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의 소명(召命)
빈센트 반 고흐의 소명(召命)
Compassion: Solidarity, Consolation, and Comfort
긍휼(矜恤): 연대(連帶), 위안(慰安), 위로(慰勞)
헨리 나웬 / 최종수 옮김
(역자 주: 헨리 나웬 신부는 지금까지 미치광이 화가로만 알려져 있던 빈센트 반 고흐의 기독교 신앙과 영성을 처음으로 다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일깨워준 분입니다. 여기 옮긴 글은 나웬 신부가 남긴 아마 고흐에 대한 유일한 논문입니다. 신부님이 1975년 12월 16일부터 1976년 1월 3일까지 네덜란드에 머무는 동안,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와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쓴 글입니다. 1976년 3월 13일자 America 잡지에 실렸던 “Compassion: Solidarity, Consolation and Comfort" 라는 고흐의 소명에 대한 글입니다. 이 글의 내용이 나웬 신부가 예일 신학교에서 1977년과 79년에 강의한 “The Ministry of Vincent van Gogh”라는 목회학 과목의 중요 골자를 다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웬 신부는 “상처 입은 치유자”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그 관점에서 고흐의 생애와 작품을 통하여 학생들 스스로 진정한 목회자란 어떤 사람인지, 또한 진정한 기독교 목회사역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하였습니다. 이 귀한 자료를 찾아 준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John Kelly 도서관 Henri Nouwen Archives의 책임자 Gabrielle Earnshaw와 출판을 허락해 준 Henri Nouwen Literary Center의 Sue Mosteller 수녀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이 번역문은 한국기독교연구소 간, <세계의신학> 2001년도 겨울호에 실린 것을 옮겨 온 것입니다.)
긍휼(矜恤 compassion)
최근에 제 친구 한 분이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는데 긍휼(矜恤 compassion)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지금까지 들어 본 어떤 설명보다도 더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말씀드림으로써 오늘 저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인도에 아주 늙은 노인 한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은 날마다 새벽에 갠지스 강둑에 난 커다란 나무 밑에서 명상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노인은 막 명상을 마치고 눈을 뜨자, 전갈 한 마리가 하릴없이 거센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떠내려가던 전갈이 나무에 가까이 오게 되자 강물 속으로 뻗어 내린 긴 나무뿌리에 그만 걸려버렸습니다. 전갈은 죽어라 하고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얼기설기 엉켜있는 뿌리에 점점 더 얽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본 노인은 곧 길게 늘여진 뿌리 쪽으로 몸을 굽혀 물에 빠진 전갈을 구하려고 손을 뻗쳤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손이 전갈에 닿자마자, 전갈은 냅다 달려들어 사납게 쏘았습니다. 순간, 노인은 본능적으로 손을 끌어당겼으나, 곧 다시 몸의 균형을 잡고, 죽어라 고투(苦鬪)하는 전갈을 구하기 위하여 뻗어간 뿌리를 따라 몸을 뻗쳤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손이 전갈에 가까이 이를 때마다 전갈은 독(毒)있는 꼬리로 사정없이 쏘아서, 그만 노인의 손이 부어오르고 피를 흘리게 되었고, 노인은 그 아픔을 참느라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바로 그 때 지나가던 사람이 뿌리 위에 몸을 뻗치고 전갈을 구하려고 애쓰는 노인의 모습을 보고 소리쳤습니다. “저런, 어리석은 늙은이 보았나. 정신 나간 것 아니오? 어리석은 바보나 목숨을 걸고 그 추악한 쓸모없는 놈을 구하려 할 것이오. 그 배은망덕한 것 구하려다 당신 죽을 것을 모르신단 말이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낯선 사람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여보게, 쏘는 것은 전갈의 천성(天性) 아닌가? 그렇다고 그것을 구해 주고자 하는 내 천성을 포기해야 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옳습니다. 문제는 그것입니다. 물어뜯고 쏘아대는 세상에서 쏘인다고 하여 긍휼을 베푸는 우리의 천성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인지요? 이 노인과 전갈의 이야기는 서로 싸우는 것이 인간의 발전과정을 지배한다고 믿는 사회에 큰 도전을 해 옵니다. 이 이야기는 서로 얼싸안는 것이 물리치는 것보다, 입 맞추는 것이 물어뜯는 것보다,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미움으로 노려보는 것보다, 서로 친구가 되는 것이 경쟁자가 되는 것보다, 화평하게 하는 것이 전쟁보다 더 사람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줄여 말씀드린다면, 서로 불쌍히 여기는 긍휼히 각축(角逐)보다 더 사람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 타고난 인간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전에 저는 늘 신학자나 정신과 의사, 아니면 심리상담가나 그 밖의 다른 전문가에게 지도(指導)받기를 청하곤 했습니다. 그 분들은 제게 많은 도움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또 모든 인간정서의 가장 사람다운 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학계(學界)에 의존함으로써 저 자신도 전문가가 되어야했는데, 그렇게 되기 위한 훈련이나 기술을 다 갖출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화가에게 안내를 청하면 어떨까요? 화가들이 긍휼에 대하여 가르침을 줄 수는 없을까요?
