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53: 1-9)
오늘 우리는 본문말씀을 통하여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우리의 본문말씀에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고난의 내용과 목적과 의미가 아주 상세하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지혜와 경험으로는 도저히 해석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습니다만, 그런 문제들 중의 하나가 바로 고난에 관한 문제입니다. 왜 인간에게 고난이 있느냐? 왜 의로운 사람에게도 고난이 있느냐? 이런 문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왜 인간에게 고난이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가장 보편적이고 흔한 대답은 , 인과응보의 법칙입니다. 즉 어떤 잘못된 원인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로 고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 성현들은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공자의 말씀 중에 “착한 일을 하는 자에게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한 일을 하는 자에게 하늘이 화를 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묵자의 말씀에도 “임금이 덕행을 실천하면 하늘이 선으로 갚고, 임금이 악을 행하면 하늘이 벌을 준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러가 하면 힌두교나 불교에는 윤회전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상에 따르면, 사람의 영혼은 몸이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수레바퀴와 같이 계속 돌면서 다음 생에 다른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고생을 하면, 그는 먼저 번 생에서 나쁜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에는 물론 윤회전생의 사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과응보의 사상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선한 일에 대해서는 장수와 번영과 평강을 주지만, 악행에 대해서는 칼과 기근과 질병으로 징계하신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왜 인간이 고난을 당하느냐? 그 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 성서의 교훈입니다.
그 외에도 성서에는 고난의 원인에 관한 교훈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한 고난도 있고, 징계를 위한 고난도 있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과 목적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그리스도는 죄와 악은 흔적도 없는 무흠한 의인이요, 연단 받을 필요나 징계 받을 필요도 없는 분이신데, 왜 그 끔찍한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고난이라고 하지만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만큼 아프고 괴롭고 비참하고 처절한 고난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님은 정말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요, 속된 표현으로 팔자가 사나운 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에는 그리스도가 당하게 될 고난의 내용이 하나하나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그리스도는 어떤 고난을 , 왜 받으셨습니까?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적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그는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강한 순이 아닌 연한 순이요, 기름진 땅이 아닌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름 가뭄에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를 상상해 보세요. 가늘고 시들고 생기가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본문의 표현 그대로 예수님의 가문이나 출생이나 성장과정이 초라하고 볼품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천하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것도 마구간에서 태어났으며, 젖먹이 때부터 피난생활을 해야만 되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자기 집을 가지고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셨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요한복음 8:57에 보면,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나이를 근 50세 가까이 보았습니다. 30대 초반의 예수님의 나이를 근 50대 가까이 보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난과 고생 때문에 일찍 늙으셨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미남으로, 핸섬하게 생겼을 것 같습니까? 본문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2절에 보면, 그는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 받을만한 아름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그 외모에 있어 영웅호걸 같은 풍채나 용맹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슬픔과 비애와 고통과 질병을 짊어진 분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싫어서 버림을 받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많은 경우에 반대를 받고 멸시를 받고 거절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지막에 집권자들에게 체포되어 침 뱉음을 당하고, 매를 맞고, 심문을 당하고, 사형 언도를 받아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는 극악한 죄인을 공개적으로 죽이는 형틀이고 보면, 그는 극악한 죄인의 취급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고난을 짊어지고 고난과 함께 사셨습니다. 육신의 고난과 함께 정신적인 고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의 전 생이 쓰디쓴 고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왜 이런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결코 예수님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정말 죄가 많아서 하늘로부터 벌을 받아 고난을 받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본문 4절에도 보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런 가혹한 매와 벌을 받을 만큼 무거운 죄를 범한 분은 아닙니다. 아니 그에게는 아무런 거짓이나 속임도 없었고, 강포를 행한 적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한 빌라도 총독마저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해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와 허물 때문이요, 온 인류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본문 5절 말씀대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입니까?
