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치유자로 오신 메시아
사 40:1-5, 롬 15:1-2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을 공평하신 분, 차별이 없으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차별이 심하신 분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어떤 사람은 부자로,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어떤 사람은 병약하게 태어납니다. 심지어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능력도 천차 만 차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슬람교도로 태어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기독교 가문에 태어나기도 합니다. 이라크 사람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미국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한에 태어나기도 하고 북한에 태어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차별이 극심한 엄연한 현실을 보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에도 하나님의 불공평을 인정하는 말씀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재능이 각기 다르고, 능력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가 주어졌는가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 밖에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금, 은그릇으로 만들어 졌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나무나, 질그릇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렇듯 엄연한 차별이 현실적으로 상존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세상을 만드시고, 묵인하시는 하나님을 두고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차별을 진솔하게 인정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렇게 차별을 두고, 불공평하게 만드셨을까? 그 깊은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거기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운 뜻이 있지를 않겠습니까?
첫째로 이것은 다만 이 세상을 기준으로 한, 겉으로 들어나는 불공평과 차별 일뿐, 결코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나 구원의 불평등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약함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면에서 강한 사람보다 더 큰 영적 축복일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나의 약함이 곧 강함이라.”했습니다. 나의 약함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뇌성마비로 신체장애자가 되어 매일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는 송명희 시인을 보십시오. 그의 시 가운데 ‘나’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찬양이 되어 불러지고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으나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얼마나 은혜롭고 아름다운 시입니까?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기에서 송명희 시인은 자신을 불구로 만드신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소설을 쓴 안요한 목사님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자라 불어 선생으로 여고생들의 스타가 되어있을 때, 갑자기 실명하게 됩니다. 처절한 절망에 빠져 몇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육신의 눈을 빼앗아 가시고, 영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작은 빛을 빼앗아 가시고, 큰 빛을 주셨습니다. 지금 나의 가슴속에는 이전에는 맛볼 수 없었던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차있습니다. 나를 변화시켜주신 하나님, 그 분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뇌성마비로 불구의 몸으로 살고 있는 송명희 시인이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양할 수가 있으며, 30대의 젊은 나이에 맹인이 되어버린 안요한씨가 자기를 불구로 만드신 하나님을 참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가난과 고통, 장애가 반드시 인간을 불행하게 하거나 실패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이 되게도 하고 더 큰 인생의 승리를 가져다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가난과 고통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의 필수조건으로 건강과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건강하다고 해서, 부자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부자도 불행해질 수 있고, 인생을 실패로 끝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어느 대재벌의 막내딸을 보세요. 그 녀는 우리나라에서 57번째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인생을 자살로 마감해야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가난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고, 인생을 승리로 이끈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공평하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불공평과 차별을 통해서 사랑의 바람이 불어오게 하시고, 생명의 강물이 흐르게 하십니다. 성경은 사랑과 생명의 기본원칙 중, 하나를 ‘흐름’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공기의 흐름과 물의 흐름이 생명을 위해 꼭 필요하듯이 사랑의 흐름과 소유의 흐름은 인간의 생명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이 흐름을 위해서는 불공평과 차별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흐름에는 중요한 원칙이 있어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 흐릅니다. 이 흐름의 법칙은 자연에서처럼 사람에게도 정확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법칙입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롬15:1-2)고 말했어요.
하나님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돕고 섬겨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돕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주장하시는 말씀이며,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부터는 이러한 흐름이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야할 것들이 반대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고,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 불어야할 바람이 약한 곳에서 강한 곳으로 불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처음 의도하셨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가만히 있어도 더 큰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제아무리 노력해도 더욱 가난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는 강하고 부한 곳에 정체된 체 아예 더 이상 흐르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약한 자는 절망하게 되고, 부하고 강한 자는 타락하게 됩니다. 결국 흐를 줄 모르는 정체는 부한 자나 가난한 자, 약한 자와 강한 자 모두를 파멸의 길로 이끌어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지배하고, 하나님의 뜻이 펼쳐졌던 세상은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사랑과 소유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렀습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보호하고 돌보았습니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사랑을 받았고, 강하고 부한 자들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는 가난한 자와 부한 자, 강한 자와 약한 자가 함께 공존하는 신앙공동체였습니다. 그 곳에서는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섬겼습니다. 기쁨으로 함께 떡을 떼며, 유무상통 했습니다. 문제는 차별이 아니올시다. 이러한 차별은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어느 시대든지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역풍과 정체입니다. 거꾸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고, 약한 곳에서 강한 곳으로 부는 역풍이 문제입니다. 흐르지 않고 강하고 부유한 곳에 정체되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막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에 오아시스처럼 언젠가부터 매해 계속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성탄을 앞뒤고, 모 일간지에 자폐아들을 먹이고 교육하는 어느 사설 단체가 집세를 못 내고 쫓겨나게 되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40대 주부 한 분이 2000만 원을 들고 와 그들을 도와달라고 했다는 기사였습니다. 기자가 돈을 내놓는 아주머니에게 이름과 주소를 묻자 자기는 심부름 온 것뿐이라며, 끝내 이름과 주소를 밝히지 않고 쪽지 한 장만 남기고 떠났다고 합니다. 그 쪽지에는 이런 내용의 기사가 적혀 있었습니다.