제가 네덜란드 사람인데다가,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 가운데 가슴을 찢을 듯 표현된 긍휼을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에, 저는 고흐를 지도자 삼아 그의 그림과 동생 테오(Theo)에게 보낸 편지들을 중요 자료로 써서 긍휼에 대하여 한 번 탐구해 보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는 긍휼--심지어 독살스러운 전갈마저 불쌍히 여기는 긍휼이 인간의 더할 나위 없는 가장 고귀한 천성일 뿐만 아니라, 이 귀중한 천성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일에 반 고흐 같은 화가가 독보적인 안내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고흐의 편지들을 읽고 또 그의 그림들을 찬찬히 정관(靜觀)해 보면, 긍휼의 세 가지 중요한 면이 드러남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연대(solidarity), 위안(consolation), 그리고 위로(comfort)입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복되다”고 말할 때, 우리는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고난 받는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눈물을 흘림으로써 인간적 연대를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함께 삶의 상처를 깊이 아파함으로써 위안을 주고, 인간의 고통 저 너머에 빛나는 힘과 희망에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위로해 줍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과 글을 통하여 바로 이 연대와 위안과 위로에 대한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흐의 생애야말로 전갈을 구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늙은 나무뿌리 위로 몸을 뻗치던 노인의 생애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연대(連帶 Solidarity)
긍휼은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내 자신이 모든 인류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의식 안에, 또한 온 인류가 하나라는 깨달음 속에, 그리고 모든 사람이 언제 어디에 살고 있든지 같은 인간조건(human condition)으로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지식 안에, 그 자체의 모습을 들어냅니다. 이러한 내적 연대를 통하여 모든 다른 피조물과 맺은 연대관계도 더 깊게 느낄 수 있습니다.
언뜻 보아 이 인간의 연대관계는 스스로 분명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많이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가정 안의 갈등관계나 인종갈등, 나라 안이나 나라 밖의 국제 갈등관계 속에서 이 인간의 연대의식이 뒤로 밀려나고 그 대신 분계선 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인간의 에너지는, 다는 아니라 해도, 대부분 개인과 사람모임 사이의 차이를 방어하는 데 사용되고, 서로 거리를 유지하도록 규정된 자신을 지키는 데 쓰고 있습니다. 대체로 자기이해는 우리가 서로 어떻게, 또 어디가 다르냐는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차이점이 바로 우리”라는 식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보다 더 빠르다, 더 느리다, 더 머리가 좋다, 더 손이 빠르다, 또는 더 친절하다....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자기가 누구냐 하는 것이 남과 다르다는 데 바탕을 두지 않고 오히려 똑같은 존재라는 데 두고 있습니다. 긍휼(compassion)이라는 말은 마치 “동정”(同情 sympathy)이라는 말처럼, “.....와 함께 고난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먼저 고난당하는 같은 인간조건에 참여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사람이고, 자기정체의 닻을 인간의 공통된 경험에 내리고 있음을 기꺼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토마스 머톤(Thomas Merton)은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연대를 깨달은 다음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람 눈을 속이던 이 차이의식에서 벗어난 해방감은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을 만큼 나를 홀가분하게 해주었고 또 기쁨을 주었다. 나는 그 기쁨을 이런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하느님,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전 다른 사람과 똑같습니다. 저는 오직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입니다.....인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 머톤이 지적한 중요한 점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똑같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곧 우리의 가장 깊은 자의식을 들어내 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똑같다는 사실(human sameness) 속에 될 수 있는 대로 완전히, 그리고 아주 깊게 참여하기를 열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빈센트 반 고흐의 천재적 재능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청년시절 대부분 고흐의 특징적 모습은 그가 목사가 되려고, 그리고 다음에는 화가가 되려고 애썼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목사나 화가가 되려던 소명(召命 vocation) 가운데 그가 분명하게 보여준 것은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과 짓밟힌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는 길을 찾았다는 사실입니다. 1878년 25살 때 고호는 신학을 공부하려고 암스테르담에 갔습니다. 그러나 라틴어나 희랍어 같은 필수과목에 점점 흥미를 잃은 나머지,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정말 이런 소름끼치는 과목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평안을 가져다주기를 원하고, 그들이 땅위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고흐는 그런 실용성 없는 학과목을 공부하는 일이 꼭 필요한 것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말대로, “위대한 가난대학교의 무료 과목”을 택하고자 하였습니다. 몇 달 뒤 그는 벨지움의 외떨어진 보리나쥬 탄광지대로 가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동생 테오에게 편지하기를, “우리 인생의 본분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 하느님의 종이 될 것을 간구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쓸쓸함과 외로움, 가난과 비참한 신세, 그리고 모든 일의 종말, 또는 그 극치에 다다른 모습을 보게될 때, 우리 마음가운데 하느님 생각이 일어나는구나. 적어도 지금 나의 형편이 그렇단다....”하고 말했습니다.
