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시온아, 힘을 내라
습3:14-17, 눅15:21-24
2,30대와 40대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금번 서울 시장 투표를 보면 20대와 40대는 여당후보가 범야권 후보의 절반도 얻지를 못했습니다. 특히 30대는 1/3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현 정부에 얼마나 실망이 컸으면 이런 현상이 나타났겠습니까? 4년 전 노무현정부에 실망했던 국민들은 기적과 신화의 주인공 이명박 대통령에게 몰표를 주어 새 정부를 출발시켰습니다. 틀림없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 우리도 10년 안에 4만$ 경제선진국 건설의 꿈에 설레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급기야는 실망과 분노로 변했습니다.
그동안 대외여건도 이명박 정부에 무거운 짐이 되어왔습니다. 출발과 함께 국제 금융대란이 발생했고, 국제원자재 값이 폭등하고 살인적인 고유가 행진, 조류인플루엔자에 구제역, 미국과 일본, EU 등 선진국들이 불경기의 깊은 늪에 빠져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미국이 기침만 해도 열병을 알아야 할 정도로 대외여건에 취약한 우리 경기가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감당해 내기 힘든 비싼 등록금과 취업난, 계속 치솟는 전세난, 감당하기 힘든 유아양육 비 등 젊은이들이 살아가기가 너무나 힘든 세상이 되었어요. 크게 낙담하고 있는 이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바울은 서바나 지금의 스페인을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포르투칼의 수도입니다만, 당시 리스본 항구가 끝나는 곳, 큰 바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제는 끝입니다.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1492년 한 사나이가 이 항구에서 자그마한 배에 오르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바위에 새겨진 글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이 너머에는 위대한 희망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사나이가 바로 크리스토퍼 콜롬버스( Christopher Columbus)였습니다. 15세기 말 유럽 남부는 두 차례에 걸친 커다란 지진을 꺾었고 콜레라와 페스트가 휩쓸고 갔습니다. 이 때 유럽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절망을 거부하고 희망의 돛을 올린 사람이 바로 콜롬버스였습니다. 그는 신대륙을 발견해서 유럽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축 늘어진 남부 유럽 사람들에게 희망과 활력을 주었습니다.
B.C. 626년 유다는 나이 어린 요시아 왕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므낫세와 아버지 아몬이 나라를 망쳐 놓은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땅에 떨어졌고, 종교는 불이 꺼져 버렸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몬이 암살당하고 나이 어린 요시아가 왕이 됩니다. 바로 이 때였습니다. 선지자 스바냐가 나타나 외칩니다.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힘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위기와 극난한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힘을 내게 하는 것입니까?
첫째는 “너희의 죄와 허물을 용서받았으니 힘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 스바냐는 말합니다. “여호와가 너희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희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왜 위축됩니까? 왜 기가 죽는 것입니까? 내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끼기 때문에,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내가 당당하지 못할 때, 기가 죽기 마련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허랑방탕하여 그 많은 유산을 모두 탕진해버렸습니다. 두 어깨가 축 늘어져 돌아옵니다. 와서 말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저를 품꾼의 하나로 써주소서!”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용서해 줄뿐만 아니라 “손에 가락지를 끼워라.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려라. 내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권리를 완전히 복권시켜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이요,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의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노라. 너는 이제 의롭다함을 얻었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노라.” 이것을 믿습니까?
둘째는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그러니 “힘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 스바냐는 말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라” 우리들의 하나님 야훼는 우리 중에 계셔서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역경과 시련에서 우리를 능히 구원해 주실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위축당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의기소침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고 임마누엘을 믿고 고백하면서 그렇게도 두려워하고 위축당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실존적 무신론자들이 너무나 많아요.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믿어요. 그런데 막상 곤경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처럼 되어 버립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저 말뿐입니다. 사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살아요.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 부르고, 기도도 하면서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실존적 무신론자들, 이들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라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향해 선지자 스바냐는 말합니다.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신다. 낙심하지 말고 힘을 내라.”고 말합니다.
