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지역 3.1운동사와 공주지방 초기선교
지난 한 주간 감신대 이덕주 교수(역사신학)와 함께 한 셈이다. 이웃교회 부흥회에 왔는데 낮에는 한국교회사를 강의했다. 메시지 코드가 맞다보니 모두 10번의 설교에 무려 8번 참석을 했다. 창세기 1:1-2:3절까지 말씀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 '창조의 영'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말씀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보시기에 좋았더라' '안식의 은총' 등 진귀한 말씀을 들었다.
하나만 소개하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2절)는 말씀을 중심해서 '창조의 영' 성령론을 들려준다. 혼돈, 공허, 흑암은 창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시고 바람 같은 성령으로 홍해를 가르시고(출 14:21), 메추라기를 몰아 먹여주셨으며(출 11:31),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성령이 임하니(행 2:1)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니 혼돈은 질서로, 공허는 충만으로, 흑암은 빛으로 환하게 되었다.
3일 오전에는 '한국교회 처음사랑'이라는 제목으로 한국교회사 특강이 이어졌다. 한국교회의 처음사랑, 찬송만 불러도 눈물이 나고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을 사모하여 산길을 걸으며 감사한 신앙, 그 감격, 감동을 회복해야 한다는 첫사랑의 회복, 회개를 외친다.
함석헌 선생이 25세에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대한 해석도 가슴에 남는다. 침략자 일본은 "한국은 저주받은 백성이라 고난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데 대하여 함선생은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은 우리 민족은 고난의 역사를 살아오며 스스로 낮아지고 가난해지고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아주 좋은 옥토였다. 그래서 인구비율로 보면 세계제일의 선교대국이 되었다. 한국교회사는 순교의 역사요, 일제와 공산주의의 핍박 속에서 열정있는 교회가 되었다.
오후에는 강사 이 교수와 함께 부여지역 교회와 3.1운동사 발자취를 둘러보았다. 강경만세운동을 주도한 청포교회와 침례교 모교회로 불리우는 칠산교회, 그리고 충청지역 최초 1919. 3. 6일 3.1만세운동을 일으켰던 임천장터와 발원지로 3.1기념 만세운동 기념공원이 있는 충화지역을 둘러보았다.
4일과 5일 오전에는 계속해서 한국교회사를 들려주었다. 같은 역사이야기라도 이교수의 카리스마 넘치는 강연은 감동이다. 4일 오후에는 공주기독교역사발굴 재전시회장에 들러 전문가적인 이야기를 보탰다. 공주기독교역사순례코스 개발 및 선교사기념관 건립추진위원으로 가입원서와 건의문에도 서명을 하였다. 5일에는 '공주지방 초기 선교와 부흥운동'에 대해서 공주의 자긍심을 들려준다.
특히 공주 최초 수세자 오긍선(吳兢善, 1877. 10. 4~1963. 5. 18)에 대한 증언은 감동이다. 구한말의 계몽사상가이자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의사, 사회사업가이다. 피부과, 내과 의사였으며 피부과학 개척의 선구자로 인정된다. 그는 공주 사곡면 운암리 출신으로 바뀌는 세상에 고민을 품고 서울로 간다.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개화파로서 이상재, 서재필 등과 함께 협성회,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일하다가, 수구파들에 의해 독립협회 회원들이 구속당하는 와중에 담넘어 피신했는데 선교사 스테트먼 선교사집에 피신, 고향인 공주로 함께 와서 금강에서 1900년 공주 최초로 침례를 받는다. 군산까지 가서는 알렉산더 선교사를 만나 도미하여 루이빌 의과대학을 졸업, 피부과 의사가 되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자격도 얻어 군산, 광주, 목포 등에서 의료 선교활동을 하다가 1912년 세브란스의전 조교수, 교수로 취임했다. 이후 30년간 세브란스 의전에서 의사, 교수 1934년에는 세브란스의전 제2대 학교장에 취임, 63년 돌아가실 때까지 근무하여 연대의대 세브란스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복음의 힘은 민족의 독립과 한 영혼의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음을 알게 한다. ☺

해관 오긍선 선생상 - 서울 세브란스 앞에서

역대학장사진 : 앞줄 왼쪽부터 이영준 오긍선(가운데) 최동, 뒷줄 김명선 이용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