고흐는 광부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그저 설교하고 가르치고 회개하게 하는 것이나 또는 그들의 삶의 형편을 바꾸어주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보다 광부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은 가난한 그들과 더욱 깊은 연대를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고흐는 보리나쥬의 생활에 대하여 동생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내가 이러한 지역에서 언제나 배우며 관찰하면서 한 삼 년 동안만 일할 수 있다면, 참으로 들을만한 값있는 것을 가지고 돌아 올 것이다. 나는 정말 겸손하게, 그러나 자신을 가지고 이 말을 하는 것이다.”
보리나쥬 탄광에서 일하는 동안 여러 실망 좌절을 경험한 뒤에, 고흐는 목사가 아니라 화가가 되어야함을 깨닫고, 그의 인생이 극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명은 여전히 변함없었습니다. “내가 바라고 목표하는 바는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지만, 내가 너무 높게 목표를 잡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그림을 그리고 싶다....사람들이 내 작품에 대하여, ‘그는 철저하게 깊이 느끼고 있구나, 민감 다정하게 느끼고 있구나....’ 하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진척(進陟) 숙달(熟達)되고 싶다.....모든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잘 것 없는 사람, 괴상한 사람, 까다롭고 사귀기 어려운 사람, 사회적 지위도 없고 또 얻을 수도 없는 사람, 한마디로 하층민 가운데 가장 낮은 하층민으로 보이겠지. 다 좋다....그렇다면 내 작품이 이러한 보잘 것 없고 이름 없는 사람의 가슴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구나. 이것이 바로 그런 모든 소리를 듣는다 해도 분노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바탕을 둔 나의 큰 뜻이자 희망(ambition)이다."
민감 다정하게, 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유발(誘發)된 인간조건에 대한 그의 연대를 표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자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고흐의 소명이었습니다. 이 연대를 표현하기 위하여 고흐는 자기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습니다. 고흐는 인간적 연대(human solidarity)로 가는 길이 고통스럽고, 길 양옆에 수양버들(weeping willow)이 늘어선 것처럼 눈물의 길임을 알고 있었지만, 한 번 인생의 목표를 정하자 세상의 아무 것도, 결코 아무 것도 고흐를 되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고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감정이나 곤란을 피하려들지도 않는다..... 내가 입은 은혜를 갚아야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세상은 나를 위해 걱정해 주었다. 나는 땅위에서 30년이라는 인생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무언가 그림이라는 형식의 기념품을 남기고 싶다. 그림에 대한 어떤 취향(趣向)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린 그림이 아니라, 진지한 인간 감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린 그림말이다.”
“진지한 인간 감정을 표현”하려는 것이 고흐의 소원이었습니다. 전도자로 그렇게 하고 싶어 했을 뿐만 아니라, 화가로서 그렇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일은 지극히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고, 한없이 인내하여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고흐는, “그림 그리기란 무엇인가?” 하고 스스로 물은 뒤, “어느 한 사람이 느끼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서있는 보이지 않는 철벽을 뚫고 나아가 일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연대를 이루고자 하는 일은 마치 철벽을 뚫고 나가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연대하는 일은 참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한 번 이루고 보면 활력을 불어넣어 줄만큼 신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림 그리는 일에 열중하던 어느 순간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때때로 무언가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모든 자연이 말하는 것 같다.....누구나 다 그것을 보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볼 눈이 있고, 들을 귀가 있고, 파악할 마음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연이나 하느님은 모든 것을 보고 듣게 하신다.”
