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령의 첫 열매, 사랑
호 11:8-11, 갈 5:22-26
고린도교인들은 많은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일보다 육적인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은사를 사모했지만, 그 은사라는 것이 방언과 웅변, 지식과 예언하는 일, 기적을 바라는 기복신앙, 과 자기자랑, 출세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구제활동에만 열심을 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바른 신앙 위에 서 있지를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의 결핍이 문제였습니다. 파당이 생기고 분쟁이 그치지 않는 시끄러운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바울 사도는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사모하라는 더욱 큰 은사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이었습니다. 성서의 모든 말씀의 주제는 믿음 소망 사랑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믿음도 소망도, 귀하고 항상 필요한 것이지만, 사랑이 근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믿음을 태워서 더욱 순수하고 강하게 만드는 불이며, 희망을 불러내는 빛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했다는 말은, 사랑이 인간을 만들어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부모의 에로스 사랑에 의해서 출생해서, 스토르게 가족 사랑으로 양육되며, 친구와의 끈끈한 관계 속에서 필레아 사랑으로 성숙해가며, 아카페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성되어 집니다. 머지않아 우리의 시력은 어두워질 것입니다. 우리의 청각은 희미해져 갈 것입니다. 우리의 체온도 싸늘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며, 우리의 몸은 죽을 것이나 그 사랑 속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모양으로 나타납니까? 저는 최근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새롭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 열심히 하고, 설교를 잘 듣는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잘하는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하실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결과적으로 그 누구보다도 김승태 집사님을 사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김승태 집사님이 신앙생활을 잘해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김승태 집사는 교회에 열심히 다닌 것도 아닙니다. 저와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런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 교회 교인이었다는 것과 신장이식을 받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 사랑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한 시도 살 수가 없어요. 마치 태양 없이는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특별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침묵이라는 소설을 써서 세계적인 작가가 된 일본의 카톨릭 신자 엔도 슈사끄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가 쓴 침묵이라는 소설을 보면 일본에서 기독교인에게 무서운 박해가 시작됩니다. 포르투칼 선교사 ‘훼데’라는 극심한 박해를 견디다 못해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이 새겨진 성화판을 더러운 발로 밟는 배교를 하게 됩니다. 그 소문이 삽시간에 온 구라파에 퍼졌습니다. 그를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습니다. 그 중 제일 실망한 사람은 그의 제자였던 젊은 신부 로도리꼬였습니다. 로도리꼬는 선생님의 불명예를 씻어보겠다는 각오로 일본에 선교사로 자원하게 됩니다.
산 속에 숨어서 신도들과 비밀리 접촉하면서 선교 활동을 하던 로도리꼬 신부는 결국 관원에 의해 체포됩니다. 이 젊은 신부는 감옥에서 순번대로 피 흘리며 죽어가는 무고한 신도들의 순교 장면을 지켜보면서 참아 견디어 낼 수가 없어서 “하나님, 왜 당신은 침묵만 하고 계십니까?” 하늘을 향해서 울부짖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가장 사랑하던 젊은이가 극심한 고문을 받으며 비명소리와 함께 죽어가는 것을 본 로도리꼬 신부는 “하나님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소. 이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소? 이 신음 소리가 언제까지나 침묵만 하고 계실건가를 고발하지 않습니까?”하고 소리칩니다.
이 젊은 신부는 “사랑과 선, 정의의 하나님께서 분명히 계시다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은 입을 열어서 무엇인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드디어 이 젊은 신부의 차례가 왔습니다. 극심한 고문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로도리꼬 신부는, 자신이 평생 가장 아름답고, 신성하다고 믿어왔던 분, 무수한 인간들의 이상과 꿈이 되어주셨던 분,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성화 판에 자신의 더러운 발을 올려놓으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무서운 공포에 질려 파르르 떨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무거운 침묵을 깨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랑하는 종아, 밟거라. 밟아도 좋다. 밟아도 좋아, 네 발의 아픔을 나는 안다. 나는 너에게 밟히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단다. 네 아픔을 나누기 위해서 십자가를 진 거야” “사제가 성화 판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은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배교자, 사제를 향해 부드러운 음성으로 밟아라. 밟아도 좋다.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으니, 소자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 성화 판 속에 나타난 예수님은 저 하늘 높은 심판대 위에서 당신을 따르는데 실패한 사람들을 모두 적발해서 질책이나 하시고 심판이나 하시는 초월적이고 냉혹한 신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십니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처럼, 집나간 탕자처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저 살인강도처럼, 창녀로 몸을 팔다가 일곱 귀신 집힌 막달라 마리아처럼, 실패한 인생들의 고난과 아픔을 함께 해주시는 분, 그 하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허물 많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올시다.” 믿으십니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부르면 부를수록 더 멀리 가버리고 결굴 바알에게 무릎 꿇었던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차마 멸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이 긍휼로 타올랐습니다.
