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년 8 월 25 일(주일) 오전 11 시 광주 가나안교회 주일낮예배 _?xml_: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본문 : 고린도후서 1 장 8 절에서 9 절
제 목 :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가나안 성도 영혼과 가정과 자녀들 위에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본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사도 바울 선생님의 두 번째 편지 첫부분에 있는 내용입니다. 8 절에 봅시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여기서 “우리”란 사도 바울 혼자만이 아닌 복수인데 그럼 사도 바울과 누구를 지칭한 말일까? 오늘 본문 1 장 1 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를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는 말씀은 꼭 알기를 바란다! 간절히 알기를 원한다는 수사학적인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꼭 아시아에서만 환난을 당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곳곳마다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환난을 당했습니다. 본토 이스라엘과 성도 예루살렘에서도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고 복음을 전하다가 유럽에서도 고난을 받았고 바울 사도가 활동의 주요무대인 소아시아 동서남북 천지사방을 발로 걸어다니며 복음을 전하면서 엄청난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그 어떤 환난을 당했을까요? 이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둘째 편지 후반부에 바울이 자신이 당한 환난을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 장 23 절 하반절에서부터 27 절까지 봅시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 속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여기 보면 사십에 하나 감한 매라고 하는데 왜 사십에 하나를 감했을까요?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율법의 어긋난 이들을 정죄하여 매를 때리는데 사십대를 때리니까 죽어나가고 사십에 하나 감한 삼십구대까지는 죽지는 않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십에 하나를 감하여 때렸는데 바울이 유대지방과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맞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니 도대체 몇 대를 맞은 것입니까? 39 곱하기 5니까 195 대를 맞은 것입니다. 한 대만 맞아도 살떨리는 일인데 195 대를 맞았으니 골병이 들어도 한참 들었을 텐데 그리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한번만 맞았어도 웬만한 믿음 있는 사람이라도 이제 복음 전하는 것은 내 육신을 생각해서라도 이제 그만하자! 지금까지만 해도 충분하다고 자위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은 것만이 아니라 그 보다도 더한 고난을 헤아릴 수 없이 당했는데 그런 시껍한 경험을 했다면 복음 전하는 일이 몸서리를 쳐지는 일일텐데 사도 바울은 그치지 않고 갖은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복음 전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의 강도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본문 8 절 후반절에 있습니다.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실로 엄청난 환난 때문에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오면 깊은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런 기도를 드린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 생명을 이제 거두어 가십시오!”, 제가 무등산 제일 기도원에 있었을 때 막바지를 앞두고 자세히는 기억을 할 수 없습니다만 37 일과 39 일 사이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온 몸을 사로잡았습니다. 누워 있으면 어떤 굉장히 무거운 바위 덩이가 머리를 짓눌러 어떤 캄캄한 곳으로 심해 깊은 바다로 끌고 내려갔으며 거기가 바로 지옥이었습니다. 잠이 안와 일어나 있으면 구토가 시작되었는데 하루 24 시간을 한 숨도 자지 못하고 계속 구토를 했는데 속에서 한번 시작이 되면 오장육부가 다 쥐어 짜여지면서 그것들이 위로 다 올라올 것 같았습니다. 살 소망이 끊어지는 캄캄함이 거기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저를 데려 가신다고 해도 아멘입니다는 기도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고통은 이런 류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40 일 중에 특별히 몇일 당한 고통과는 도무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수백배 수천배 수만배 사도 바울이 회심한 이후 순교하기까지 일생동안 엄청난 고통으로 인해 시달렸으며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당한 것 이상으로 환난을 당하여 그야말로 고통의 꼭지점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짐이 점점 무거워지고 환난이 삼각파도와 같이 자신의 몸과 육체와 영혼을 뒤덮어갈 때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것 마냥 고통스러울 때 바로 그 순간 아마 기도를 통해서 분명 물어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복음을 전하는 저에게 왜 이런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오는 것입니까? 고통을 당할 때마다 그는 묻고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바로 어느 순간 사도 바울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었고 주 성령님의 깨우침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소중한 깨우침이 바로 오늘 본문 9 절에 나옵니다.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삶에는 뜻이 있습니다. 고통이나 환난도 사실 우리 삶의 일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 속에도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환난과 고통 가운데 깊으신 뜻을 일러 주셨고 바울 사도는 자신의 덮치는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높고도 깊으신 뜻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뜻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을 의뢰하라는 것입니다. 