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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근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박원근 (서울남노회,이수중앙교회,목사) 2010-11-20 (토) 14:16 14년전 4703  

제목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눅7:36-50, 고전 4:6-7

1863년 아브라함 링컨은 “우리는 과거 다른 어떤 국가가 성장했던 것보다 그 수와 부, 권력 면에서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한 대신에 하나님을 잊어버렸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후 150년이 흘러간 현재 영국의 천재 물리학자 호킨슨은 “과학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었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현대인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는 어떤 세상입니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의 두드러진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인간의 의존의식을 자율의식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셨는데, 현대인들은 “그것은 과거사일 뿐이다. 지금은 말씀 없이 떡 만으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하나님 없이 이성만으로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철학적 무신론자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은 없다”고 항변했지만, 지금은 실용적 무신론자들이 일어나서 전문가들의 권위를 빌려 점잖 하게 “하나님은 더 이상 있어서도 안 되며, 있을 필요조차 없다”고 방자히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신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자립해서 독립적으로 살 수 있다는 말합니다.

또 하나 현대인들은 부채의식을 권리의식과 자격의식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1932년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독일 인권 연맹에서 ‘나의 신조’란 제목의 강연을 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나는 종종 내 삶의 엄청나게 많은 부분이 나의 동료들의 수고와 노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나는 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과학자도 자신의 업적이 동료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마치 자기 혼자서 영예를 독차지하는 것 같아 죄송하고, 송구스럽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러한 부채감, 빚진 자 의식은 다 사라져버리고, 그 영예를 자기 자격으로 얻은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의존의식이 자율의식으로, 부채의식이 권리의식으로 바꾸어지게 되자, 우리 사회에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 무엇입니까? 은혜라는 말이 실종되고, 감사가 증발되어버렸습니다. 아니 감사할 마음조차 사라져버린 싸늘한 세상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감사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말은 참으로 비극입니다. 생명수의 강인 은혜와 감사의 실종은 우리 사회를 필연적으로 폐허로 변하게 하고, 사막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정신적인 공항을 맞게 하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사라지게 되면 은혜를 헛된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은혜의 샘이 고갈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패역한 세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미국의 인기 만화작가인 바트 심슨 (Bart Simpson)은 이러한 현대인들을 풍자해서 말하기를 “누가 나에게 식사기도를 부탁한다면, 나는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이 음식을 위해서 친히 모든 값을 다 지불하였나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현대인들을 향해서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사도 바울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며 책망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성서는 “오직 한 가지 대답뿐이다. 아무 것도 없다는 말뿐이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성서는 “너희가 그렇게도 거만을 떨며, 뽐내고 있는 그 자율과 자격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 이성이 너희의 것이란 말이냐?”고 되묻습니다. 저 역시 그러한 현대인을 향해서 “그대들의 몸과 그 몸으로 이루어가고 있는 모든 것이 다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지, 어느 날 우연히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너의 생명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 줄 아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제가 자신 있게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단 하나도 예외 없이 다 은혜로 받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선택해주신 것은 단지 은혜 가운데서 그 분의 사랑 때문이지, 무슨 우리가 선택을 받을 만한 자격이나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는지 알고 나 계십니까? 그 것을 단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고, 선택하신 일은 하나님 자신의 피를 말리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이악한 세상에 보내는 일이 쉬운 일이였겠습니까?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아버지인 하나님 자신이 못 박히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죄인들을 자신의 피로 인을 쳐서 의인이 되게 해야 했습니다. 이 일은 생명을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와 사랑에 강권적으로 사로잡히게 된다면,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찌 그 지고하신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그것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니라.” (신7:7-8)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은 세상에서 가장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천박한 노예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기에 선택해주신 은혜였다”는 말입니다. 실로 이스라엘은 크고 강해서 지혜롭고 아름다워서 선택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딱하고 불상해서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시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기에 구원해주신 것이올시다.

