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마태복음 6: 14- 15
_?xml_: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이기영 (전남노회 원로목사) 에베소서 2: 1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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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을 의미하는 영어의 Liberation은 자유 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억압과 구속이 있을 때 그 억압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해방이고 자유입니다. 우리는 ‘해방’하면 8.15 해방, 일제 36년간의 억압과 속박이 1945년 8월 15일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로 일시에 주어진 뜻 깊은 감격, 기쁨을 민족적으로 경험한 해방입니다. 이는 진실로 성서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사건만큼이나 의미 깊은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해방과 자유의 그 기쁨과 감격은 잠시요, 더 비참한 남북분단의 비극이 뒤를 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67년이 지나는 동안, 세계 모든 이데올로기로 인한 분단국가들이 통일, 화해,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유독 한반도에서만 동족상쟁의 6.25 전쟁을 치루었고, 군사독재자들로 인해 민주화 실현에 많은 세월을 보내야 했고, 평화를 찾는 데는 멀어져만 갔습니다. 이후 남북 정상의 만남으로 화해분위기가 이루어지는가 했지만, 국제정세는 한반도 통일을 어렵게 만들고, 남북간의 정세도 평화준비는 되지 않은 상태로 극한의 힘 다루기로 나아가는 상황입니다. 북쪽은 중국에 밀착해 가고 있고, 남한은 미국 주도하에 남북관계 질서에 따르고 있습니다.
산상수훈(마 6장)에서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하는 제자들의 요청에 주기도문을 가르치던 예수는 하나님과 우리를 위해 가장 중요한 몇 가지를 기도 제목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데 있어 매일 필요한 양식 다음으로 용서를 가르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매일의 양식 없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동시에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피차 용서 없이는 이 사회 그 어떤 공동체도 존재할 수 없다는 원칙을 가르칩니다. 가장 작은 단위인 부부나 가족에서부터 신앙공동체인 교회까지 용서 없이는 결코 평화가 있을 수 없고 그 보존이나 발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약점과 실수를 범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는 누구보다 이런 인간의 본질과 진상을 바로 알았기에 용서를 사회나 교회 공동체의 기본 원리로 삼았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이렇게 용서를 강조하고도 부족하여 예수는 하나님의 용서에 단서를 붙이며 인간이 이 땅에서 함께 평화롭게 사는 원리로서 우리 인간의 용서가 필수적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 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영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 14- 15). 용서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내게 잘못한 그 누구의 허물도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용서의 중요성을 위해 예수는 아주 엄하게 경고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과오를 용서치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용서를 거절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죄 사함을 간구할 때마다, 우리가 자문할 일은 “나도 내게 잘못한 그 누구라도 용서했는가?”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용서에 대해 예수께 의논하면서 내 형제의 잘못에 대해 몇 번까지 용서할까 묻습니다. “7번까지면 될까요” 라며 묻습니다 (마18:21). 유대인의 법도를 잘 아는 베드로이기에, 이웃의 용서는 세 번이면 된다는 랍비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사실 그는 예수에게 상당한 칭찬을 기대하며 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예수는 “7번만이 아니라 7번을 70번까지라도 해야 한다”(마 18:23)고 했습니다. 이는 결코 용서에는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참으로 뉘우치거든 언제나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내 형제 자매나 교우, 그 어느 종교나 종족의 그 누구라도 아직도 용서 못하고 마음속으로는 미워하는 자가 있습니까? 여전히 그 누가 원망스럽고 섭섭하며 소원한 자는 없는지 우리는 지금 깊이 자문해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의 소중함을 가르치던 예수는 제단에 봉헌할 때에라도 형제 자매에게 아직도 거리낌이 있다면, 그 헌물을 거기 둔 채 먼저 되돌아가 그와 화해하고 다시 오라고까지 가르쳤습니다. 함께 여행하듯 가는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화해할 길이 없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 부끄러울까 두려워서 라고 했습니다.
펜롭(Penelope J. Stokes)은 ‘엑스해일을 기다리며’(Waiting to Exhale)라는 영화의 한 장면에 대해 언급합니다. 남편의 불륜에 희생된 한 여인이 분을 참지 못해 그의 옷, 신, 벽장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비싼 그의 벤츠 차에 쳐 넣고 불 지르면서 그녀의 결혼이 불타고 있는 증거로 여기며 눈물 짓는 장면입니다. 많은 관객들은 박수 치며 기뻐 했습니다. 그러나 펜롭은 함께 울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 깊숙히 잠긴 분노의 노출이 한풀이는 될지 모르나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치유를 향한 동작이란 분통을 터트리는 것을 넘어 그녀가 어떻게 용서할까를 배워야 합니다. 치유는 분노와 성냄, 미움이나 격리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의 길에서만 가능합니다.
1백세 이상을 산 노인들의 삶을 연구한 심리학자 브리클리 박사(Dr. Michael Brickley)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감정적 찌꺼기’(emotional baggage)를 잘 털어 버린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도 과거의 슬픔, 배신, 상처, 완성하지 못한 일, 해결 안된 관계나 후회스러운 일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 같이 건강하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전 찌꺼기들을 깨끗이 털어버렸습니다. 주어진 오늘의 하루하루를 기쁘고 즐겁게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백세까지 사는 장수의 비결은 몸 관리를 잘하며 운동을 열심히 하는 자들이기 보다는 저들의 마음과 심혼을 더 잘 지키고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배우며 고백해야 할 비밀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누구나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 되는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 되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세상엔 저들 자신의 분노, 상처, 과거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무능 때문에 과거의 노예로 잡혀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누구도 과거, 나의 어린 시절의 불행이나 분노, 그 밖의 여러 주변인들의 상처, 실망스런 언동 때문에 아직도 거기서 해방되지 못한 불행은 없기를 바랍니다. 평화와 화해의 첫 단계입니다.
