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깊은 사랑이 흐르는 세상을 위하여
(레 19:9-10, 눅 7:11-17)
지난 화요일, 셋넷학교를 들렀습니다. 평소에 궁금하던 차에, 새벽녘 셋넷학교 교장선생님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탈북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가서 아이들을 만나는 꿈을 꾸고는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그날 아침에 들렀습니다. 가보니 나름대로 열심히들 살고 있었습니다. 현재 7명의 학생이 있는데, 제일 나이가 많은 친구는 중장비기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자격증을 딴데다가 최근에는 대형트럭 면허까지 땄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정도면 어디든 일단 취직은 할 수 있지만, 기왕이면 좀 안정된 직장을 얻었으면 좋겠는데 생각만큼 원주에 사회적 인프라가 많지 않은 것 같다는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우리 교회에도 온 적이 있는 자매 한 사람은 상지영서대 사회복지학과에 잘 다니고 있답니다. 공부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잘 해낼 줄 믿으며 우리 같이 응원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삶의 상처가 깊은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티를 내지 말고, 자신들 스스로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속 깊은 사랑으로 지지해줘야 하겠습니다. 강 건너 불 보듯 수수방관하는 것도 합당치 않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나서다가, 행여 그들을 대상화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움을 주고받는 일이 자칫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그 점에서 깊이 음미할만합니다.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는데 에둘러 도와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사실, 얼마나 자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일을 합니까? 필요 없이 이것저것 물어보고, 노골적으로 동정하고, 사진찍고, 상품화하고....
바라기는 우리 사회가 좀 속 깊은 사랑을 할 줄 아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속 깊은 사랑이 흐르는 사회에서는 맺히지 않습니다. 사람 사는 사회이기에 이런저런 가슴 아픈 일이 전혀 없을 수야 없겠지만, 설령 그런 일이 있어도 누군가 그 마음을 헤아려서 어루만져주고 풀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그런 사랑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맺힌 사람들이 많이 생깁니다. 한이 맺히면 어떻게 됩니까? 화병이 되고, 암덩어리가 되고, 귀신이 됩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잖아요.
아직도 서울 대한문 앞에서는 쌍용자동차 문제 해결을 위한 시위와 기도회가 계속되고 있고, 원전사태, 국정원 불법선거개입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요구를 요구하는 시위와 성명서, 골프장 문제해결을 위하 기도회 등, 전국 곳곳에서 항의시위, 농성, 자살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들어주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일방적 밀어붙이기로 맺혀서 그렇습니다. 이거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계속 이렇게 무시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누가 있어서 그 한 맺힌 사람들을 찾아가 말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속 깊은 사랑으로 위로해주고 억울한 눈물을 닦아줄까요?
누가복음 본문을 생각해봅니다. 본문의 과부가 어떤 여자인지, 그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우리는 자세한 사정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알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불쌍한 여자라는 것, 누군가 다가가 위로해줄 필요가 있는 가슴의 응어리가 있는 여자라는 것입니다. 몇 살에, 어쩌다가 과부가 되었을까요? 아들은 언제 낳았을까요? 또 그 아들은 어떻게 하다가 죽었을까요? 그 청년은 제대로 눈을 감았을까요? 누군가 맺힌 한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듣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다가가서 그 답답한 관 속에 갇힌, 내버려두면 원귀가 되고 말 그 청년의 한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맺힌 것을 풀고 떠나고, 그래서 생명의 선순환이 막히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어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상여를 멈춘 다음 관속의 청년의 한을 들어주심으로 그것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죽었던 자식이 다시 살아났을 때 어머니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살아도 그냥 산 것이 아니잖아요. 죽을 때는 아들이 맺힌 모습이었겠지만, 다시 살아난 아들의 모습은 평온한 모습이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누군가 자신의 소리를 들어줄 때, 누군가 진심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이해해줄 때 사람은 자존감이 생기고, 여유가 생기고, 생기가 돕니다. 예수님을 만나 큰 사랑을 경험한 청년의 얼굴은 응당 환하게 변화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생기있게 변한 아들을 다시 얻은 어머니의 얼굴은 얼마나 또 환하게 변화되었을까요?