이제 긍휼이란 첫째로 연대를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목사나 화가가 다를 것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두 사람은 다 사람들에게 가슴 울리는 감동을 주고자 하고 또 흔히 메우기 어려운 간격(間隔)의 아픔을 느끼고자 합니다. 고호는 어느 날, “어쩌면 우리의 영혼 안에 큰 불길이 치솟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몸을 녹이려고 그 불을 쬐러 오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굴뚝에서 나오는 가느다란 연기뿐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가 버린다.....내면의 불을 간수하면서....누군가 그 불 곁에 와서 앉았다가 계속 머무르게 될 때가 오기를 끈질기게 기다려야 할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머지않아 오게 될 그 때를 기다리게 하자”고 동생에게 편지하였습니다. 참으로 연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연대관계는 참을성 있게 기다림으로써, 그리고 그 위대한 부르심에 변함없이 충실함으로써, 자라나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안(Consolation)
긍휼의 두 번째 특징은 위안입니다. 우리가 남보다 다르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모든 인간조건에 긴밀한 연대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위안이 그 모습을 밝히 들어냅니다. 연대는 단지 긍휼을 위한 조건을 표현해 줄뿐입니다. 그러나 위안은 긍휼이 지닌 내적 역동성을 파악하게 합니다. 회복(restoration)이라는 말에 서로 어금지금하게 걸 맞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위안”이라는 말입니다. 위안이라는 말을 들을 때 처음 연상(聯想)하는 것은 소극적인 뜻으로 이해하는 경향입니다. 그래서 위안이란 아픔을 덮어주는 것, 문제를 잘못 다루는 것, 쓰라린 부분을 피하는 것, 바꿀 수 없는 상황에 순복(順服)하도록 돕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한 소극적 이해의 가장 좋은 예가 “애석상”(哀惜賞) 또는 “장려상”(獎勵賞 consolation prize)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내가 실패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덜 언짢게 느끼도록 해주는, 말하자면 싸구려 선물입니다.
그러나 긍휼의 뺄 수 없는 한 부분인 위안은 고통을 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고통을 공유(共有)할 수 있게 되기까지 더 깊게 해주는 것입니다. 위안은 우리가 외로운 사람과 함께(cum solo)할 것을 요구합니다. 다른 곳이 아닌, 정확하게 그가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함께 해야 합니다. 고난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울지 마세요. 당신의 인생에 너무나도 좋은 일들이 많이 남아있으니까요” 한다든지, “괴로움을 잊어버리고 더 행복한 일들을 생각해 보세요” 하는 것은 비록 우리가 진정으로 하는 말일지라도, 사실은 고통당하는 사람이 지금 있는 곳이 아니라 어떤 다른 곳에 있고 싶어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외로운 사람이 있는 곳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외로워하는 사람을 우리가 있는 곳에 불러 같이 고통 없는 곳에 가자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 누가 고통스러운 곳에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그 누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실존의 상처를 함께 느끼고자 하겠습니까? 그 누가 자기 자신도 실은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며, 자기 역시 약하고 능력이 없고, 결국 자기 역시 피하지 못할 삶의 붕괴를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움 받고자 하겠습니까?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삶의 역사와 역사적 순간������(Life History and the Historical Moment)라는 책에서 지적하기를, 특히 정신분석가와 같은 노련한 전문 치료사가 환자의 공포와 불안감을 완화시켜 줄 때, 사실은 그가 환자로 하여금 죽을 수밖에 없는 끔찍한 상황조건에 직면하도록 권유(勸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공포와 불안 저 너머에 무시무시한 두려움, 즉 우리가 밑도 끝도 없는 깊은 나락(奈落) 앞에 서있다는 실존적 깨달음이 있습니다. 인간치료에서 볼 수 있는 역설(逆說)은, 우리가 일상생활의 고통과 불안을 제거하는 것은 곧 우리 인간존재의 궁극적 상황조건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 일에 대한 핑계도 제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문제를 대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신비와 대결할 것을 서로 권유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가진 공포와 불안은 그 강도(强度)와 본성이 서로 다르다 해도, 바로 이러한 차이 때문에 환자와 치료사(治療師)로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우리의 본질이 고독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서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서로를 위한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위안이란 우리를 서로 갈라놓는 모든 인간의 공포와 불안을 넘어, 우리가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저 무시무시하고 불가사의한 곳으로 이동해 가는 것을 뜻합니다. 