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 1 - 6)
오늘은 종교개혁 479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이란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전통을 바르게 고치고,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를 정화하자는 운동입니다. 1517년 10월 31일에 개혁자 M. Luther는 비텐벨그 성당 대문에 교회개혁의 필요성과 내용을 제시하는 95개조의 논제를 내걸었습니다. 이 논제들은 주로 당시 문제가 되었던 고행과 면죄부에 관한 반박문 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보면 개혁의 기본정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당시 천주교회에서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고행을 하고 공적을 쌓아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논리 위에서 면죄부도 팔았습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를 반대하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득의의 교리를 주장했습니다.
종교개혁의 두 번째 정신은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표준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천주교회는 교황의 칙령과 교회의 전통이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주장위에서 교황 무오설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 잘못된 교리와 전통을 반대하고, 오직 성서만이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세 번째 정신은 양심의 자유입니다.
인간은 양심을 따라 말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교황의 명령과 교회의 전통도 양심에 저촉될 때에는 거부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네 번째 정신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데, 그 영광은 성도들의 거룩함과 순결을 통하여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이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아 갈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본정신과 원리위에서 잘못된 교리와 전통을 바르게 고치고 개선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종교개혁은 과거 16세기에 일어났던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할 운동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잘못된 교리와 전통에 빠질 수도 있고,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끝까지 지키고 고수 하겠다는 욕망이 있습니다. 전통이라는 말은 선조들로부터 수세대 동안 전해 내려오는 어떤 신념이나 법이나 습관과 같은 것들입니다.
가령 옛날 우리 조상들이 남자는 상투를 매고 여자는 비녀를 꽂은 것이라든지, 남녀가 내외를 하고 여자는 집밖에 나갈 때 요즘 아랍권 여성들 같이 쓰개치마를 쓴 것이라든지, 조상들의 제사에는 반드시 음식을 차려 놓고 절을 하는 것이라든지, 아들에게 우선적으로 호주 상속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은 모두 우리의 조상들이나 지금 우리가 가진 전통들입니다.
이런 전통들은 하도 오랫동안 계속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랜 전통을 개혁한다거나 폐지한다는 것은 마치 집안이 망하고 나라가 망하는 것으로 생각할 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1895년, 지금부터 꼭 100년 전에 단발령이 내렸습니다만, 그 때 사람들은 머리털을 깍는
것은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땅을 치고 통곡을 하기도하고 피신을 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 여러분의 모습 그대로, 머리를 짧게 깍고 남녀혼석으로 앉은 그대로 100년 전 여러분의 조상 앞에 나타났다고 하면, 아마 여러분의 조상들은 쇼크를 받아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집안 망하고 나라 망한다고 몽둥이 들고 오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신앙처럼 굳게 지켜오던 전통도 다 깨어지고 고쳐지고 바뀌었습니다. 그야말로 개혁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리를 짧게 깍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에게는 과거의 전통과 유산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집착이 있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것들을 고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려는 진보의 의욕도 있으며, 새로운 것이 나타날 때에는 또 거기에 적응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는 옛것과 새것, 보수와 진보, 전통과 개혁의 충돌과 조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본문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이 신앙처럼 여기고 있던 전통하나를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 것은 안식일에 병을 고친 사건이었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는 것은 용서 못할 범법 행위였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제 4계명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거기 한 편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나 고치지 않나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엿보는 분위기를 아시면서도, 안식일에 병을 고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한 편 손 마른 사람에게 한 가운데 일어서라고 말씀하시고는, 책잡으려는 사람들을 향하여 질문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다른 복음서에는“너희들이 소나 양이 안식일에 웅덩이에 빠졌으면 건져주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잠잠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편 손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 때 곧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유대인의 아주 중요한 법이요 전통인 안식일 법을 범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에서 본다고 하면, 예수님은 당시 잘못된 안식일 법을 새롭게 개혁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으나, 그러나 예수님은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은 하는 것이 더욱 좋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기존의 모든 전통을 허물어 버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성전 세를 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아셨지만 그러나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께서 기존의 법과 전통을 무시하거나 파괴하시지 않고 그대로 지키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슨 전통이나 무슨 법이라도 다 지켜야 한다는 그런 입장을 취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이 점에서 악법도 국법이면 지킨다는 소크라테스의 입장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은 비록 국법이나 교회법일지라도 악법은 그대로 지킬 수 없고 개혁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말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한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기존의 법이나 전통이나 교리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 하시려고 오셨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시 법과 전통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세리와 더불어 음식을 잡수신 일이라든지, 창기들의 친구가 되신 일이라든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쫒은 일이라든지, 이런 일들은 모두 법과 전통을 정면으로 거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행동도 실은 율법을 완전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이 사랑을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 어느 것이 옳으냐?”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한 편 손 마른사람을 고치신 것도 율법의 정신인 이웃사랑의 차원에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우리의 그리스도로 믿고 그의 뒤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낡은 것을 개혁하고 새것을 창조하는 일을 항상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교회, 우리국가,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낡은 전통을 깨뜨리고 개혁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야 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유의 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오래된 것이라고 해서 모두 폐기해야 할 낡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폐단 하나는 기성세대에 대한 거부와 반발입니다. 늙은이들의 생각이나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은 모두 케케묵은 낡은 것으로 거부해버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부모님 말씀이나 스승의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가진 또 하나의 폐단은 서양 사람들의 문화나 생활양식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선조들이 물려준 것, 한국적인 것은 폐기처분 하려는 정신 상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매일 읽는 성경말씀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오래된 책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노인들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경험과 삶의 지혜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조들이 물려주신 것 중에는 세계인들이 따라 올 수 없는 훌륭한 것들이 많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유의 할 것은 온고지신의 계속적인 노력입니다.
온고지신이란 옛것을 익히고 새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새 것과 옛 것을 그 곡간에서 내어오는 집 주인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일꾼들은 새 것과 옛 것을 익히고 배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것에만 붙잡혀 있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새 것만 고집해서도 안 됩니다. 어른들의 경험과 슬기와 업적을 존중하여 그것을 배우고, 그 위에 새 것을 배우고 연구하여 더 좋은 것을 창조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낡은 것은 청산되고 날마다 새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오직 매일 매순간 회개로서만 가능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유의할 것은 개혁의 기준을 언제나 선을 행하고 만물을 살리는데 두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큰 개혁이라도 악을 행하게 되고, 죽이는 것이 된다면, 그 것은 개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을 개혁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교각살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소뿔을 고치려하다가 소를 죽인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개혁도 좋지만 그 동기와 방법이 좋지 못하면, 결국 그 공동체나 사회에 해악을 가져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개혁하는 것이 정말 이웃과 공동체에 선을 행하고, 그것을 살리는 것이냐 하는 물음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택한 직장과 사업도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공동체를 유익되게 하며, 자연 환경까지도 살리게 하는 것인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죽어가던 시대적 양심을 살리고, 왜곡된 진리를 바로 세우고, 유린된 성서의 권위를 일으켜 세웠다는 점에서 선을 행하고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당시 타락했던 천주교까지도 반성하고 자체 안에서 개혁운동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살리는 운동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온전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옛 것과 새 것을 익히고 배우게 하시며 새롭게 개혁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날마다 회개하여 스스로를 개혁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을 기준하여 교회와 사회의 개혁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