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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고난과 선교

윤기석 (경기노회,수원교회,목사) 2010-08-09 (월) 16:14 14년전 4387  

(본문: 골로새서 1: 18 - 19)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괴롬과 고난이 없을 때에 기쁨과 행복을 느낍니다. 반대로 괴로운 일과 고난을 당하면 탄식하고 낙심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이요, 또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에는 이와 정반대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괴로움을 기뻐한다는 말씀이 있고, 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해서 받는 고난과 괴로움을 기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남의 고난을 기쁨으로 짊어질 수 있습니까? 인간의 평범한 지식과 경험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무슨 이유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고난을 기쁘게 여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괴롬과 고난의 의미를 바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바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바로 바울자신과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선교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그 고난에 기쁨으로 동참할 때, 거기서부터 선교는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이 불굴의 전도자요 가장 훌륭한 전도자가 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하고,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웠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자만이 전도도하고 봉사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고난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의 고난과 더불어 발전되어 왔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첫째로 들어야 할 말씀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20절에 보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사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죄를 범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있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으시고 피를 흘리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풀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기까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와 여러분의 죄를 도말하시려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시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분명히 기억 할 것은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은 인간을 위하여 그의 몸으로 고난을 당하시고, 그의 피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도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고, 고난을 통하여 그들의 신앙을 확증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두 번째로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믿는 자들의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하여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를 섬기고 선교하는데 따르는 온갖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고난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받아야 할 몫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의 고난입니다. 이 속죄를 위한 고난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완전히 성취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속죄의 복음을 전하는데 따르는 고난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르는데,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도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며 살아야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으라는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맛보며 살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재물과 노력을 희생하고 핍박과 모욕과 죽음도 달게 받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선교의 책임을 수행하는데 수반되는 모든 괴롬과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의 교회,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데 너무 인색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찾고 예수를 믿는다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내세의 영생복락을 얻는 데는 관심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우며 사는 데는 너무 인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든 세상에 섬기는 종으로 오셔서, 박해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그가 보여준 모범을 따라 살지 못하니 얼마나 죄스러운 일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거저 십자가 없이 희생과 고난 없이 믿으려고 하니,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본문 말씀을 통하여 세 번째로 들어야 할 말씀은 우리도 이제 선교의 현장에 뛰어 들어 충성된 일꾼이 되자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23절) 오늘 우리도 선교사역을 위한 복음의 일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결코 팔짱을 끼거나 뒷짐을 짓고 방관만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는 결코 남들은 교회를 위하여 시간 바치고 물질 바치고 봉사하고 전도하는데, 자기만은 무관심하거나 모르는 척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 복음의 일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 중에 혹시 교회 일에 관심이 없고, 전도에 열심히 없는 자가 있다면, 그는 어딘가 예수를 잘 못 믿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예수가 누구인지 몰라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괴롭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가 친히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기 까지 인간을 섬기신 분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사랑에 감사 감격하고, 그 고귀한 뜻에 복종하여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오늘과 같이 삶의 영역이 다양화된 사회에서는 그 선교의 현장 역시 다양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가정, 시장, 학교, 회사, 공장, 병원, 농장, 관청 등등이 다 우리가 가서 일하고 선교해야 할 곳입니다. 우리는 어느 곳을 가든지 그 곳에서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천막을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일하면서 동업자들에게 전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일하는 직장의 동료들과 친구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 우리의 친척과 이웃들을 인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금년은 우리교회가 설립 된지 50주년이 되는 해로서 우리는 금년을 우리교회의 희년으로 정하고, 여러 가지 뜻 깊은 행사들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행사들이 다 좋고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여, 그들을 죄의 종에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희년의 가장 큰 의미는 자유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잃었던 기업으로 돌아가는 자유, 종노릇에서 벗어나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자유, 고역과 중노동으로 부터의 자유가 희년에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유로서, 모든 죄로부터의 자유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래서 속죄일에 나팔을 크게 불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떻게 죄로부터 해방되고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는 복음이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중요한 희년사업으로 한 사람씩 전도해야 합니다. 금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남은 기간에 우리는 반드시 한 사람씩을 전도하여 희년의 기념비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본문말씀을 통하여 마지막으로 들어야 할 말씀은 우리도 선교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워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웠겠습니까? 우리가 사도 바울의 체험담을 읽어보면 그가 받은 고난을 충분히 알만 합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헐벗고 굶주리고 자지 못했다고 했으니,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웠습니다.

또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다고 하니,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웠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울 수 있습니까? 우리도 다 헐벗고 굶주리고 투옥되고 매 맞아야 합니까? 경우에 따라서 비상시에는 우리도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헐벗고 자지 못하고 굶주리고 투옥되고 매 맞음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울 것입니다. 그러나 비상시가 아닌 경우에는, 우리가 교회의 발전과 선교를 위하여 힘쓰고 애쓰고 수고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울 수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가사로 분주하고 고달플지라도 교회 부흥을 위해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하기를 힘쓰고 봉사에 힘쓴다면, 그것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힘써 기도하고 찾아가고 모셔오느라고 고통을 감수한다고 하면, 그것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 사업을 위해서 생계비를 줄여가면서도 재물과 보화를 바친다고 하면, 그것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것입니다.

본문 2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교회 발전과 선교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수고하고, 전도를 위해 힘쓰고, 자유와 정의 구현을 위해 힘쓴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짧은 선교 역사에 비하여 빠른 성장을 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초기의 선교사들과 교인들이 선교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저들의 육체에 채웠기 때문입니다. 특히 1866년에 영국의 선교사 토마스 목사는 대동강 변에서 피를 뿌려 순교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웠습니다. 그는 26세라는 나이에 선교를 위하여 죽음의 고난을 당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와 피부가 다르고 언어풍속이 다른 외국의 젊은 아들까지 우리나라에 와서 고생을 하고 순교까지 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리하여 우리도 복음으로 구원을 얻었는데, 어찌 우리가 우리의 동족, 우리의 이웃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는 마음으로 선교에 매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피 위에 세워졌고, 성도들의 고난과 피를 통하여 성장해 왔습니다. 고난 그 자체는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쁨으로 동참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쁨으로 우리 육체에 채우며 선교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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