에릭슨은, “불안과 공포를 넘어서 우리는 실존적 불안을 직면할 수 있는데, 이 불안이 믿음과 친교를 낳는 보편적 자원(universal resources)을 일깨워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위안은 또한 인간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인간의 근본적인 상하고 찢김(brokenness)과, 연약함(vulnerability)과 죽을 수밖에 없음(mortality)을 돕는 조수(助手 acolytes)로 취급하는 것을 뜻합니다. 위안은 고통을 경감해 주는 기술을 요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이란 우리 인간의 공통된 공포 불안에 가득 찬 상황조건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 것이라고 여겨,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되기까지 그 고통을 더 깊게 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빈센트 반 고흐로부터 위안을 주는 가장 감동적인 얼굴 모습(portraits)을 봅니다. 광부들과 함께 살던 보리나쥬를 떠났을 때, 고흐는 귀를 기울여 들을만한 설교가가 아니라, 눈으로 볼만한 화가가 되려고 애쓰는 도중에 있었습니다. 그 뒤 네덜란드에 머무는 동안 수많은 데생과 유화를 그리면서, 줄곧 인간 심령의 깊은 곳에 도달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고 짓밟힌 사람들과 맺은 깊은 연대관계를 느꼈습니다. 이 연대관계가 고의의 위안 작업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1881년 4월부터 1885년 11월까지, 고흐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본 대로 삶의 핵심에 도달하려고 미친 듯 애를 썼습니다. 에텐(Etten)애서 그는 씨 뿌리는 사람, 비를 든 소녀, 감자껍질을 벗기는 여인, 지팡이에 의지한 목자와 수많은 어두운 색의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병든 농부가 두 손안에 머리를 묻은 채 팔꿈치를 무릎 위에 얹고 화덕 가에 앉아있는 모습을 그렸고, 그가 “기진맥진한 사람”(Worn Out)이라고 제목을 붙인 늙은 남자도 그렸습니다. 고흐가 헤이그(The Hague)로 옮겨갔을 때, 모델로 창녀와 “버림받은"(orphan) 사람을 택하였습니다. 그는 “슬픔”(Sorrow)이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벌거벗은 여인이 절망 가운데 가슴을 찢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몇 달 뒤 네덜란드 동부에 있는 검은 토탄(土炭)의 시골 드렌테(Drenthe)에서 고흐는 밭가는 농부와 목자들이 그들 주변의 땅과 융화된 회색과 검은색의 여러 풍경에 매혹 당하였습니다. 거기서 다시 부모님이 계시던 남부 네덜란드에 돌아 온 그는 배고픈 사람들의 신랄한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들의 머리와 얼굴 생김새를 끝없이 관찰하고 그려 본 끝에, 저 유명한 “감자먹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그 “감자먹는 사람들" 그림을 동생 테오에게 보내면서 그는 그 그림이 “농부들의 삶의 중심”(heart)에서 나온 작품이라고 했는데 옳은 말입니다.
반 고흐는 참으로 인간의 공포와 불안 저 너머로 가서 그의 그림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인간의 깊은 슬픔에 가 닿으려 하였습니다. 고흐에게 그림 그리기란 곧 동료 인간으로부터 우리 인간을 함께 묶어주는 그 무엇을 이끌어내는 것을 뜻합니다.
헤이그에서 고흐는 동생에게, “내가 흔히 가장 심한 비참에 빠져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내 안에는 평온과 맑고 깨끗한 화음과 음악이 있다. 가장 비참한 오두막 안에서, 가장 더러운 구석에서 나는 그림들을 본다.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내 마음은 이 그림들을 향하여 이끌려가고 있다”고 편지하였습니다. 고흐는 인간의 깊고 숨은 슬픔에 가 닿으려 하였고, 우리를 겁주려는 것이 아니라 위안하기 위하여 그것을 볼 수 있도록 표면으로 이끌어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나는 내 작품이 사람들 가슴 안에 있다고 느낀다. 또 땅에 가장 가깝게 머물러야 하고 인생을 그 가장 깊은 곳에서 파악하고, 많은 걱정 근심과 곤란을 통하여 그것을 진전시켜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하였습니다. 고흐는 이러한 그의 소명이 그로부터 무엇을 요구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인생을 그 가장 깊은 깊이에서 파악함으로써 위안을 베풀고자 원하였다면 그는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자기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강력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습니다. “항해사(航海士)는 때때로 폭풍으로 배가 파선되는 대신 배를 진항(進航)하기 위하여 폭풍을 최대한 역이용한다. 내가 너에게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내 안에서 잠시나마 걱정 없는 삶, 번영을 누리는 삶을 원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때, 나는 그때마다 그저 곤란과 걱정거리, 곤경으로 가득한 삶으로 되돌아 가버리고 마는구나. 그래서 생각했다. 차라리 곤경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우자. 곤경이 나를 타락시키지는 않는다. 이 길이 사람을 멸망시키는 길은 아니라" 고.