유명한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다가 너무 힘이 들자, 기진맥진하게 됩니다. 혼자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한 손에 틀어쥐고 천하를 호령하는 교황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깨트리겠다고 덤벼드는 것만큼이나 무모하고 힘에 겨운 일이었습니다. 결국 루터는 종교개혁을 중단하기로 하고 실망한 나머지 병상에 눕게 됩니다. 겨우 몸을 추수려 집무실에 나와 앉아 있는데, 아내가 상복을 입고 들어옵니다. 깜짝 놀란 루터는 “아니 여보, 당신 집에 무슨 일이 생겼소. 갑자기 상복은 웬 일이오.” 그러자 아내가 침통한 어조로 ‘예,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누가 돌아가셨단 말이요. 하나님이요’ ‘아니 여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아니 하셨다면 어찌 당신이 이다지도 의기소침할 수가 있단 말이요. 아무래도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게 틀림없구려!’
루터는 이 때, 아내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루터의 아내 사랑은 남달랐다고 해요. 그의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아내 카타리아를 사랑한다. 만일 그녀가 죽어야할 일이 생긴다면 차라리 내가 기꺼이 죽을 것이다.” 우리는 제자들에게 주셨던 주님의 말씀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너희를 결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내 영혼이 의기소침 해질 때, 내가 말할 수 없는 고독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모든 것을 내팽개쳐 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내가 너희를 결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 너희 부모는 너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너를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는 말씀 말입니다.
우리 한번 따라서 해볼까요. ‘사랑의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선지자 스바냐는 기가 죽어 있던 유대 백성들, 낙담하고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한 하나님이시라. 그가 너희와 함께 하신다”고 외쳤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벧느고를 향해서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만일 너희가 내가 만든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는 날에는 7배나 뜨거운 풀무 불 속에 집어넣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 때 이들이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에게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나를 둘러쌓고 있는 모든 위협에서부터 나를 건지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을 여러분들은 믿으십니까?
세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 “너희는 힘을 내라” 하십니다. 선지자 스바냐는 오늘 본문말씀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도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나를 잠잠히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실 때, 나 때문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신다.”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어떻든 가요? 사람들은 사랑을 받게 되면 얼굴이 달덩이처럼 활짝 피어납니다. 저는 우리 청년들 얼굴만 보아도 누가 지금 연애를 하고 있는지, 실연을 당했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랑을 받게 되면 장미꽃처럼 아름다워집니다. 그러나 사랑을 빼앗기게 되면, 혼이 나가버린 유령처럼 창백해져요. 사랑하는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애정, 그의 강렬한 사랑이 나를 향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여름 정오의 햇살처럼 강렬하게 내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데 내가 어찌 의기소침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가슴이 설레고 심장이 뛰고, 온몸이 달아오르면서 새 힘이 솟구치지를 않습니까? 사랑을 하면은 예뻐집니다. 사랑을 하면은 꽃이 핍니다. 희망이 생겨요. 사랑은 지옥 같은 환경 속에서도 천국을 경험하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제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데도 가슴이 설레지 않습니까?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흐릿한 눈동자가 총명한 빛을 발하지 않는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거예요.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거예요. 참으로 사랑이란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인줄 모르고 깨닫지도 느끼지도 못한다면, 감사할 수도 없다면 그 사랑은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사는 자식일수록 오히려 그것이 사랑인줄도 모르고 불효자식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하숙방은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 궁전보다도 더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속삭임은 어느 음악소리 보다도 감미롭고, 더 감동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다툼까지도 어느 예술제, 어느 연극제보다도 더 황홀합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 우리 목사님도 사랑을 아시나요. 사모님은 무슨 재미로 살까?’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런지 몰라요. 아닙니다. 저는 ‘여보, 어느 영화 장면이 아름답고 재미있다한들 우리의 사랑보다 더 아름다울 수가 있단 말이요.’ 이런 사랑의 밀어를 쉼 없이 나누면서 살고 있어요. 우리 집 사람은 깨가 쏟아집니다. 제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사랑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어요. 지금 선지자 스바냐는 절망하는 유대 백성들, 희망을 잃어버린 백성들, 두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절망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시온아, 힘을 내라.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니라. 너를 생각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는 하나님, 너를 잠잠히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이 IMF 때보다도 더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하는 일마다 되지 않을 때, 희망의 출구까지 막혀버리고 하루가 절망으로 다가올 때,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럽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 수가 줄고 있어요. 더욱 큰 고통은 오늘의 한국교회가 절망하는 이 백성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를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바냐를 통해서 주신 이 희망의 메시지가 있지를 않습니까? 이 말씀을 굳게 붙드십시오. 그리고 힘을 내세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고난의 현장에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로 언제나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며 잠잠히 사랑해 주시지를 않습니까? 힘을 냅시다. 낙심한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