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9일 성령강림절 넷째주일 경동칼럼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일까?
지난 목요일 선배 목사님께서 페이스 북에 소식을 올리셨습니다. 요사이 제 칼럼을 보시는 분들이 많아지셔서 실명은 이야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선배 목사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교인들이 맘을 모아 매입한 새 교회 공간 인테리어 작업이 한창인지라, 요즘은 정말 이러다 과로사, 순교하겠다 싶을 만큼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바쁘고 분주하다. (중략) 공사 진행 과정에 뭐 빠진 것 없나, 잘못된 것 없나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분주한데, 거기 더하여 공사 때문에 피해 받을 수 있는 주변 이웃들 두루 신경 써야 하고, 부족한 재정도 충당해 와야 하고, 공사 마치자 마자 구비해야 할 의자, 성구, 음향, 간판 등등도 미리 준비해야 하고 , , , 하니, 좀 지친다. 상가 한쪽 70평 작은 공간을 개조하는 이 정도 공사도 이리 힘든데,,,"
선배 목사님께서 신경 쓰시는 공사 때문에 피해 받을 수 있는 주변 이웃들이 누굴까? 선배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참, 오늘 오전에는 아래층 통일교 목사님을 처음으로 만나 환담을 나누었고, 오후에는 우리교회 관리위원회 집사님들과 함께 우리와 같은 층을 쓰는 여호와의 증인 대표들을 만나 일종의 '상견례'를 치루었다. 여기는 과천의 '종교빌딩'. 이분들과 '이웃'으로 함께 살아가야 한다. 이 일은 긴장되기 보다는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 그런 마음이 들어 다행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는 선배 목사님을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뭔가 좀 이상한 목사들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는 소위 이단이라고 하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참 흥미진진합니다. 도대체 왜? 이단에는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는데 사람들이 몰린단 말인가? 무엇이 문제일까? 먼저 목사들의 책임이 큽니다. 교우들께서 말씀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충분히 인도하지 못하는 목사 탓입니다. 그 다음으로 말씀을 읽기만 하고, 말씀을 깊이 깊이 묵상하며 뜻을 새기지 않는 교우들 탓이기도 합니다. 말씀은 체득되어야 합니다. 삶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일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쳤으니까요! 과연 그럴까요? 창세기 23장 1-19절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하느님께서 왜? 그런 요구를 하셨을까?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런 동요가 없이 길을 나섭니다.
여러분은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이 좋으니까요! 과연 그럴까? 창세기 21장 8-21절에는 이삭이 젖을 떼자 잔치를 하는데 하갈과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고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십시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몹시 괴로워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스마엘을 내치라는 사라의 말에는 괴로워하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습니다. 왜? 아브라함의 반응은 이렇게도 다를까요?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다구요?
신화와 전설, 고고학적 자료로 미루어 볼 때 페루·잉카·고대 이집트·메소포타미아·팔레스타인·이란·인도·그리스·로마·중국 등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서는 대부분 신을 위해 인간을, 특별한 경우 자기 아이를 제물로 바쳐던 관습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바치라는 신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신의 총애를 받고 죽음을 넘어선 불멸의 존재로 한걸음 다가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아무런 동요가 없었던 것을 다분히 믿음이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 위에 올려 놓고 죽이려는 순간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창세기 23장 12절)
많은 기독교인들은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에 강조점을 둡니다. 저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이렇게 들립니다. "너의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는 너의 믿음을 알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들을 포함한 인간을 제물로 받는 신이 아니다. 나는 인간을 제물로 기뻐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는 이삭을 바친 때문이 아니라, 창세기 1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돌라오멜이 자기와 동맹을 맺은 왕들을 데리고 소돔까지 쳐들어와 롯을 사로잡아 갑니다. 아브라함은 삼백열여덟 명을 데리고 단까지 쫓아가 적들을 쳐부수고 롯과 사로잡혀 간 이들과 재물을 되찾아 옵니다. 소돔왕과 멜기세덱은 왕의 벌판에서 아브라함을 맞이 합니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모든 왕을 제압한 제왕, 황제로 귀환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9개 나라를 복속한 아브라함은 자신의 이름으로 민족과 국가를 이룰 수 있는 통일제국의 과업을 이룬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민족은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제왕이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제국의 황제가 되는 길을 버리고 9개 나라의 왕으로부터 쫓기는 불안한 나그네로 돌아가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갑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된 이유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정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속에 담긴 놀라운 진실을 외면 한 채, 우리의 입맛에 맞는 대로 해석하다 길을 잃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말씀 속에 진리를 깊이 깊이 묵상하며 체득하는 느린 걸음이 필요합니다. 말씀에서 샘솟는 영혼의 맑은 물로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