고흐는 값싼 기쁨을 주려는 유혹, 삶의 표면에 머물고 싶은 유혹, 거짓 즐거움이나 거짓 우울을 보여주고 싶은 유혹에 끊임없이 저항하였습니다. 그에게 기쁨과 슬픔은 완전히 분리시킬 수 없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서로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쉐베닝겐(Scheveningen)의 해변 그림과 헤이그 근처 숲을 그린 그림을 동생에게 보내면서, “해변을 스케치한 그림에는 금발 색깔의 온화한 광경을 볼 수 있고, 숲을 그린 그림에는 어둡고 울적한, 엄숙한 색조를 볼 수 있다. 우리 인생에도 이 두 면이 다 있다는 것이 기쁘다”고 편지에 썼습니다.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두움, 삶의 기쁨과 죽음의 고통, 이 두 면을 다 표현하고자 한 것이 바로 고흐가 뜻한 위안을 주려는 고된 과업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때에도, 언젠가 사람들이 위안을 주는 그의 타고난 재능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하듯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가슴에,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가 닿으려는 줄기찬 노력 덕분에 고흐는 앞으로 언젠가는 자기 작품에 대한 감응(感應)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작품에 대한 금전적 가치에 대하여 말한다면, 내 작품이 다른 화가들의 작품처럼 쉽게 팔리지 않는다고 하여 놀랄 것 없다고 솔직히 말하려 한다. 물론 그런 일이 지금 일어날지 뒤에 일어날지 말할 수 없지만,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길은 신실하게 온몸의 힘을 다하여 자연을 소재로 작업하는 것이다. 자연을 느끼고 자연을 사랑하노라면 머지않아 곧 예술에 진정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감응을 불러 올 것이다.” 참 위안을 주려면 상한 인간의 중심에 다다르기까지 진지한 분투노력이 있어야 하고, 누구나 지닌 공통된 상(傷)한 인간의 깊이에서 긍휼이 표현되는 것인 줄 압니다.
위로(Comfort)
긍휼의 세 번째 국면(局面)은 위로입니다. 고난에 연대하는 일, 비록 이 일이 진정한 고통 나눔이 이루어지기까지 고통을 더 깊게 한다 해도, 이 일은 값싼 동정(commiseration)이 아니라 “위로”로 인도해 줍니다. 위로란 새로운 “함께 하는 능력”(strength together)입니다. 약함 가운데 서로 감싸 안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시작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 어떤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라도 긍휼히 여기고 함께 고난을 당한다면, 또 우리의 가공(可恐)할 고독에 감히 함께 직면한다면, 그러면 새로운 삶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위안을 주는 사랑의 몸짓가운데 외떨어져 겪는 외로움이 극복되고, 그 자리에 두 고독한 사람이 함께 손잡고 환영하는 공간이 생깁니다.
고통을 피하려드는 한, 우리는 삶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혼자서도 독립하여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는 망상 착각에 사로잡혀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광포(狂暴)한 무기가 있어야 합니다. 권력이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는 한, 그 대가는 파괴일 뿐입니다. 그러나 연대와 위안은 위로를 낳습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의 큰 신비입니다. 땅이 갈아엎어져 부서질 때 새 씨앗을 심을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어루만지는 손이 따뜻한 우정을 보여줍니다. 서로 입 맞추면 사랑이 밝히 들어 납니다. 서로 가슴을 열고 서로 다가가 만나면 긴장 갈등이 사라집니다. 눈물어린 눈을 통하여 웃음이 빛나고 무언가 새로운 것, 영원히 신선한 무엇이 실재함을 감지하게 됩니다. 약한 사람들의 교제에서 진정 생명이 솟아납니다. 남자나 여자나 다 자기들의 모든 연약성 안에서 서로 위안을 주기 위하여 자신을 복종시킴으로써 사랑이 몸을 입고 체현(體現)됩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위로를 나타내 보이는 가장 값진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위로는 공동체를 생성하게 하는 하늘이 준 인간의 위대한 은사(恩賜 gift)입니다. 서로 연약함 가운데 함께 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능력으로 한 데 묶여지고, 그 새로운 능력이 함께 한 몸을 이루어줍니다. 연대와 위안은 값싼 동정이나 서로 불평하는 일, 연민으로 마비시키는 일이나, 서로 남의 어깨 위에 흐느껴 울게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를 공동체로 인도하며 그 공동체 안에서 서로 우리의 약함을 고백함으로써 서로 힘을 주고 또 고통을 서로 받아줍니다. 인간 고독의 심연(深淵)을 함께 맞대면함으로써 우리는 실망이 아니라 위로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위로도 우리의 고난을 없애주거나 존재의 불안 공포를 덜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또 위로는 인간이면 누구나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독을 쫓아내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위로는 삶의 현실적 상황조건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끊임없는 새로운 이해를 가져다주는 원천(源泉)으로 여겨 함께 대결하도록 힘을 줍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가장 훌륭한 재능가운데 하나는 위로를 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가 보리나쥬에서 전도자로 일할 때, 부활이 희망의 큰 원천이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어느 말의 생애”(The Life of a Horse)라는 연작 그림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슬프고 매우 음울한 장면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가야만 한다는 것과 우리 또한 눈물과 흰 머리칼을 공유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는 장면이다. 이러한 일 저 너머에 있는 것은, 하느님만이 아시는 크나 큰 신비이지만, 그러나 말씀을 통하여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일러주셨다.” 이 말은 고흐가 25살 때 쓴 말입니다. 그 뒤 부활에 대하여 다시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은 고흐에게 교회와 교회에서 쓰는 용어들이 낯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히 말합니다. “부활”이라는 말은 사라졌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체험은 점점 더 고호의 내적 생명 가운데 실재로 존재하는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고흐는 의식적으로 영원을 추구하였습니다. “버림받은 사람”(Orphan Man)이라는 첫 번 스케치를 동생 테오에게 보내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이 그림에서 내가 표현하려고 한 것은....하느님의 존재와 영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마 노인 자신은 모르겠지만, 조용히 화덕 가에 앉아있는 한 작은 노인에 대한 끝없이 감동을 주는 표현 속에 그것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이것은 결코 달콤한 감상(感傷)이나 목사 집안에 머물던 때의 마지막 찌꺼기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 말은 그의 작품들이 아흐르(Arles)와 오베르(Auvers) 지방의 풍경을 그릴 때 보여준 소용돌이치는 듯한, 또 불타오르는 듯한 붓 길이 점점 더 분명하게 표현된 것같이, 마치 타오르는 불길처럼 확실한 말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언가 고상한 것, 벌레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가장 가난한 벌목공(伐木工), 화덕 가에 앉아 있는 농부나 광부도 영원한 집에 가까웠다는 느낌이나 영감을 가질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 말이다.”
