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말 3:7-12, 마 6:19-21
먼 옛날 어떤 마을에 한 착한 농부가 살았는데,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천장에서 금돈, 은돈이 막 쏟아져 내려오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 마당을 쓸다가 옆집 영감님을 만나게 되어 인사를 하고는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옆집 영감은 아주 욕심쟁이였습니다. 꿈 이야기를 들은 영감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농부를 따라나서기로 했습니다. 횡재를 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후 늦게 농부는 소를 몰고 나가 밭을 갈게 되었는데, 밭 중간쯤에서 쟁기가 뭐에 걸렸는지 앞으로 나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웬일인가 싶어 살펴봤더니 쟁기 날 끝에 웬 항아리 뚜껑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흙을 제치고 항아리 뚜껑을 열었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항아리 속에 금돈, 은돈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꿈속에서는 돈이 천장에서 떨어졌는데, 이것은 땅 속에 묻혀 있으니 내 것이 아니다’ 생각하고는 도로 묻어버렸습니다. 농부가 밭을 다 갈고 집으로 돌아간 뒤, 몰래 숨어 보고 있던 영감이 얼른 밭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농부가 항아리 뚜껑을 덮은 자리를 손으로 막 팠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항아리 뚜껑을 열었는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항아리 속에는 소똥, 개똥 말똥이 가득 들어 있는 거예요. 화가 난 영감은 항아리를 캐 낑낑 어깨에 메고는 농부내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지붕을 뚫고 오물을 쏟아 부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농부가 일찍 자려고 자리에 누워 있다 보니 천장에서 뭐가 막 쏟아지는데 금돈, 은돈이었습니다. 그제야 농부는 ‘이건 어젯밤 꿈대로 천장에서 떨어지니 내 것이 틀림없구나!’ 생각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한 랍비가 마을길을 황급히 걸으며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나귀를 잃어버렸어요. 누구든지 내 나귀를 찾아주면 보답으로 그 나귀를 선물로 주겠습니다.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쇼. 그러면 찾을 필요도 없지를 않소!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서 잃어버린 나귀를 찾으면, 나는 두 가지 기쁨을 동시에 맞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나귀를 찾았으니 그래서 기쁘고, 귀한 나귀를 누군가에게 줄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쁘고, 신명나는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통해야 이런 기쁨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소유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우리는 소유하면 돈을 생각합니다. 세상에 돈만큼 소중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돈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닙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돈에 대한 바른 이해와 철학 없이 이생을 살기 때문에 돈이 많아도 재앙이 되고, 돈이 적어도 불행해 집니다. 교회가 물질을 복이라고 가르치며, 예수를 잘 믿으면 물질의 축복을 받는다고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예수를 잘 믿어도 가난해질 수가 있고, 예수를 안 믿어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돈이 곧 복은 아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돈이 많은 사람을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하고, 돈이 없는 사람을 못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 중에도 잘못 사는 사람이 있고, 가난하게 살지만 정말 인간답게 잘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저를 친아들과 친딸처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8:36)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사람이란 가난하든 부하든, 많이 배웠던 못 배웠던, 세상적인 지위가 높던 낮던 모두 천하보다 크고 귀한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기독교만이 가지는 아주 중요한 인간 이해올시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삶의 비밀이 들어 있어요. 인간은 천하보다 크고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 세상의 것으로는 만족함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행복하다는 말은 만족한다는 말인데, 우리가 온 천하를 다 얻어 내 마음의 잔에 다 붓는다 해도 그것으로는 절대로 내 마음의 잔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물질에서 만족을 찾으려는 자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다윗이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고 고백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물질이나 권력이 가져다준 복이 아니었습니다. 그 같은 복은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잔을 채워주실 수 있지, 그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내 잔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돈이나 지식 권력이나 명예가 내 잔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부귀와 영화가 얼마나 헛되었으면, 솔로몬 왕의 입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다는 말을 무려 한 센텐스에서 7번이나 반복했겠습니까?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가장 전성기를 구가했던 왕이 아닙니까? 인류 역사상 최상의 지혜와 권력, 금 은 보화를 한 손에 걸머쥐고 살았던 솔로몬 왕이었지만, 그는 “그것들이 자신의 좁은 가슴 하나 채워주지도 못하고, 만족케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제 후배 중에 시골 어려운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서울에 큰 교회에 부임해서 목회 하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성탄절이 가까이 오자 교인들이 보내온 과일이며, 케이크가 하나 둘 쌓이게 되더랍니다. 그런데 하루는 저녁에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걱정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더래요. “집에 먹을 것이 많다보니 아이들이 먹을 것을 귀한 줄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몰라요. 어느 권사님 한 분이 케이크를 들고 오셨는데 아이들이 고마워하는 것 같지를 않아요. 정말 큰 일이예요.” 사람이 많이 가지게 되면 귀한 것이 흔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귀한 줄을 모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자가 만족해하고, 행복해 할 것 같지요. 사실은 그와 정반일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부자는 좋은 것, 감사할 것이 많지 않습니다. 돈이 많으면, 돈이 귀하지 않고, 먹을 것이 귀하지 않고, 그러다보면 사람까지도 하찮게 보이는 경우가 생겨요.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 부자 청년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돈 때문에 망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들은 돈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제명대로 살지도 못했어요. 