파스칼은 고난 받는 예수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지금 뿐만 아니라,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시는 영원한 사랑의 동반자, 끝없이 우리 소자들을 무한한 사랑으로 감싸 앉아주시는 거룩한 사랑의 어머니”로 묘사했습니다. 지금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전능과 기적이 아니라, 자비와 죽음으로 세상을 이기었노라. 작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 만일 네가 너 자신을 고난에 빠트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만 있다면, 너는 사랑이 세상을 이기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주님처럼 사랑하는 인생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만나야 합니다. 십자가에 당신의 아들을 매달아 죽게 한 것이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해요.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사랑으로 오늘도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껴야합니다. 지금도 이 하나님의 사랑은 한 여름 정오의 햇살같이 나를 향하여 비추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가슴이 채워질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사랑이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만 사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안 믿는 사람도 원수도, 배교자까지도 사랑해요. 문제는 “내가 그 사랑을 받아드릴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일광욕을 원하는 사람은 에어콘이 켜져 있는 빌딩 밖으로 나와야합니다. 바닷가 해수욕장으로 나오면 더욱 좋습니다. 그리고 옷을 벗어야 해요. 알몸이면 더욱 좋습니다. 두 팔을 벌리고 태양을 향해 서 있으면 삽시간에 우리 몸은 태양의 열기로 온 몸이 후끈 달아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발광체입니다. 인간은 달과 같이 반사체에 불과해요.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려야 해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를 향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내 마음에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어야 나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지 않고는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내 주인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인류는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까닭에 물질이 현대인들의 생명을 자신의 손 안에 틀어쥐고 있습니다. 지금 인류는 물질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해 주고, 소유가 존재를 가능케 해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소유의 노획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언제나 내가 사랑하는 그것이 나의 주인이 되어 나를 지배합니다.
현대인들은 물질을 사랑하다가 물질의 종이 되어 버렸어요.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이 소유의 포로에서 탈출할 수 있겠습니까? 물질이 내 생명의 주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 소유가 나에게 삶과 힘과 의미와 행복을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몸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물질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하나님이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이 조종한다는 증거입니다. 이 탐욕은 육신의 소욕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 육신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그 일을 가능하게 해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6)”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2-24)”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육신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성령의 소욕에 따라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합니다. 그 성령의 열매의 첫째가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우리가 먼저 사랑의 열매를 맺고 더 노력해서 두 번째 열매인 희락의 열매를 맺고 그런 것이 아니올시다. 성령의 첫 열매가 맺히기만 하면 나머지 열매들은 따라서 열리게 됩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사랑의 열매만 맺게 되면 그 사랑의 열매가 희락의 열매도 화평의 열매도 끌고 옵니다. 그러기에 사랑의 열매가 귀합니다. 또 하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사랑의 열매란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내 재능으로 맺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닙니다. 내 육체로는 불가능합니다. 내 육체는 성령의 열매가 맺는데 최대의 장애물이올시다. 그러기에 내가 죽어야 성령이 임하게 되고 오직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사랑의 열매가 맺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내가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절망의 벽에 수도 없이 부딪히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먼저 나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끗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져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통회 자복 하십시오. 회개하면, 우리는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외침이 들려오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온 집이여, 확실히 알지어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그들이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고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를 선물을 받으리라.( 행2:36-3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십시오.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희락과 화평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믿습니까? 2011년은 사랑과 희락, 화평의 사람으로 사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