다윗 역시 왕이 된 후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며 놀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 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데,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참 신이 없음이니이다.” 이렇게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 사랑해주셨습니까? 모세나 다윗만 축복하신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G20 정상회의를 우리나라가 훌륭하게 치러 내는 것을 보고 세계가 놀랐습니다. 세계의 최고 현안인 환율 문제를 슬기롭게 수습하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에서 일어나는 첨예한 갈등들을 잘 조정해 냄으로써 세계로부터 훌륭한 지도력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중국 광저우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안게임을 보십시오. 우리가 일본을 크게 압도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우리가 잘 한 것은 정치가 아닙니다. 경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하나 잘 섬긴 것밖에 없는데,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저는 몇 년 전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하면서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있는 성묘교회를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못 박이신 바로 그 자리에 거대한 성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들어가 보니 그 안에 주님의 무덤이 있는데 십자가 밑에 넓은 돌 판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위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수습하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달리신 그 십자가 밑에는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가 그린 피에타 (Pieta)라는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의 발 앞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부추겨 내리고 있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말없이 경이감에 싸여 두 눈과 손을 하늘로 향해 치켜들고 서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똑바로 선 십자가의 기둥 위에 단테의 파라다이스(Paradise)란 책에서 따온 문장 “얼마나 많은 피를 대가로 흘렸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글을 새겨 넣었습니다. 이 글이 이 그림이 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 날도 수많은 순례자들이 그 앞을 오가고 있지만, “지금 얼마나 많은 피가 대가로 지불되고 있는지, 그게 누구의 피 인지, 누구를 위해서 왜 흘리시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흑인 여자 하나가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고는 감격해서 울고 있었습니다. 가이드가 빨리 가야한다고 이끄는데도 그녀는 상관하지 않고, 수도 없이 땅에 키스를 하면서 “Thank You, Jesus! Jesus, Thank You! 감사해요, 주님! 주님 감사해요.” “정말이었군요. 주님이 날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이 참이었군요. 주님께서 날 위하여, 그 많은 피를 흘려주셨군요. 그 많은 대가를 지불해 주셨군요. 이 못난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주님께서! 이렇게 감격해하며 울고, 오열하며 또 울었습니다.

이 장면을 바라보면서 저는 오늘 본문말씀에 나오는 한 죄 많은 여인 막달라 마리아가 생각이 났습니다. 로마 장교들에게 짓밟혀 넝마 인생이 되어버린 막달라 마리아! 먹고 살기 위해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몸을 팔아야했던 막달라 마리아, 그녀의 인격은 짓밟히고, 그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지고, 영혼은 파탄이 나버렸습니다. 결국 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혀버린 그 가련한 여인이 용서를 받고는 너무나 기뻐서 그 크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해 울고 있습니다. 주님의 발에 입맞춤과 향수 뿌림, 주님의 발을 온통 눈물로 적셨던 막달라 마리아가 생각이 났습니다. 이와 같은 분수에 넘치는 그녀의 헌신은 그보다 앞서 분수에 넘치는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를 감격하게 하고, 우리를 회개시켜 새 사람 되게 하고,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이 은혜의 고향은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은혜의 고향이자, 뿌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붙들고 감격해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 17세기 성공회 시인이었던 허버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신은 제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제게 한 가지만 더 주시옵소서! 감사하는 마음을, 그리고 주님, 나의 인생관이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훈련하는 것이 되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고는, 주님을 향해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나의 마지막 생각이 모두 감사가 되도록 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좌우명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크신 은혜, 그 크신 사랑, 그 십자가의 은혜만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마음에 이렇게 좌우명을 새겨 봅니다. “아무것도 당연한 것으로, 마치 받을 권리라도 있어서 받은 것처럼 생각하지 말도록, 그리고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게 하소서! 그래서 은혜가 너욱 넘치게 하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를 받은 우리는 그 은혜를 더욱 넘치도록 해야 할 책임과 의무, 사명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가슴속에 너무나 강하고 찡하게 도전해 옵니다. “너희가 측량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은혜를 받은 자라면 마땅히 너희의 이웃과 형제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주님의 십자가에 옛 사람을 못박아버리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된 하늘 백성이라면, 이제 더 이상, 너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되지 않느냐? 이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서 살아야만 한다. 이 놀라운 비전과 소명의 불로 싸늘해진 너희들의 가슴에 불이 되어 타오르게 하라. 이것이 곧 너희를 향한 나의 꿈이자 소원이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은혜를 돌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감사하며 사십시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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