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년 1 월 27 일(주일) 오전 11 시 광주가나안교회 _?xml_: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서본문 : 고린도전서 13 장 1 절 - 13 절
제 목 :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이 여러분의 삶 전체를 적시기를 축원합니다. 은총과 평화가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고린도전서 13 장입니다. 특별히 13 장 중에서도 13 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함께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제일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믿음도 소중하고 소망도 소중한데 왜 사도 바울 선생님은 사랑이 그 중에 제일이라고 하였을까? 사도 바울 선생님이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셨을까? 이 말씀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에 있었으므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실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그 문제들을 바울 사도는 하나씩 지적합니다. 1 장에서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등 여러 파당들의 문제들을 언급합니다. 2 장에서부터 12 장에 이르기까지 "성적 부도덕의 문제",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하는 문제", "우상 제물의 문제", "성찬의 문제" 등 각양각색의 교회 안의 문제를 놓고 조목조목 언급하여 지적합니다. 이것들이 고린도전서 1 장에서부터 시작하여 12 장에 이르기까지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12 장까지는 실로 여러 가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걱정하고 책망하고 권면하다가 13 장에서 이르러서는 그 분위기가 급하게 변합니다. 편지를 쓰는 형식에서 갑자기 “사랑에 대한 노래, 사랑에 대한 시”가 나옵니다. “내가 사랑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이 노래와 시는 13 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함께 있을 것인데 그 중 제일은 사랑이라” 이렇게 13 장이 끝나고 있습니다. 왜 갑자기 바울이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죽 나열하면서 갑자기 문맥이 맞지 않은 사랑의 노래가 나올까?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필설로 하나하나 조목조목 야단치다가 갑자기 단지 하나의 편지 내용이 아닌 가슴의 한 가운데서 스며오는 감동의 멜로디로, 영혼의 맑은 가락으로 울려나는 노래로 바뀌어 집니다. 왜 그렇게 바뀌어졌을까? 그런데 대해서 고린도전후서를 아무리 훑어보아도 그 어떤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 저는 나름데로 이렇게 추측해봅니다. 물론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를 서두를 쓸 때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교회의 모든 문제를 무척 염려하면서 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12 장 31 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면서 13 장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내가 또한 너희에게 좋은 길을 보이리라고 했을 때 여기서 “내가”는 그저 한 인간인 바울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은 바울이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가장 좋은 길을 바울의 입을 빌려 친히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1 장에서 12 장까지의 고린도 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은 바울을 감동시키셔서 가장 좋은 해결의 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해인 수녀는 그의 시에서 “나는 하나님의 몽당연필”이라 노래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3 장 1 절이 바로 그런 분위기입니다. 바울의 편지는 비록 연필은 바울이 들고 있었지만 쓰신 것은 마치 엄마가 아이 손목을 잡고 글을 쓴 것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바울의 손을 감싸쥐고 쓰신 것입니다. 아마 바울도 이때 마음은 감동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의 손이 필사하시는데로 자신의 손을 거기에 맡겼을 것이고 이때 바울의 가슴은 근원을 알 수 없는 기쁨으로 포위당하였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고린도교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모든 해답이 들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 방언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성령은 바울을 감동시키셔서 한 마디로 정리하여 주십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수십 가지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하늘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쓴다고 해도 사랑 없으면 의미없는 소음으로 시끄럽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예언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성령은 또다시 바울의 손목을 부여잡고 쓰셨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간단히 정리하셨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집단으로 패를 나누어 아볼로파니 게바파니 하여 서로 싸웠습니다. 성령께서는 바울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이렇게 쓰게 하셨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파당 싸움에)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 교회에 사랑은 없고 육욕과 음행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성령은 연하여 바울의 손목에 힘을 주셨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치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처음 1 절에 피아니시시모로 시작하던 노래와 시는 13 절에 이르러서 포르테시시모로 바뀌어 지면서 climax를 이룹니다. 성령은 바울의 잡던 펜대에 힘을 주십니다. “그런즉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 제일은 사랑이라” 바울 선생님이 고전 13 장 13 절 부분을 쓰시면서 분명히 성령께서 불러주시는 말씀에 감동되어 아멘! 아멘! 하시면서 이 말씀을 받아 적으셨을 것입니다. 자! 고린도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 즉 방언, 파당, 음행, 예언, 우상 등의 각종 문제로 복잡하게 되어 있었을 때 성령님의 고린도교회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이었습니까? 딱 두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 교회에 사랑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을 초등학교 산수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 빼기 사랑 = zero라 그 말입니다. 둘째는 교회에서 제일은 사랑이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항상 있어야 할 것이 믿음 소망 사랑인데 그 중에 제일로 있게 해야 할 것이 사랑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만일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그 뜨거운 사랑을 제일로 있게 했다면 고린도 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었거나 아니면 그런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는 가운데 그런 문제들은 사랑이 제일이 되는 용광로 속에서 다 타고 녹아 없어졌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주시는 멧세지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는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랑이 제일로 있게 해야 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노래를 끊임없이 불러야 합니다. 