지금 다비다가 원장으로 있는 단계동 한울어린이집 앞, 그러니까 이전 교회당 건물 앞 골든빌라에는 김금옥 집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동네 쓰레기를 모아 팔아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분인데, 어느 날 우연히 그분의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 앞에 쓰레기를 쌓아놓고 있길래 지나가다 서서 말을 걸었더니, “에휴, 이렇게라도 해야 먹고 살지요.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늘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하고 하소연을 시작하였습니다. 혼자 사는 줄 알았더니 집에 아들이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무슨 아들이 집에 있으면서 이렇게 힘든 일 하는 어머니를 거들떠도 안 보나 했더니, “애가 많이 아파요.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해서 살아가는데, 만성 우울증에다가 늘 무슨 환청을 듣는대요.”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찌나 측은하던지, 차마 외면할 수 없고 마음에 계속 부담이 되어서 어느 날 집을 방문하여 그 아들을 만나게 되었고, 꽤 많은 얘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어요. 그러는 중 문막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면서 한 동안 못 보게 되었고, 또 우리가 반곡동으로 이사오게 되면서 1년 이상 못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한울어린이집에서 화요일마다 예배를 인도하게 되어 갔다가 길에서 또 그 집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들 정현씨의 안부를 물으니 집에 와 있다고 그래요. 그러니 또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 집사님은 스물일곱엔가 남편이 돌아가셨는데, 그때 정현씨는 3살, 위로 5살, 7살인 누나 둘, 이렇게 3남매를 두고 있었대요. 재혼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못 했겠어요? 그러나 그러면 자식들이 눈칫밥 먹을 것 같아 그냥 이대로 살자, 그래서 한 평생 혼자 살게 되었는데, 무진 고생을 하셨겠지요. 그런데 세상에, 그렇게 고생하면서 자식을 키우면 자식들이 다 잘 돼야 할텐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중학교 스무살 무렵부터 이상해졌습니다. 환청에 시달리고, 우울증으로 고생하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20년이 넘은 거예요, 아들이 그렇게 된 것이.
그런데 지난 주에 만나 얘기를 하면서 이 친구에 대해서 제가 새로운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자기 꿈 얘기를 하는 겁니다. “꿈을 꾸었어요. 나는 도시로 가려고 하는데 자꾸만 촌으로 가게 되어 힘들었어요. 그리고 귀신도 봤어요. 하얀 소복을 입고 공중에서 날아와 내 머리를 움켜쥐고 확 잡아당겼어요.” 그 동안 제가 꿈 공부를 좀 했기에 이게 그 친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 제 나름대로 꿈투사를 해서 그 친구에게 제 생각을 말했지요.
“그 꿈이 내 꿈이라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꿈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른데, 내 의지도 좋지만, 꿈이 말하고 있는 걸 들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도시생활을 좋아하고, 또 이런저런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내 본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도 많은 것 같다. 나는 심성이 착하고 감수성도 예민하고 시적이고 예술적인 품성의 소유자인데, 도시의 경쟁적이고 공격적이고 복잡한 생활방식과는 잘 안 맞고, 또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반드시 몸이 어떤 반응을 하게 되어 있다. 그 동안 많은 신호를 보낸 것 같다. 그런데 세상이 그런 소리를 어디 귀담아 들어주나? 나 자신도 덩달아 내 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꿈에서 소복입은 귀신이라는 게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한을 품었다는 얘기인데, 무슨 한일까? 본성을 억압하고, 제발 내 소리를 들어달라고 애원하는데도 안 들어주니까 맺힌 한이다. 귀신이라고 하지만, 그건 밖에서 들어온 게 아니고 내 안에 있는 나의 일부다. 내 속, 내 무의식이 내 의식에 말을 걸어오는 건데, 안 들으니까 비상수단을 쓴 거다. 변장을 하고 무섭게, 이래도 안 들을거냐, 제발 내 소리를 들어다오......무섭지만, 그만큼 내가 위기에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거고, 역으로 이런 꿈이 생각났다는 것은 내가 이젠 그 문제를 다룰 능력이 생겼다는 걸 말하는 것이니 나로서는 이 꿈이 참 반갑다.... ”
이런 얘기를 하니까 잘 듣더라구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일리가 있는 얘기예요.” 하고 대답하구요. 그 친구 고향이 횡성 근처의 시골 마을인데, 그날 그 동네도 가서 구경하고, 같이 드라이브 하고 걷고 밥도 먹으면서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보니까 이 친구가 굉장히 편안해졌고, 헤어질 때는 그러더라구요. “목사님, 오늘 저를 잘 대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이제 목사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는데 마음이 왜 그리 짠하던지요.
요컨대, 내 곁의 지극히 작은 한 생명에 대해서도 속깊은 사랑으로 배려해주는 따듯한 마음이 우리 안에서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동안 참으로 정신없이 살아왔는데, 이제라도 그 정신없는 발걸음을 멈추고, 진실로 우리 영혼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여유를 갖고 내 내면의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편안히 들어주기만 해도 맺힌 것이 풀어지고 흐를 것이 정상적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리고 흐르면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생명의 기적입니다. 우리 모두 그러한 삶을 향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보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