1885년에 고흐는 어두운 네덜란드 시골을 떠나서, 안트베르프(Antwerp)에 잠시 머문 뒤 파리로 갔는데, 거기서 동생 테오와 2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파리에서 도시와 그 주변의 밝고 명랑한 색깔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또 일본 그림에서 정신적 아름다움을 발견하였고, 꽃과 정물을 많이 그리면서, 새로운 환경에서 만난 흥미로운 파리사람 풍의 예술적 기쁨도 맛보기 시작하였습니다.
1888년 2월에 남부 프랑스 아흐르(Arles)로 갔을 때, 그의 깊은 영혼 속에 숨어있던 모든 빛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그가 보는 모든 것 위에 비추게 되었습니다. 감격에 넘쳐서 동생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이건 마치 자연이 불타기 시작하는 것 같다. 모든 것 안에 옛 황금색, 청동색, 구리색....태양이 빛나는구나. 태양은, 더 잘 표현할 말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저 노란색, 유황색, 담황색, 레몬 노란색, 황금색이라고 불러야겠다. 노란색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곳 사람들에 관해서도, “나는 남자와 여자들 속에 무엇인가 전에는 후광(後光)으로 상징되던, 또 색깔의 광휘(光輝)로 표현하던 영원한 자질을 그려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고흐의 그림을 보러 와서, 놀랄만한 재능을 가진 화가라고 감탄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게 되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동생 테오의 아들인 고흐의 단 하나 밖에 없는 조카(나웬이 이 글 쓸 당시 85세 된 고흐와 같은 이름을 가진 빈센트 반 고흐)가 말하기를 고흐의 그림을 보러 온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고흐가 살아있을 때 사람들은 대체로 고흐를 가리켜 어울리기 힘든 불쾌한 사람, 그래서 친구도 없고 물론 이름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그 보다 더해서 고흐는 아주 의심스러운 사람, 심지어 두려운 사람으로 더 유명해진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 고흐가 이제는 그의 그림과 데생과 편지를 통하여 전 세계 모든 나라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목사이자 위로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설명하면서, 고흐의 조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흐는 말하자면 사람들의 피부 밑으로 기어들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도 심지어 가장 평범한 보통 사람인데, 그 사람들의 영혼 한 복판 중심에서 무언가 그릴 가치가 있는 아름답고 고귀한 존엄성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사람들이 고흐의 그림을 보러 왔을 때 이런 말들을 합니다. ‘그 이야 말로 진정 이해해 주는 분이었구나.’ 그리고 사람들은 위로를 받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고흐의 위로하는 목회사역의 중요한 역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운동가(activist)의 그림이라기보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던 묵상가(contemplative)의 그림이었다는 점에서 여실히 보여집니다. 그래서 고호는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물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보다, 사물 자체를 알고 감복하게 하는 것이다.”