의뢰란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의지 플러스 신뢰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신뢰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에게 환난과 고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 고린도후서 1 장 8 절과 9 절을 통하여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는 자신을 의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여러 삶의 어려운 일을 경험하고 나서 결론을 엉뚱하게 내립니다. 그래 세상 믿을 것 없어! 친구도 믿을 것이 못돼!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에 덧붙여 그래 나만을 의지하는 거야! 적어도 나만 믿을 수 있고 확실한거야! 하면서 자신을 자신을 인도하는 등불로 삼습니다. 그런데 또한 성경은 자신 속에 있는 똑똑함이나 자신의 경험이나 아이큐나 그런 것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죽음을 몇시간 앞두고 제자 아난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쳤습니다. 아난다는 스승인 석가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면 저희들은 누구를 믿고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면 좋습니까?” 석가모니께서 말하시기를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살아가거라 자신이 등불로 삼을 것은 돈 지위, 권력이 아니요 타인도 아니요 진정한 자신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숨을 거두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런데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석가모니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입니다. 오늘 본문 9 절에 보면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석가모니께서는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자신의 등불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밝혀주는 어떤 깨우침이나 자신의 밝혀주는 어떤 명철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도 성경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잠언 3 장 5 절 말씀을 봅시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란 결국 인생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시편 103 편 15 절과 16 절입니다. 신약 베드로 전서 1 장 24 절에서 다시금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인생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과 같은 덧없는 존재로 말합니다.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인생이란 한 인생을 이루고 있는 자기는 믿을만하고 의지할만하고 신뢰할만하고 의뢰할만한 어떤 것이 아니라 심히 거짓되고 부패하고 죄많은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소리 높이 외칩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이사야는 인생 따위를 의지하려는 이를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코웃음을 치면서 코에서 호흡이 떠나버리면 죽어버리는 인생 따위를 의짛사지 말라는 강한 멧세지를 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수많은 고난과 고통 환난을 당하면서도 세상 다른 그 무엇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내적인 어떤 힘이나 자신 밖에 있는 세상 그 , 어떤 것에 기대지 아니하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유대의 최고의 엘리트 코스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것들과 자신에게 가진 것들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을 섬기고 의뢰하기 위해서 그것을 분토와 같이 여겼습니다.
둘째 성경은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도 의뢰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도 믿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래도 내가 가지고 있는 돈만은 절대 신뢰합니다. 그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하나님이고 뭣이고 통하지 않아 그래 자본이 주가 되어야 하고 자본이 중심이 되어야 해 하면서 돈과 재물, 크레딧 카드, 내 통장에 있는 예금잔고에 대해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신뢰를 보냅니다. 그래 역시 결론은 돈이야!! 돈이 나의 생명을 지켜 주고 돈이 나의 존재를 드높여주고 내가 가진 동산과 부동산이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고 돈이야말로 언제까지나 나와 함께 해주시는 나의 수호신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노래를 부릅니다. “돈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풀밭의 정원과 맑은 물이 있는 수영장이 있는 대저택으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나의 동산과 부동산의 거액의 돈이 나와 함께 하는도다. 나의 통장예금잔고와 상승세를 타고 있는 증권이 나를 안위하시는도다. 나의 평생에 돈의 위력과 재산의 힘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돈이 주는 평안함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노래를 부릅니다만 결국 그 노래를 돈편 23 편 1 절에서 6 절까지 다 부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데려가신다면 그는 못다 부른 노래를 아쉬워할수도 없이 땅 속에 묻힐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디모데전서 6 장 17 절입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며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재물은 의지해서 안되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기타 등등의 것들은 어떻습니까? 다윗이야말로 산전수전지상전수중전 다 겪은 백전노장입니다. 그런데 그가 무어라 말합니까? 시편 44 편 6 절입니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라“. 다윗은 수많은 전투에 나가 전쟁을 벌인 장수이지만 칼과 창을 의지하여 싸우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싸웠고 백전백승을 하였습니다. 코카콜라 회사 회장이 돈을 엄청나게 벌었습니다. 그가 돈을 번 액수를 다른 방법으로 계산하면 10 달러짜리 돈을 묶은 다발을 가득 실은 5 톤 짜리 트럭이 매 30 분에 한 대씩 돈을 실고 들어오는 것과 같은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세계에서 코카콜라를 안 마시는 나라가 없습니다. 큰 컵 하나에 가득 따라주면 한 65 센트 약 700 원 정3도 받습니다만 그 분, 코카콜라 회장님이 이 이 세상 이별하실 때 안타깝게도 단 한 병의 코카콜라도 가지고 가지 못했습니다.