왜 사랑이 제일일까? 생활 속에서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요? 자식이 하는 행동이나 말을 믿지 못하는 부모는 많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 믿지 못할 자식이라도 자식이기 때문에 끝까지 사랑합니다. 자식에게 바램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에 대한 바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조정현이 쓴 소설 <가시고기>를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자식이 골수암에 걸려 살 소망이 없다고 해도 오히려 그럴수록 아버지는 자식을 부여잡고 사랑의 크기를 더해갑니다. 그러나 그 반대는 진실이 아닙니다. 자식을 신뢰하는 그 신뢰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자식에 대한 바램만으로 산다고 해도 그 자식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것이 어디 부모 자식 관계입니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삶을 이루는 항상 있어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 속에는 삶을 충만케 하는 에너지가 담겨 있습니다. 믿음이란 존재의 용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 자체가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소망은 어둠 가운데서도 우리 삶을 영롱하게 하는 여명의 빛이 있습니다.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삶의 모든 것(everything)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만이 삶의 전부입니다.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람도 사랑입니다. 우리 삶 역시 사랑입니다. Love means everything입니다. 사랑하면 그게 모두입니다. 사랑의 품은 넓고 넓어서 그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사랑의 속은 깊고 깊어서 그 안에 믿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이 아닌 것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저 높고 높은 하늘 끝에 올라가면 우주의 끝자락에 천국이 있겠습니까? 천국은 어떤 초월적인 공간이기에 앞서 사랑이 제일이 되는 바로 그 곳입니다. 천국이란 다른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평화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나옵니까? 그 모든 하나님의 은총이 샘솟는 근원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 아니십니까? 어떤 사람은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의 피가 A 형인지 O 형일까 궁금해합니다. 그 시대로 가서 검사를 해보아야 알겠지만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피는 사랑의 피요, 예수님의 살은 사랑의 살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그 뜨거운 사랑의 결정체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닙니다. 교회는 무엇일까? 교회는 무슨 다른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존재하게 된 그리스도의 사랑의 몸입니다. 저는 책상에서 일하다가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거실로 나옵니다. 그런데 막상 거실에 가면 내가 왜 거기에 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다시 돌아와 책상에 앉습니다. 그러면 왜 거실로 갈려고 했던가를 떠오르게 됩니다. 교회가 출발했던 그 자리 즉 사랑의 자리를 회복하면 교회는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고린도교회가 문제가 생겼을 때 바울을 감동케 하셔서 가장 근원적인 사랑의 해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교회는 사랑이 제일이 되고 최고의 가치가 되고 삶의 원리가 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제일이 되어야 하고 사랑이 주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제일이 되지 않을 때 교회는 고린도교회와 같은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제일이 되면 그 어떤 문제도 아침의 이슬방울 쉬 사라짐과 같이 사라지고 사랑이 제일이 되면 불이 켜졌을 때 어둠이 온데간데 없듯이 모든 형태의 어둡게 하는 요소들이 자취를 감춥니다. 꼭 교회가 문제가 생기니까 그 해결책으로 사랑으로 제일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본질적으로 사랑이니까 끊임없이 사랑이 제일되게 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교회는 더욱 예수님의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오랜 교회생활을 하면서 무엇인가를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목사는 기도하는 것이나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이나 말씀을 전하는 것이나 그 모든 면에서 아직 왕초보이구나!!를 금방 느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느낀 그대로 저는 목회를 하면서도 지금 여러 시행착오를 겪고 있으며 영적인 면에서 교회를 잘 이끌고 있지 못합니다만 그렇다고 저에게 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목회의 초보의 경지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가나안 교회에 대한 분명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꿈은 여러분이 지금 보시는 오른쪽에 써 있는 푸른 꿈입니다. “말씀의 꿀과 사랑의 젖이 넘쳐흐르게 하소서!” 특별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넘쳐 흐르는 꿈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교역자가 그리스도 사랑 가운데 성도들을 사랑하는데 제일이 되는 꿈입니다. 바울 선생님은 자신이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립보서 1 장 8 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란 무엇입니까? 심장에 뜨겁게 흐르는 피, 뜨거운 사랑 그것입니다.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이 바로 인류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가만히 지난 1 년을 되돌이켜 보면 저는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성도들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제 몸 하나도 추스르지 못하여 허약한 몸으로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뜨거움을 전달하지 못한 악하고 게으른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저 역시 우리 교회의 목회서신인 아가페 플러스에다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담담하게 쓸 수 있는 바로 그 날이 오도록 기도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교역자가 성도를 사랑하는 일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성도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차고 넘치도록 받도록 예수님의 사랑으로 연결시켜 주는 일입니다. 부족한 종은 앞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 우리 가나안 교회 성도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피부로 느끼고 주 예수님께서 날 사랑하심을 떨리는 가슴으로 쿵쿵거리는 고동으로 느낄 수 있도록 기도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둘째는 저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가장 많이 사랑을 받는 교역자가 되는 꿈입니다. 