용서와 화해의 결정적인 것은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는 거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정치인 군병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던 순간, 십자가 위에서 남겼다는 예수의 마지막 7 마디의 첫째 말씀, “하나님이여, 저들을 용서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유대 종교인이든, 로마 정치가나 군인이든, 저들은 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기에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며 침 뱉고 주먹질하던 저들을 용서해 달라며 측은히 여기던 예수, 그 십자가의 현장과 목소리를 듣고 깨닫는 자라면, 이 세상 그 누구든 용서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억울하고 분할지라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고 그의 음성을 듣고 생각하게 될 때면, 오히려 송구하고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분노보다는 용서와 화해, 차라리 감사함으로 변하는 위력은 다 예수의 십자가의 숨겨진 비밀 때문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의 한 생에서 이런 용서나 화해는 몇 번이고 체험되는 사건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용서의 극치요 모든 평화와 화해는 이 십자가에 달려 있고 또한 용서의 힘도 거기서 나옵니다.
여순 반란 사건 때 손양원 목사는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이고 체포된 빨치산 청년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인간 세상의 법으로나 윤리, 도덕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나,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이런 용서와 사랑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이런 진리는 예수의 때나 오늘이나 동일한 위력을 가집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참 용서와 구원의 사랑을 체험한 자들만이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용서와 사랑을 원수들에게까지 베풀고 있습니다.
미국의 민권운동가 루터 킹이 흑인들을 향해 백인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의 하나님의 사죄의 사랑을 체험하며 한 말입니다. 흑인이 백인을 미워한다면 백인들의 흑인 증오를 탓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시에 백인들에게 흑인 민권운동은 결코 흑인만 위한 것이 아니라 백인의 자유를 위해서라며 누구를 미워하는 동안 그 죄의 포로가 되기에 참된 해방을 위해 백인들은 흑인 차별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우리 한민족이 걸어온 지난날들과 한반도의 분단도, 용서와 화해가 그 과거를 변경할 수는 없으나 오늘의 통일과 한민족의 앞날을 전혀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민족에게 있어서 해 볼만한 가장 위대한 일이 한가지 있다고 확신합니다.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하여 먼저 우리의 ‘권력을 사심 없이 화해의 도구로 사용하는 결단’입니다. 여기에는 실로 화해의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남과 북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는 믿음으로 나올 때 그와 같은 용기가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죽으려 할 때 살고, 이기적으로 살려 할 때 죽는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용기를 지닌 사람은 살아 남는 이 진리를 터득할 것입니다. 이러한 용기, 용서와 화해의 진리를 실현하려는 민족적인 각성과 실천운동에서 하나의 새 민족으로의 역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아직까지 분단의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해방 후 67년, 통일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성숙되어야 하는데 아직 불신과 증오를 굳히고 있습니다. 오늘의 세계에서는 남한도 북한도 세계화에 동참해야 합니다. 따라서 남북한은 내부에서부터 서로 증오를 키우는 일을 중단하고 남북한이 공조해야 합니다. 긴요한 일은 민주주의와 개방체제의 육성을 위해 상상의 진리를 적용해야 합니다. 누가 상생의 길을 열겠습니까? 한반도의 주변 강대국들이 상생의 길을 열겠습니까? 이해관계에 복잡하게 얽힌 주변의 나라들에 의존하기 보다는 우리 한민족 남북 당사자들의 몫입니다. 동북 아시아의 평화를 실현할 주도적인 민족은 우리 한민족임을 먼저 자각을 해야 합니다. 상생의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실천하려는 우리 민족끼리, 남북이 상호간에 공조를 하며 평화통일의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통일이라는 정말, 죄악의 분단으로부터 해방, 자유 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민족 내부의 이 모든 분열을 타게 함에는 모든 민간들로부터 교회와 사회 각 계층, 특히 권력을 화해의 도구로 전환해 사용하는 지도자들의 지도력을 용기 있게 발휘할 때 평화통일, 자유해방을 맞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는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요” 그는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로” 만드신 분입니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교회는 지난 67년 동안 자신의 몸을 바쳐 동족간의 원수 된 골을 화해시켜 하나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단을 더 조장하고 견고하게 했다는 솔직한 죄책고백을 함이 옳을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의 과오를 회개하고 반성하며 변화하여 그리스도가 보여준 화해와 통일, 하나 되게 하는 화합의 정신을 철저히 따라야 합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데올로기로 인한 분단상태인 한국 땅의 교회들은 세계 제일의 교세나 선교사 파송의 제일 국으로만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신앙의 핵심인 예수의 자기 희생과 화해의 정신을 본받아 분단 한반도의 통일과 하나되는 새 민족으로 평화를 가져오는 과제를 최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교회의 세속화 속에서 성장신화에 사로잡혀 있거나, 물량 증대에나 관심을 갖고 그 속에서 안주하며 스스로의 자족과 평안만을 누린다면, 이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이겠고, 두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소행이 될 것입니다.
빵 없이 인간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용서 없이는 함께 살 수 없는 이 땅에서 그 어떤 공동체나 사회와 나라, 세계는 공존 공생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용서와 화해 정신의 실천이 온 세계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8월 해방의 절기를 민족평화통일의 달로, 한국 교회는 남북 분단 한반도를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 모든 원수를 화해시키며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한반도 평화통일에 정신적, 물질적인 공헌이 뚜렷하게 할 때에 비로소 선교의 새 시대가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