한 후 1933년 나치를 피해 방랑한 15년간 유럽 여러 도시와 미국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30년이 넘는 최악의 망명 상황에서도 수많은 책을 펴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스위스에 망명한 이듬해에 낸 ‘유토피아의 정신’, 나치에 쫓긴 지 3년이 지난 1935년에 낸 ‘이 시대의 유산’을 비롯해 많은 책들을 낸 것이다. 그는 그 절망의 순간을 살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절망했기에 희망을 더욱 절실히 추구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74살 때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희망의 원리”라는 책을 완성했다. 이 ‘희망은 원리’는 사실 반세기에 걸친 블로흐 사상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희망을 5가지로 정의했다. 1) 인간은 빵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희망을 먹고 산다. 2)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미 삶 자체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3) 희망이 힘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조건에서도 삶을 포기하지만, 희망이 있는 사람은 최악의 상태에서도 극복하게 된다. 4)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5) 희망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행복을 약속해준다.
이 철학자는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그런데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인 ‘위르겐 몰트만’은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를 읽고 나서 “희망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몰트만은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시다. 희망의 원천이 그리스도이시다. 희망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희망을 누리고, 바로 이 희망을 전도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희망은 기독교 신앙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제다. 헬라 신화에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가 있다. 헬라 신들에 의해 완벽하게 만들어진 판도라라는 여자는 뚜껑을 열지 말라는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해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죽음, 질병, 질투, 고독 등등의 여러 재앙이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판도라는 상자의 뚜껑을 닫았지만 모든 재앙이 튀어나온 뒤였고, 마지막으로 희망 하나만 남았다. 아무리 어려운 재앙이 닥쳐도 희망만 있으면 견딜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세상에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이 아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바로 희망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희망이 있는 한 인생은 불쌍하지 않은 것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이 있는 사람은 사는 것이다. 절망은 인간을 죽이는 독약이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은 우리 모든 인간들을 살리는 명약인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분명히 말한다. 희망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설명할 준비를 하라고 말이다. 그것도 ‘언제라도’ 준비하라고 했다. 이것이 우리들이 유지할 중요한 자세인 것이다.
장공의 찬송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찬송 1절이 이렇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 속에 새롭다 이 빛 삶 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탑 놓아간다.” 장공께서 코로나 상황은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는 인류 역사에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당신들은 “하늘의 빛, 땅에 소금, 역사에는 누룩”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