이 대답을 듣기 전에 우리는 잠깐 죄의 본질에 관한 말씀을 들으십시다. 본문 6절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이간이 하나님을 져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제 마음대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죄는 곧 하나님을 버리고 제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죄라고 하면 살인이나 강도나 음행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것이 죄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런 것은 죄의 증세, 죄의 증상이지 죄의 본체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감기라고 하면 콧물이 나고 재채기를 하고 기침을 하고 열이 나는 것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감기가 들었을 때에 나타나는 증상이지, 감기 자체는 아닙니다. 감기의 본체는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기 전에 벌써 바이러스나 세균이 몸에 침입하여 기도에 염증을 일으킨 상태를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살인이나 강도나 음행은 죄의 증상들이고, 죄의 본체는 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근본적인 뿌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여러분 누가 불효자 입니까? 부모님을 거역하고 제 마음대로 사는 자입니다. 누가 죄인입니까? 하나님을 거역하고 제 마음대로 사는 자입니다. 우리는 다 양과 같이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고 불순종하던 자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떠나 제 마음대로 사는 사람에게 무엇이 결과적으로 따라 왔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온갖 불행과 죽음입니다. 우리가 양지에 서서 햇빛을 받을 때에는 밝고 따뜻하지만, 그러나 음지에 있을 때에는 어둡고 춥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해요 태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 때에는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와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살면, 그때부터 우리에게 불안과 근심이 따르고, 괴롬과 절망과 사망이 따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런 죄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누가 과연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사람으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수양을 하고 덕을 쌓아도, 사람이 아무리 기도를 하고 참선을 해도, 사람의 힘으로는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죄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말씀은 고난의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고 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비로소 왜 하나님의 아들이, 흠과 티가 없이 의로우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 무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죄악을 담당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19세기 중엽에 코카사스지방에는 샤밀(shamil)이라고 하는 종교 및 군인 지도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의 부족다게스탄(Dagestan)을 러시아에서 독립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패배의식이 짙어져서 적과 협상을 하려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샤밀은 이 협상론 자들을 막기 위하여, 앞으로 협상을 주장하는 자는 100대의 채찍을 맞게 되리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의 명령을 어긴 한 범인이 붙잡혀 왔는데, 그는 불행하게도 바로 샤밀 자신의 어머니였습니다. 샤밀은 사원에 들어가서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다가 사흘째 되는 날 백성들을 모으고, 집행관에게 죄인을 끌어내어 채찍으로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섯 대를 때렸을 때, 그는 중지 명령을 내리고, 나머지 95대는 샤밀 자신이 옷을 벗고 심하게 맞았습니다. 이를 본 백성들은 큰 감화를 받고 다시는 협상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군인대장은 왜 자신이 95대의 채찍을 맞았습니까? 그 이유는 어머니의 죄를 자신이 담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100대의 채찍을 어머니가 맞았다면 어머니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고 때리지 않았다면 법과 공의가 무너졌을 것입니다.
레위기 16장을 보면, 속죄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속죄일이 되면 제사장 아론이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백성들의 모든 죄를 그 염소에게 담당시키고 떠맡기게 하는 의식을 행하고, 그 염소를 광야로 내어 보냈습니다. 그 염소를 속죄양이라고 합니다. (아사셀 scape goat) 그러므로 그 염소는 백성의 모든 죄와 불의를 대신 짊어지고 나갔습니다. 그 염소가 백성의 죄를 담당한 것입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를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셔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기 위한 것입니다. 본문 5절 말씀대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입니다. 예수님의 지신 십자가, 예수님의 쓰신 가시관, 예수님의 손발에 박힌 못, 예수님의 허리에 찔린 창, 예수님의 온갖 수치와 모욕은 모두 우리의 죄를 대신한 것이요, 우리를 살리기 위한 것이요, 우리의 죄를 담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남을 위해 고난 받는 고난의 종으로 사셨고, 고난의 종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당하신 고난의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고난은 어떤 효과를 가져왔느냐 말입니다. 그 것은 곧 우리의 치유요, 우리의 평화입니다.
본문 5절에 보면,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
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요즘은 수술이 발달되어 장기이식수술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의 눈이나 콩팥이나 심장 같은 것을 떼어다가 환자에게 이식을 합니다. 몸의 일부를 떼어주는 사람은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러나 떼어주는 자의 고통 때문에 환자는 나음을 얻고 평화를 얻습니다.
여러분 의로우신 예수님의 상처와 아픔 때문에, 오늘 여러분의 죄의 상처가 아물고, 죄로 인한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의로우신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회복되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성가를 통하여,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샘솟는 기쁨, 내게 바다 같은 사랑을 노래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때문입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하늘나라를 향해가는 기독도의 어깨에는 언제나 죄 보퉁이가 매달려서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기독도가 언덕에 올라 거기에 서 있는 십자가를 보자마자 그 죄 보퉁이는 저절로 떨어져서 굴러 내려갔습니다. 죄 보퉁이가 떨어지니 그렇게 시원하고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러분의 죄 보퉁이를 벗겨주는 힘을 가졌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를 소멸시켜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러분의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는 힘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러분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러분의 마음에 강 같은 평화와 샘솟는 기쁨을 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골고다 언덕에선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세요. 예수님이 지신 나무 십자가는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고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표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내가 너희 죄를 용서하노라. 내게로 와서 구원을 받으라.”는 표적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하나님의 품을 떠나 방황하며, 죄 짐을 짊어지고 염려와 근심 속에 사는 분이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 여러분의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상처가 치료를 받고,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응답하여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