바울 선생님이 쓰신 여러 서신에 보면 바울 선생님은 자신이 목회하였을 때 사랑했던 교인들의 이름을 실명으로 언급하며 자신이 누구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구태여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개척하였던 교회의 여러 성도들로부터 집중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고린도 전서 16 장에 나오는 이 두 사람이 진실한 사랑으로 바울 사도를 흠모하고 따르고 바울이 쓸 것을 잘 공궤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이름을 쓰면서 몇번씩 문안하라고 그랬습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디모데 후서 4 장)에서 또 부리스길라와 아굴라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가만히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사도 바울 선생님을 너무도 사랑했던 것 같고 바울은 그것을 깊이 마음에 각인이 되어 편지 쓸 때마다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이 편지가 그냥 편지입니까? 바울서신은 나중에 성경이 되어 세대와 세대를 거치면서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사랑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차세대인들에게 그들은 기억될 것입니다. 현재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후손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가문의 영광 아닙니까?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다니요? 주의 종은 사도입니다. 주의 종을 돕고 주의 종을 사랑하고 그의 쓸 것을 공궤하며 그를 돕는 일은 나중에 하나님의 구속사의 페이지에 책갈피가 꽂혀져 영원토록 기록되는 일입니다. 저 역시 바울 사도와 같이 성도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그 사랑을 넘치게 받고 싶습니다. 저의 목회의 최대한의 보람은 다른 무엇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로부터 받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1 년간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보자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린 주님의 사랑보다도 여러 성도들이 저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훨씬 많아 저는 사랑의 빚을 많이 지고 있습니다. 저는 바울 사도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여러분을 사랑하고 성도들로부터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은 사랑을 받는 꿈을 키워갈 것입니다.
셋째, 우리 가나안 교회가 교역자와 성도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제일이 되는 꿈입니다.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 돌리는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 이상의 다른 일이 없습니다. 새벽 제단에 나오신 분 중에서 기도를 그렇게 끝내는 분이 있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그 분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분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정점은 주 하나님 주 예수님 성 삼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우리 삶이 불꽃이 되어 타오르는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우리 자신들을 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 사랑이 그 만분지일에는 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글이 있습니다. 저번 호주 올림픽 때 이름을 잘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출전한 어떤 수영선수가 다른 선수들은 열심히 자유형으로 스피드있게 전진 전진을 하고 있는데 개헤엄으로 끝까지 헤엄쳐서 비록 꼴찌를 했지만 수영장 관객들이 죽겠다고 웃으면서도 기립박수(standing ovation)를 보냈고 나중에 그는 세계적인 영웅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자기가 속한 나라에서도 영웅이 되었습니다. 살다보면 그런 일이 좀 자주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는 모든 경우에 적용되어선 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자신이 주님 사랑하는 본질적인 일에 뒤떨어지거나 꼴찌가 되면 갈채는커녕 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교역자와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그 어느 누구에도 뒤지지 않은 강력한 열심과 열정과 열망을 가지게 되기를 기도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시편 시인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편 42 편 1절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어디 숨어버려 안계시는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그토록 사랑하는 애타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 다른 것이 아닙니다. 원 없이 맘껏 사랑받고 또 전심으로 사랑하며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넘치는 사랑 받으며 불붙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다가 가면 그 인생이 좀 짧으면 어떻습니까? 타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있고 그로부터 불같은 사랑 받으면 그것 역시 인생을 제일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인생의 의미 이상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 성도들이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인해 화염의 불길 속에 쌓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뭐 그런 노래도 있습니다만 저와 여러분이 서로의 눈빛을 봐도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기억하실 줄 모르지만 저는 미국에서 아이들이 함께 “가을동화”라는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딸은 그 드라마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고 LA에 갔더니 박상규 목사님의 딸은 그 드라마를 볼 때는 언제나 손수건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그 동화는 지금 아시아 곳곳에서 방영이 되어 그 드라마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은 아주 유명하여 세계속에 한류의 열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가을동화를 드라마 연출가가 <겨울연가>를 최근에 내놓았는데 이 드라마로 인해 여인천하의 시청자들이 채널을 돌리고 인터넷에 접속이 폭주하는 등 이상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겨울연가>라는 드라마의 내용도 역시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는 진부한 내용인데도 시청자들이 몰리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아무리 진부한 주제라도 곧 드라마가 됩니다. 저는 우리 가나안 교회 성도들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가나안에서 주님께로부터 은혜와 사랑을 담뿍 받고 순결한 영혼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교역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심장으로 성도들을 사랑하고 성도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들간에 사랑이 서로 교통하는 언어가 되며 사랑을 제일로 있게 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과 사랑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드라마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이 세우신 이 교회에 주의 말씀과 주의 사랑이 흘러 넘치게 해 주시옵소서. 모든 성도들의 심장의 고동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으로 계셔 주시옵소서. 언제나 사랑이 제일이 되는 교회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저희 모두가 사랑 가운데 하나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저희 모두가 사랑의 따뜻한 빛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주 사랑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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