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초에 <별세의 삶>이라는 계간지에서 기고 요청받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제가 이중표목사님이 사역하셨던 고부교회에 근무하였기 때문에 제 글이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원고를 써가는 중, 개인적으로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기고를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글이 자신을 터무니없이 미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을 타산지석으로 깨달은 후 이런 글은 앞으로 쓰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담당자에게 양해를 구했지요(그 이유는 다음 글에서 넌지시 밝히겠습니다. 그러나저러나 당시 한신교회 담당목사님께 뒤늦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때 빛을 못 본 “미완성 원고”를 여기에 ‘드러냅니다’. 미완성이라고 하니 왠지 신비롭군요.
월남전에 참전한 군인이 헌물한 고부교회 종탑입니다.
초겨울의 어둠이 짙게 깔린 적막한 시골, 전투기의 굉음이 이어진다. 무슨 일일까 ‘기도실’ 문을 나서는 순간, 장관의 우주 쇼가 눈앞에 펼쳐진다.
주황색 가로등에 살짝 드러난 하얀 예배당 뒤로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초롱초롱 반긴다. 이럴 때면 하나님이 마치 극장을 통째로 빌려 프로포즈하는 연인처럼 느껴진다. 놀라워하는 나를 바라보시면서 흐뭇해하시는 모습이 단박에 느껴진다.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위를 응시하면 되었을 터인데 사실 그 동안 무심했다. 얼마나 많은 주님의 이벤트가 수포로 끝났고 말았을까?
교과서의 별자리 삽화를 옮겨놓은 듯한 하늘, 이 곳의 밤하늘은 아름답다. 먼 남방국가를 오가는 고공의 여객기 점멸등은 지금의 광경이 라이브(live)라는 신호이다. 그리고 반짝이는 별빛은 과거와 현재를 신비롭게 공존시킨다. 내가 “지금” 보는 저 북극성은 “800여 년 전”의 북극성인 것이다. 그 때 저 별에서 출발한 빛 한 가닥이 나에게로 와 그 긴 여정을 마치고 있는 중이다.
마침 거짓말같이 별똥 하나가 느낌표를 그으며 사라진다-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시편 8:3-4). 시편 기자의 고백이 내 속에서 공명되어 터져 나온다.
“별들이 저렇게 아름다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꽃이 한 송이 있기 때문이야”(『어린 왕자』).
저 별들 어딘가에 그 꽃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수많은 별들도 덩달아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 별(자연)에 머물러서는 쇼펜하우어식 염세주의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 없다. 꽃(하나님)을 느낄 수 있을 때 세계와 인생이 의미로와지는 것이다. “세계의 의미는 세계의 밖에 놓여 있어야 한다”(『논고』6.41)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면 무리일까?
굽이굽이 이어진 계단 길의 끝, 말 그대로 동산(東山) 위의 하얀 예배당을 이 자리에서 바라보노라면 마치 긴 칼 옆에 차고 한산도에 서있는 이순신 장군처럼 느껴진다. 폼이 그렇다는 거지, 최전방의 작은 별동대(別動隊)를 이끄는 신참 소대장에 가깝다. 때론 서툴고 겁도 내지만 군기만은 확실히 들어있는 그런 장교 말이다. 실제로 나는 목사 직분을 군복무(딤후 2:3-4)하는 것처럼 수행하고 있다. 외부의 ‘환난과 핍박’이 없는 시대에 너무 비장한 설정일 수 있다. 그렇지만 “경기하는 자”나 “수고하는 농부”는 약하고 기업 CEO나 문화센터 엔터테이너 이미지는 잘 내면화되질 않는다.
사실, 삶은 전쟁터이지 않은가? 나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영적이든 현실적이든지 간에 어떤 하나님 백성들은 전쟁터 같은 세상 속을 살아가고 있고, 그들과 연대되어 함께 구원에 이르러야하는 임무를 받은 이상 이러한 환경은 피해갈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인 내게 맡겨진 임무- 좀 과장하자면 난 오로지 이것만 생각한다. 존재 이유랄까, 이것 없으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까닭이 없다. 임무를 잊는 것은 조문을 가서 밤새도록 울고 난 후 ‘근데 누가 죽었지요?’라고 묻는 것과 같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 왜 이 일을 하는지 망각하고 헛수고하는 어리석음은 면하고 싶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의 밀러 대위는 임무에 충실한 군인이다. 총탄에 벌집이 된 채 희미해져 가는 그의 의식을 끝까지 차지하는 생각은 역시 임무이다. “라이언 일병 구출”이 성공한 것을 보며 죽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밀러 대위를 임무지상주의자로 보면 안 된다.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는 열망과 자신의 가치관에 따르는 헌신 없이는 이런 모습이 나올 수 없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