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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아픔에 공감하십시오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13-07-05 (금) 15:38 11년전 2936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십시오
 
오바댜 1:10-14
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11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13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14 네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원수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
 
 
오바댜서는 21절로 이뤄진 소책자입니다.
그러나 거대한 영감이 흐르는 매우 아름다운 신탁과 희망의 메시지로 구성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작시기는 10절의 내용에 비춰보면,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함락된 해인 B.C.587년 조금 이후에 저술된 것으로 보입니다.
오바댜는 주님의 종이라는 뜻이며, 오바댜서의 근본적인 메시지는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은 당신의 날을 선포하시고, 역사에 개입하셔서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에서의 후손 에돔족속의 죄악상입니다.
에서는 이삭의 아들로 야곱과 형제지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팥죽 한 그릇으로 증자권을 판 뒤에 야곱과 갈등관계였으며, 다시 화해하기도 했지만, 결국, 에서는 에돔족속을 이뤘고 야곱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에돔은 이스라엘과 형제지간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함락되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그들은 흐뭇해하며, 신이 나서 예루살렘을 약탈하는 일에 동참합니다. 12절 말씀에 너는 네 아우의 날을 흐믓하게 바라보지 말았어야 했다(주석성경).”는 말씀대로, 그들은 도와주지 못했을지언정, 최소한 이스라엘의 함락을 마음 아파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형제간의 배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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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가정의 달 특집으로, ‘그 섬에는 아이들이 산다KBS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최근 TV 다시보기를 통해 그 내용을 보았습니다. 제목처럼, 낭만적인 제목이 아니라 도시건 시골이건 방치된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조악한 상황 속에서 방치된 아이들, 결국, 그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나지 못했을 때 미래사회가 얼마나 많은 부담을 안게 될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결론을 도출하면서, 방치된 아이들에 대한 대사회적인 관심이 필요함을 주장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들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경쟁사회로 치달으면서 경쟁의 대열에서 낙오한 이들의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너무도 많이 봐와서 무덤덤해졌습니다. 그렇게 좌절에 빠져 살아가다 분노가 표출되고, 그 때문에 대사회적인 문제가 생기면 그들에게 손가락질합니다. 자기가 그런 상황이 아니면, 그들이 무능함을 비웃습니다. 그들과 같지 않음에 내심 안도하면서 그들과 다름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누구입니까?
결국, 우리의 이웃이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우리와 형제자매입니다. 그들의 아픔에 무관심하면서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하루에 400만 명씩 기아로 죽어가는 이 현실에서 음식물쓰레기가 넘쳐나고, 비만 때문에 건강을 해치는 일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합니까? 한미FTA와 한중FTA 때문에 피폐화되는 농촌 농민들의 아우성은 또 어떻게 바라봐야 합니까? 서울의 역사마다 골판지를 깔고 밤을 지새우는 노숙자나 온종일 폐지를 주워 팔아야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고 사는 도시빈민들의 삶, 평생 몸바쳐온 직장에서 갑자기 해고통지를 받은 해고노동자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스펙쌓는 것도 모자라 학비를 벌기 위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시급을 받으며 일하는 학생들, 입시경쟁에 학원으로 내몰린 아이들, 인간의 취미와 여가를 위해 마구 파헤쳐지는 산야와 파괴되는 자연……. 그 모두 누구입니까? 그들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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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곳곳에서 그들이 아프다고 신음하고 있는데 무관심합니다. 그들이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이것이 오바댜 선지지가 에돔에 대한 죄악상을 고발하는 내용과 무엇이 다릅니까?
크게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에돔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벌, 쓴잔을 마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그들의 배신과 탐욕 때문에 검불처럼 타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쓴잔은 마시기 싫고, 오로지 자신의 탐욕을 채워주시기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셨습니다. 기적의 자리에서는 언제나 그들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때론 연민으로, 때론 분노로 오로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매진하였습니다. 쓴잔을 원하지 않으셨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기에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들 중에는 예수님이 마셨던 쓴잔은 거절하고 오로지 포도주잔, 달콤한 잔만 바라는 이들이 많습니다. 온갖 아름다운 말들과 봉사와 헌신이 넘쳐나지만, 그 내면 깊이 들어가 보면 정치가들이 국민을 위해서라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각종 아름다운 말들만 난무한다고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고, 정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면서 구호만 난무하면 형식적인 신앙인이라 질책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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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회개의 구체적인 증거는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우리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면, 이웃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 그것을 이기주의라 하여 오랫동안 배척해왔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의 현실을 가져온 것입니다. 자기를 진정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형식적인 사랑만 오간 것입니다.
 
자기를 진정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존재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존재가치 역시도 자신의 존재가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이웃의 범주는 사람들과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귀한 존재,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장님이요, 그들의 절규를 듣지 못한다면 그것이 귀머거리요, 그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아픔을 대변해 주지 못한다면 그것이 벙어리인 것이지요.
 
장님이 눈을 뜨는 기적,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는 기적, 벙어리의 혀가 풀리는 기적은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는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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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눈을 떴다 하고, 귀가 열렸다 하고, 혀가 풀렸다고 하면서 이런저런 온갖 것에 대해서 말로만 이웃사랑을 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른바, 형식적인 신앙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그렇게 살려는 의지도 없으면서 타인을 향해서만 잣대를 들이미는 것입니다. ‘캐논’, 그것은 먼저 자신에게 엄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밖으로만 엄격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일을 할 때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남에게는 한없이 엄격한 사람은 객관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권력을 쥐면 자신만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까지도 타락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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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절 이하에는 희망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이 있고, 시온 산은 거룩한 곳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 것입니다.
다 망한 것 같아도, 결국 살아남은 자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 세상을 가만 바라보면, 살아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도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듯이 그렇게 다 죽지 않았고, 다 타락한 것도 아닙니다. 소수지만, 그런 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새 역사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십시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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