어디 돈 때문에 망한 사람이 그들뿐이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어요. 돈이 천국 문을 바늘구멍으로 만들어 놓는 거예요. 그런데도 돈이 좋습니까? 그런 돈을 어떻게 복이라 말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재앙이올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좋은 것이 더 많고, 하찮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압니다. 고생하며 자녀를 키워야 그 자식들이 부모님 은혜를 더 잘 압니다. 그러나 넉넉해서 흥청망청 아이를 키우면 그런 집 자녀들은 부모님 은혜를 모르기가 쉽습니다. 돈이 우리를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은 우리를 구원할 수도, 축복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돈 정도로 채워질 수 있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야요. 그러기에 우리는 돈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부자가 되는 것 자체가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돈은 선도, 악도 아닙니다. 돈은 복도 아니고 화도 아닙니다. 돈은 그저 돈 일 뿐입니다. 정직하게 벌고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쓰면 돈은 선이 되고,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하게 벌고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도 않는다면, 그 돈은 재앙이 되고, 저주가 될 것입니다. 돈이 복이 되고 저주가 되는 것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달린 것이지, 돈 자체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돈은 선한 사람이 쓰면 선한 것이 되지만은, 악한 사람이 쓰면 악한 것이 되고 맙니다.
진정한 사람의 행복과 성공은 값비싼 물건을 소유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가 가치 있게 될 때, 얻어지는 선물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되어 소유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잘 믿으면 반드시 그의 존재 가치가 높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가치를 높이려고 존재가치를 팔거나 떨어트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생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바보입니다. 한번은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예수님은 “너는 가서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 (마19:16)고 하셨습니다. 소유가치를 팔아서 존재가치를 사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은 소유가치에 따라 인생을 살지 말고, 존재가치에 따라서 인생을 살으라.”는 말씀이올시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소유에 두고 사는 사람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바로 쓰는 것이며, 우리들의 존재 가치를 높이는 것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을 많이 받아 부자가 된 사람은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물질의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는 것은 복으로 누리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고통을 당하며,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 가는 불쌍한 이웃들을 살려내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쓴다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불의한 청지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물질생활을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 지 아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물질을 하늘에 쌓아둘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두 가지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하나는 십일조헌금을 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모든 소득의 십일조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받쳐, 말씀을 선포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일을 창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믿음과 공의, 진리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자비와 사랑이 샘솟게 하고, 여호와의 구원을 보게 하며, 기쁨과 위로, 평화가 가득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까지 내 것이라고 욕심을 부리고 탐욕스럽게 이 세상의 일을 위해 다 써버린다면, 우리는 스스로 하늘나라 백성임을 포기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아 두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들까지 주시고, 예수님은 생명까지 주셨는데, 우리는 물질의 십일조도 바칠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십일조 헌금을 해서 내가 너를 축복하는지 않는지 한번 시험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황충이 먹는 것을 막아주고 기한 전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보화를 쌓아 둘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매달 “30일 중 하루의 소득은 구제하는데 쓰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언제나 돈 버는 은사가 없어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에서 낙오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십일조헌금을 하나님께 드리고 구제하는 일에 힘쓰는 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높이고, 이 땅에서 창대하게 되는 비결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너희를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일조헌금을 드리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연말이 되면 생각나는 분이 계십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수녀님입니다. 이 분들은 20대 꽃다운 나이에 고국인 오스트리아에서 1960년대 전후에 우리나라 외딴 섬 소록도에 오셨습니다. 그들은 일생을 바쳐 장갑도 끼지 않고, 나병환자의 상처를 어루만져 치료해 주었습니다.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까지 해주었습니다. 환자 자녀를 위한 영아원 운영사업에도 발을 벗고 나섰습니다.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이들의 평생에 걸친 봉사는 이기심과 다툼으로 얼룩진 현대인들에게 벅찬 감격과 종교의 참 뜻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40년을 봉사하고 고국 오스트리아로 떠나는 70대 두 수녀는 쪽지 하나만 남겨두고 훌쩍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너무 늙어서 오히려 부담이 될 것 같고, 또 헤어지는 아픔을 줄 수가 없어 말없이 떠난다.” 두 분이 떠나간 후에 소록도 주민 환자들은 열흘이 넘게 두 수녀님을 위한 기도회를 갖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들의 삶이야말로 하늘에 쌓아 둔 보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가오는 2011년도는 우리의 존재가 더욱 가치 있게 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창성하게 되는 일을 힘써 합시다. 구제하는 일과 십일조헌금을 드리는 일만은 노치지 말고, 꼭 실천합시다. 이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