“어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중학교에 다니는 둘째 아이가 신문을 들고 와서 ‘엄마, 우리가 도와야할 사람이 생겼어요.’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이가 들고 온 신문을 보고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이 있는데 둘 다 1,2등을 다투는 수제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아들을 둘씩이나 주신 것은 뽐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돈 가운데 큰아이의 대학입학 준비금을 제외한 모든 돈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 돈으로 밀린 집세도 내고 연탄도 사서 불도 때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은 이 정도의 심부름 밖에 시키지 않으셨지만, 나중에는 더 큰 심부름을 시키실 줄로 믿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고, 그 돈은 자기 돈인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돈은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은 일에 쓰라고 맡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일 년 후에도 그 신문에 어느 고아원 아이들이 스웨터를 입고 활짝 웃는 모습의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사진 아래에는 ‘아줌마, 고마워요’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니 일 년 전 그 아주머니가 일 년 동안 부지런히 뜨개질을 해서 만든 스웨터 20벌을 가지고 와서 고아원에 보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여전히 그 부인은 쪽지 한 장만 남기고 갔는데, 그 쪽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여섯 명의 왕자가 마녀의 저주를 받고 백조가 되자, 여동생 엘리가 6년 동안 쐐기풀로 스웨터를 짜서 그것을 던져주어 마법을 풀리게 했다는 이야기처럼, 나면서부터 몸과 마음이 추운 아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줄 수만 있다면 저는 6년이 아니라, 60년이라도 이 스웨터를 짜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건강하고, 부유하고, 행복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서 강하여지고, 높아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적게 받아서 낮아지고,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보살펴야할 책임과 의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잠언 기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형제를 주신 것은 형제가 위경에 빠지게 될 때 도우라”고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와 형제가 되고, 강한 자가 약한 자와 자매가 되어 더불어 살아가는 공평한 사회를 회복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며, 이러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재능이나 능력을 평등하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필연적으로 부자와 가난한 자, 약한 자와 강한 자가 생길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고,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그래서 생명의 강이 흐르고, 사랑의 바람이 부는 세상을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와서 강하고 부한 자들을 교만하고, 강폭하고, 탐욕스럽게 만들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던 강물을 역류시키고, 미움과 죽음의 바람이 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무너져버린 불공평을 치유해서 다시금 생명의 강이 흐르고, 사랑의 바람이 불도록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선택하셔서 이 일을 하라고, 이 세상에 파송하셨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폐아들의 삶의 자리를 지켜주고, 고아들에게 사랑의 옷을 입혀준 한 무명의 크리스챤 아줌마가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여러분들도 이러한 미담의 주인공이 되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금번 성탄절에는 우리가 이 땅에 사랑의 바람이 불고, 생명의 강물이 흐르도록 하는 일에 앞장섭시다. 북한의 연평도 폭격으로 뜻하지 않은 난민이 생겼습니다. 지금 농민들은 FTA다. 구제역, 조류독감의 위협까지 겹쳐 실의에 빠져 있습니다. 4대강 사업으로 국가 예산을 집중 투입하다보니 복지의 사각지대가 생겼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빈부의 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빈민층이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장로님이 대통령이 되고, 다수의 장관들과 국회의원 재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잘 믿으면 성공하고 부유하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곤경에 처한 형제와 이웃들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는 그들을 도와야할 의무와 책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오. 우리가 어려운 이웃에 대한 책임을 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많은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 큰 은혜가 성탄절을 맞는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2010/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