고흐는 다른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사람의 내적 아름다움과 그들의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그리고 삶의 가장 더러운 구석으로부터 빛의 서광을 그려냄으로써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볼 눈을 가진 사람들은 이 빛을 보고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빛이 같은 태양으로부터 온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태양, 참으로 태양 말입니다. 어둠침침한 방에 함께 모여 앉아 감자를 먹는 사람들보다도 고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태양이었습니다. 그 태양이 아흐르의 밀밭 위로 이글거리는 빛을 비추고, 그 태양이 씨뿌리는 검은 사람 뒤로 불덩이처럼 솟아오릅니다. 그래서 렘브란트의 “나사로의 부활”을 다시 그리면서 그리스도 대신 태양을 그려 넣었습니다. 고흐는 동생에게 편지하면서, “오! 이 태양을 믿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태양은 곧 어둠 속의 빛, 자연과 사람을 밝게 해주는 빛, 무덤에서 죽은 사람을 불러내는 빛입니다. 고흐의 그림 가운데 태양을 보는 사람은 그가 주는 따뜻한 위로를 느끼고, 고흐가 보여준 연대와 위안이 사람들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숭고한 태양 빛을 보게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람들은 고흐가 긍휼로 가득한 사람이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중요한 소명이지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긍휼은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라 하고, 인간실존의 가공할 나락을 함께 대면함으로써 위안을 주고, 우리를 양육해주는 위대한 햇빛의 반사인 처음 빛을 비춤으로써 위로하라 합니다. 저는 이일을 하기 위하여 한 화가의 안내를 구하였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자신은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마음 속 깊이 그는 자기의 긍휼이 가져올 열매를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분투노력의 결과를 보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삶이 줄 수 없는 것을 이미 알아차린 사람은 인생으로부터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점점 더 분명하게 알기 시작하는 것은 인생이란 단지 씨를 부리는 때요, 그 수확은 아직 여기에 없다는 사실이다.”
혹독한 정신적 고통이 빈발(頻發)하여 고흐는 쌩 레미 요양소에 입원하였습니다. 이 요양소에서 한 일 년 간 입원해 있는 동안 가장 훌륭한 작품들을 남기고, 고호는 퇴원하여 잠시 파리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가쉐(Gachet) 의사의 돌봄을 받기 위하여 오베르로 갔습니다. 그곳에 도착한지 두 달 만에 고흐는 스스로 배에 총을 쏜 다음 1890년 7월 30일에 숨졌습니다.
그가 구해주려고 애쓰던 전갈이 마침내 고흐를 죽인 것입니다. 그의 동생 테오도,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고흐를 이해해 주던 사람이었는데, 형이 죽은 지 육 개월 뒤에 형을 따라갔습니다. 나무뿌리 위로 몸을 뻗치고 있는 고흐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즉 “어리석은 바보나 목숨을 걸고 그 추악한 놈을 구하려 할 것이오” 하고 외치는 우리에게, 고흐는 고개를 돌리고 말합니다. “여보게, 쏘는 것은 전갈의 천성 아닌가? 그렇다고 구해 주고자 하는 내 천성을 포기할 것까지야 없지 않은가?”
<아래는 고흐의 신앙의 역정에 대한 다른 이들의 글입니다. 그의 정신분열에 대한 분석이 책으로 나온 것도 있습니다.>
The Practicing Preacher
At the age of 22, in 1875, he had the burning desire to carry the message of God. He trained to become a Methodist preacher but was unsuccessful. Despite it, three years later, aged 25, he served as a preacher for a religious society at the Belgian coal-mining of Borinage for about two years, in daily contact with material and moral wretchedness. At first, he was a resident, and later, he became an itinerant preacher who practiced Christian virtues with great steadfastness and dedication.
Van Gogh is famous for his paintings but not for his sermons in this tumble-down place of Borinage where there was so much poverty and suffering going on. As a young preacher in this coal miners' town, he attempted to bring the people consolation and comfort through religion. He tended the sick, visited homes, and conducted Sunday services. His sermons were as intense and passionate. He used biblical text and compared people's presence on earth as a pilgrimage. He preached to the weary miners that everyone on earth is a stranger passing by, on the way "home" to a better place.
Van Gogh slept on the floor of a derelict hut with the miners, gave away his possessions, and suffered with them. Sadly, they turned away from him and dismissed him. Brokenhearted, Van Gogh struggled to make his way, but he was always rejected and forsaken. He felt lost.
At Eternity's Gate: The Spiritual Vision Of Vincent Van Gogh
Kathleen Powers Erickson (공)저
출판사: Wm. B. Eerdmans Publishing, 1998
ISBN 0802849784, 9780802849786
224페이지
Most scholars have argued that van Gogh was insane and that his religious life was a product of this madness - and was something he happily abandoned when he left the Christian ministry to pursue a career as an artist. This biography by Kathleen Powers Erickson is the first to demonstrate the falsehood of such assumptions and to argue that van Gogh's spiritual life was essential to the unfolding of his unique artistic vision. Basing her study on solid biographical evidence, van Gogh's personal correspondence, and informed insight into the painter's artistic imagery, Erickson clearly traces van Gogh's pilgrimage of faith, from his early religious training, through his evangelical missionary period, to his struggle with religion and modern thought, and finally to the synthesis of traditional Christian beliefs with the modern world-view that he achieved in both his life and his art. Unique to this study is Erickson's in-depth examination of van Gogh's mental illness, culminating in her convincingargument that van Gogh's "insanity," long assumed - indeed mythologically contrived - to be schizophrenia, was in fact a psychological disor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