셋째, 성경은 이 세상적인 것이나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나를 믿어서도 안되고 내가 가진 명철이나 재물도 의뢰할 것이 못된다면 무엇을 의지하고 살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하면 안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또 어떤 사람은 권세가 있는 사람을 의지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것들을 의지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먼저 시편 146 편 3 절에서 5 절을 봅시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되도다” 방백이란 오늘날로 말하면 도지사와 같은 권세가 있는 사람인데 이런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직 여호와에게 소망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철학을 의지하고 나의 평생의 가치관으로 삼고 거기에 의뢰하면 내 삶이 좀 고상해지고 스마트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골로새서 2 장 8 절을 봅시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성경은 세상철학을 헛된 속임수로,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 눈이 팔리지 말라하십니다. 오늘날의 주요한 철학의 주류는 포스트 모던니즘입니다. “후기근대주의”라고 번역합니다만 이 철학이 정치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종교 각 방면에 파고들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까지 이 사상이 침투하여 진리를 미혹하게 하고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에 침투하고 있는 포스트 모던니즘은 대략 내용이 이렇습니다. 이 넓고도 넓은 세상에 진리가 어찌 한가지 뿐이냐? 진리는 무수하게 많으며 어디든지 진리는 있다. 불교도 진리에 이르는 길이요, 유교나 무교도 진리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며 기독교도 지 잘난체 하지만 진리에 이르는 수많은 길 중에 다만 한 길일 뿐이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헛된 철학의 속임수요 세상의 초등학문이요 사람의 유전이라고 이런 것들에 미혹되지 말라고 하면서 오직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 2 장 15 절에서 17 절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마지막으로 오늘 성경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9 절 하반절은 이렇습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이나 맞고 아시아와 유럽에서 선교사역을 할 때 수없이 많은 여러 환난과 고통을 주심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만의 독특한 훈련과정이었습니다. 고통과 환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케 하시고 고통의 연단을 통해서 좀더 좋은 사도로 연단시켜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힘에 지나는 고통을 통해서 그 고통의 뜻과 의미를 마침내 영적으로 통찰하였습니다. 시편 119 편 71 절에 보면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다윗은 수많은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담긴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삶에는 뜻이 있습니다. 삶의 이루고 있는 중요 부분인 고통에도 뜻이 있습니다. 고통의 영성입니다. 구약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도 신약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바울도 고통과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하시는 그 깊은 뜻을 통찰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지난주 토요일 무등산 제일기도원에서 내려 왔습니다. 그동안 약 40 일을 훨씬 넘어서 목회의 공백이 있는 동안 강단에서 은혜의 말씀을 전해 주신 공로목사님께 마음 속 깊이 감사드리며 저를 위해서 기도를 아끼지 아니하신 당회 장로님들과 남녀신도회 회장님을 비롯하여 저를 그 심산유곡에까지 찾아와 기도해 주시고 격려하여 주신 것을 이 시간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진성구 목사님을 비롯하여 여러분들은 함께 금식을 하신 분들도 있고 잊을 수 없었던 일은 우리 교회 주일학교 어린이 중 한 어린이가 제일기도원에 올라와서 3 일 동안 금식하고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에게 이틀째 되는 날에 하두 애가 타서 “얘야, 밥을 먹지 그러냐? 그랬더니만 아니요 아직 네끼가 더 남았어요 하면서 말한 것은 제 평생에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 시간을 빌어서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교회 성도가 아닌 경우 만나는 사람들은 저에게 많이 말랐다고 어디 아프냐고 물었습니다. 지팽이는 왜 짚고 다니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밥이 보약이다”고 -농협의 선전이기도합니다만- 밥을 몇숫갈 안먹었더니 그렇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 모습이 월드컵 결승전의 외계인 같이 생긴 심판을 닮았다고 했습니다만 저도 그 경기를 본 사람인데 제가 정말 세계적인 인물인 그 심판과 닮은 점이 있는지 거울을 몇 번 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제가 조금은 더 나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제 목회의 동역자들이 전화하면서 "야 너도 징한 놈이다. 징한 놈이다. 뭣할라고 곰같이 우매한 짓을 했냐? 지은 죄를 회개하고 인간으로 거듭날려고 그랬다고 하니까 그럼 기도원동굴에 들어가서 마늘과 쑥은 먹었냐?고 했습니다. 반응이 각각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에게 큰 일을 했다고 하거나 그와 비슷한 표현을 합니다만 그런 말들은 저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습니다. 제가 결단하여 제가 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근무했던 부대인 무열대에서는 군기위반으로 2 회 이상 걸리면 유격훈련소에 입소하게 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제가 목회자로서 함량미달이고 좀더 훈련을 받아야 하겠다고 느끼셨는지 저에게 갑자기 금식을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5 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마음의 가짐을 그렇게 하고 10 일까지는 교회에서 일을 하다가 11 일째 되는 날 무등산 제일기도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시작하게 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순적히 하사 은혜를 주시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저 보다 한발 앞서 40 일 기도를 하고 계시는 전도사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저에게 말씀하기를 목사님은 저만큼 힘들지 않게 하시는 것 같네요! 저는 주변에서 절 위하여 기도하는 분들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무척 힘든데 목사님은 기도해 주시는 분들로 둘러쌓여 있는 것 같네요!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랬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제 주변에서 절 위하여 기도해주시는 분들이 여호와 닛시 중보기도단을 비롯하여 너무도 많은 것을 감사했고 그 분들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도 감사를 드렸습니다.
