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숙여 더 낮은 곳을 바라보라.
한련화

장마가 시작되었다.
장맛비라고 하는데, 지난봄에 내렸던 국지성 호우보다도 못하다. 현재는.
이러다가 사계절이 실종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 걱정도 된다. 올해는 유난히도 계절이 불안정하게 다가왔다. 지난겨울부터 장마철이 오기까지 사계가 뚜렷하다던 우리나라의 계절답지 않았다. 저온현상으로 어렵사리 뒤늦게 꽃을 피웠던 옥상의 귤나무는 조롱조롱 열매가 맺히는 듯했다. 벌써 20년 이상 된 귤나무라 어머니는 없애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이렇게 꽃이 폈는데 올 한 해만 기다려 주십시오.”했다. 지난해에 열매를 많이 맺지 못했으니 해거리를 하면 올해는 많이 열릴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름이 오기도 전에 내리쬐는 햇살은 한여름의 뙤약볕이었다. 결국, 조롱조롱 열렸던 밀감들이 모두 새까맣게 타 죽었다.
어머니는 크고 화사한 꽃을 좋아하신다. 나는 작고 수수한 꽃을 좋아한다.
때론, 그, 기호 때문에 서로 좋아하는 꽃에 대해 “그게 무슨 꽃이냐?”라고 하기도 한다.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꽃 중에 ‘한련화’라는 꽃이 있다. 이파리가 연꽃을 닮았고, 꽃은 어리연꽃 비슷하기도 하다. 솔직하니 꽃은 별로고, 이파리는 예쁘다. 연잎처럼 물방울을 송글송글 가장자리에 담고 있을 때면 나도 그가 좋다고 하고, 연한 이파리를 따다가 삼겹살을 구워먹을 때 쌈으로 먹을 때면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꽃은 대부분 먹을거리와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보릿고개를 수없이 넘었던 어머니 세대가 짜하게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도 장마철이라고 이틀 동안 제법 굵은 비가 내렸다.
어머님의 꽃밭에 가보니 한련화 꽃이 비에 젖어 축 늘어져 있다. 이파리는 저마다 물방울 보석을 달고 “신난다!”하고 있는데, 꽃은 비에 젖어 축축 늘어졌다. 조간신문에서 읽은 도종환 시인의 ‘꽃은 비에 젖어도 향기와 빛깔을 젖지 않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생각났다. 시인 ‘향기는 꽃의 언어’라고 하면서 라일락에 대한 추억을 꺼내어 놓는다.
라일락꽃은 하루 종일 비에 젖으면서도 제 빛깔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연보라색이라 비에 젖으면 금방 지워질 것 같은 여린 빛인데도 제 빛깔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니 내일 또 비에 젖어도 제 빛깔과 향기를 지니고 있을 것이고 내년에 다시 비에 젖어도 제 빛깔과 제 향기를 잃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한겨레신문 7월 3일자)
시인을 떠올리며 한결같은 길을 가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게 이 시인의 이미지는 한결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 이미지가 지속하기를 바라는 것이 내 욕심일지는 모르겠지만, 시류에 따라 변하는 ‘변절자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겪는 요즘이라 그런 마음이 더 간절한지도 모르겠다.
우중에 한련화를 바라본다.
꽃잎은 빗방울을 튕겨내며 신이 났는데, 꽃은 짓무른데다가 빗방울 하나도 무겁다고 축 늘어졌다. 어떤 꽃은 아예 꽃을 닫지도 못하고 벌떡 하늘을 향해 제 몸을 다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꽃은 모두 다소곳이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꽃이 살포시 고개를 숙이고 흙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낮아짐’에 대해 묵상을 했다.
요즘 저녁엔 자전거를 타고 한강 둔치를 다녀오는 일이 많아졌다.
맨 처음엔 운동하려고, 나중엔 한강을 거닐며 본 죽어가는 한강(정부와 4대강 사업을 강행하는 이들은 한강을 4대강의 모델이라고 주장한다.)에 충격을 받아 그 기록을 남기려고 종종 찾는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보니까 차를 타고 다닐 때 보지 못하던 것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 한 가지가 한강으로 들어오는 지류에서 나는 썩는 냄새였다. 차를 타고 다닐 때는 몰랐는데, 자전거를 타고 호흡을 깊게 하니 탄천, 양재천, 중랑천 할 것 없이 냄새가 고약하다. 자전거에서 내려 악취의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 보니 수중보 같은 것들에 썩은 물과 쓰레기가 지천이다. 차를 버리고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걸으니 신음하는 한강의 속살을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낮아질수록, 천천히 갈수록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세상살이가 그런 것인데 경쟁사회에서 살아가다 보니 그저 높은 것만 바라보고 살아가느라 낮게 살아가는 법, 고개 숙여 낮은 곳을 바라보는 법을 잃어버린 것이다.
한련화, 연꽃을 닮았음에도 흙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꽃. 닮은 구석이 많아도 다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하늘’과 ‘땅’, - ‘땅에서도 이뤄지이다!’ 주님의 기도를 보는 듯하다. 어떤 대상을 보고 느끼는 감정들 혹은 생각들은 자기 마음의 투영이다.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이 나온다는 이야기다.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람은 절망에서도 희망을 보고, 절망이 가득 찬 사람은 희망에서도 절망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라의 지도자라는 분들은 국민의 마음에 긍정적인 생각을 심어줘야 한다. 자꾸만 거짓말을 하고, 국민의 이야기를 들은 척 만척하면 국민의 마음에 불신이 생기고, 이 불신이 사회에 만연하면 그 바람이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이른바 ‘불신 풍조’다. 막연한 기대감만 부추기는 것도 문제지만, 어떤 기대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큰 문제다. 고개 숙여 낮은 곳을 바라보면, 지금 당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터이고, 고개 숙여 땅에 피어난 들풀을 바라보면서 묵상하는 시간을 잠깐만 가져도 불철주야 밀어붙이는 4대강 사업이 얼마나 큰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 터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얼마나 파괴하는지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긴, 그 일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분이 장로님이요, 그런 일을 지지하는 기독교단체까지 있으니 과연 오늘 한국의 기독교가 제대로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인지 두렵기도 하다. 한 개인, 단체에 불과하다고 변명할 수도 있지만, 그런 기형적인 기독교인과 단체를 낳은 것은 결국 한국교회이므로 한국교회는 좀 더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더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을 고개 숙여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멀리 가지 말자.
너무 멀리 보지 말자.
지금 내 일상에서, 내가 까치발을 들지 않고서도 볼 수 있는 범위에서 겸손하게 고개 숙여 낮은 곳을 바라보고, 그곳을 향하자. 그것만이 살길이다.
한련화가 굵은 장대비에 고개를 더 깊이 숙인다. 장마철은 장마철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