저는 기도기간 중에 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런 자리로 몰아넣으셨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일기도원에 올라간 직후에 성경을 구약 창세기에서 신약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한번 통독을 했는데 읽다가 오늘 본문인 고린도후서 1 장 8 절에서 9 절에 눈길이 머무르면서 어떤 깨우침이 전깃불이 켜지는 것 같았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예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환난을 주어 전체 사역을 통하여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신 것처럼 부족한 이 종, 함량으로 미달되고 척도로 재어보아도 기대치에 훨씬 못미치는 이 미급한 종을 하나님의 제대로 된 일꾼으로 훈련시키시고자 또한 이 세상 다른 것들에 좌로 치우치지 않게 하시고 교회 목회 아닌 다른 일인 우로 치우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뢰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목회를 하게 하시려고 그런 특별 훈련을 시키시고자 그리고 또한 맡기신 양떼들이 자기를 의뢰하지도 않고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도 않고 소망이 없는 재물에 의뢰하지도 않으며 세상의 헛된 철학 같은 것을 의뢰하지 않고 오직 성도들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하도록 말씀으로 잘 가르치고 사랑으로 잘 양육하라고 목회자인 저부터 특별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금식기간 중 마지막 부분에서는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잠이 오지도 않았고 속에 뭣도 없는데 계속 구토가 나올 때면 오장육부가 함께 기어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지옥같은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그때 다른 무엇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꼭 붙들었습니다. 지팡이를 꼭 부여잡고 오 주님! 오 주님! 오 주님! 하나님 아버지!만 계속 불렀습니다. 그 순간 주님만을 꼭 붙잡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려올 때는 그동안 한정없이 비만 왔는데 내려가는 그 날에는 햇빛이 비쳤습니다. 거기에서 일하시는 권사님께서 워매 우리 목사님이 내려가실려구 하니까 하나님께서 햇빛이 비취네 그러셨습니다. 저는 은총의 햇빛을 받으면서 하산하면서 주변의 눈치를 보거나 다른 그 무엇에 눈을 돌리거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의뢰하면서 하나님 시키시는 목회를 하겠다고 기도하면서 내려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호식도 순적하게 해주시어 이제 지팡이를 버렸습니다. 내일 새벽기도회에서부터 시작하여 주일낮 주일밤 삼일밤 부족한 종은 주 하나님께만 의뢰하면서 우리 주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따라 찬송부르면서 사역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 그냥 훌쩍 지나갑니다. 순간과도 같고 찰나와 같습니다. 그러나 순간과도 같고 찰나와 같은 세상이 중요하고 중요합니다. 순간의 선택이 10 년을 죄우한다는 고아고 선전문구가 있습니다만. 눈깜짝할 새와 같이 지나가는 이 세상을 어떻게 여하히 사느냐에 따라 영원이 결정되고 영원한 삶, 영생이 결정됩니다. 바라고 바라건대 이 세상 사는 동안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자기의 명철이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소망이 없는 재물에 의탁하지 말고 방백이나 권세있는 이를 의지하지 말고 세상의 헛된 철학에 기대지 말고 오직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결정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천국을 허락하시는 하나님만 의뢰하면서 함께 삽시다. 저는 오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을 전하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렇게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 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예레미야 17 장 5 절에서 말씀” 기도> 주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 만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의뢰하면서 살도록 저희의 삶을 성령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전광석화와 같고 살같이 빠른 세상을 오직 주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하면서 살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제 기도를 들어주시고 들어주시겠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치게 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오죽 주의 종으로써 부족하고 목회자로 함량미달이었으면 하나님께서 이런 호된 훈련을 시키시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기간 중에 성경을 구약 창세기부터 신약 계시록까지 읽어나가는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좀더 명확하게 들어왔습니다.
조용기>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명철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교만하다가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파멸을 당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우리의 모든 삶을 기도하고 하나님께 내어 맡깁니다. 하나님의 손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선택을 좇아 인생을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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